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본 집을 두고 교외에 세컨드 하우스를 갖고 있는 사람이 부럽다. 후배 H가 그런 사람이다. 본인이 하는 일에 딱 맞는 전원주택을 양평에 갖고 있다.
약속 시간이 어긋나는 바람에 오가는 길에 시간 여유가 많이 생겼다. 집에서는 성당 반 모임이 있어서 일찍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덕분에 팔당호를 따라 난 342번 도로를 돌며 장맛비 속 드라이브를 즐겼다.
수청(水靑)나루터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팔당댐이 생겨 수몰되기 전 강 건너편은 넓은 백사장과 갈대밭이 있었고, 수청나루터 부근은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경치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갈수기 때는 강을 걸어서 건너기도 했다니, 물이 가득 차서 호수가 된 지금은 옛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기 힘들다.
안내문에는 수청리에 있는 예쁜 지명들이 소개되어 있다. 고운 우리말이 정겹다.
큰말, 물푸리여울, 윗끔치, 아래끔치, 사청개, 슴말, 언내개울, 주목개, 샛고개, 대감산소께, 아랫말, 중간말, 뒷말, 윗말, 뒷골, 솔개, 응골, 사마바위, 쥐턱뿌리, 긴덩굴, 왕마들, 밤동산, 말굴이고개, 개목이, 넋너머, 구진터, 사깃골, 윗석둔, 아래석둔, 검목바위, 참남백이, 장구매기, 큰남분이, 작은남분이, 새앵두, 새목이, 군두바위, 장승모리, 무당바위, 안개매기, 고적바위, 구릉개, 개울낮이, 되기, 금광굴, 찬우물, 옻샘, 꽃집
단아하고 기품 있는 느티나무가 나루터의 풍경을 살린다.
양평에 사는 다른 친구 L과 점심을 먹고 오후에 후배의 집에 들렀다.
책 한 보따리 싸 들고 가서 한 일주일 푹 묵었다 올 수 있는 작은 거처 하나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호화 저택이어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지만. 거실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누워 빈둥거리며 후배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잠시 사나사(舍那寺)에도 들렀다. '사나사'란 이름이 궁금했는데 '노사나불(虜舍那佛)'에서 따온 이름이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 했다.
절 옆을 흐르는 사나사 계곡은 여름에 피서객들이 자주 찾는다. 장마로 계곡물 소리가 우렁찼다.
돌아오면서 운심리수변공원에 들러 짧은 산책을 했다.
우회하는 길이지만 돌아올 때도 342번 도로를 탔다. 한적한 길을 따라 빗속 드라이브를 즐겼다. 젊었을 때는 이런 날 고속도로로 들어가 신나게 달렸을 텐데, 망설여지는 걸 보니 영락 없이 노년에 들었다는 신호일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갔지만 사람보다는 오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런저런 풍경이 더 좋다. 이것도 어찌 할 수 없는 병통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