시읽는기쁨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샌. 2021. 6. 2. 10:46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만난 여학생(박경련, 蘭)에게 백석은 한눈에 반한다. 통영이 고향인 란은 경성에 있는 외삼촌 집에 묵으며 이화여고에 다니고 있던 때였다. 백석은 통영을 몇 차례 방문하며 란을 그리는 시를 쓰고 구혼까지 한다. 이때 백석의 친구(신현중)가 백석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사실을 말해 버려 혼사가 깨진다. 백석과 란의 사귐을 도와준 신현중은 백석의 자리를 빼앗아 1937년에 란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시에 나오는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동무에게 배신당하고, 가난한 백석은 외딴 곳 함흥에서  얼마나 고적했을 것인가.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흥성흥성한 봄날의 쓸쓸한 풍경이 내 가슴으로도 싸하게 밀려온다. 

 

바로 이 즈음에 백석은 함흥에서 자야를 만난다. 술이 얼근했을 그날 밤, 마주한 자야의 얼굴이 란과 겹쳐지지는 않았을지 백석의 심정을 나는 지금 생각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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