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전주천의 저녁

샌. 2023. 10. 17. 11:43

가을 저녁의 산책은 스산하다.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모두가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런 멜랑콜리를 즐기려는 편이지만 가슴 한편이 착잡해지는 걸 어찌할 수는 없다. 시간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허물고 앗아간다. 누구나 활짝 피어나는 봄이 있었고, 눈부시게 찬란한 여름이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오고 찬바람이 불고 맨발로 동토를 걸어가야 한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외면할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힘차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기세가 왕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요양원에서 눈동자가 풀린 채 흐릿한 미소만 짓고 있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장수가 과연 축복인지를 묻게 된다. 어찌 세월만 야속하다 할 수 있으리. 인간이 자연의 길에서 멀어질수록 그만큼 치러야 할 고통도 커지는 게 아닐까.

 

 

전주천을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드니 허물어지는 풍경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정겨운 불빛일 수도 있었겠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평생에 걸친 무수한 근심과 걱정, 심신의 노고는 또 무어란 말인가. 우리를 위무해 주는 철학과 이론과 믿음이 있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얼마만한 효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씁쓸한 생각들이 명멸하는 산책길이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만나는 공간에서 우리는 생명의 유한성을 다시금 인식하며 받아들인다. 우리 모두는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이 너와 나의 가슴에 작은 온기나마 품게 하는 건 아닐까.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내는 유일한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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