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7639

풍경(2)

문정희 시인은 '효자동 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은행잎들 우수수 밀려와 가을이 되면 나는 효자동에 가고 싶어라 효자동 골목길은 오래된 향내가 묻어 있는 길이다. 거기에는 새로 개발된 주택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전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다. 이런 효자동 골목길을 매일 지나다닐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축복받은 일이다. 효자동 골목길을 지나갈 때면 늘 눈길을 끄는 집이 있다. 밝고 화려하게 칠해진 빨간 대문집인데 저 집에는 왠지 작고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나도 저런 빨간 대문이 달린 집에 살고 싶어진다. 예전에 단독주택에 살 때 우리 집 대문 색깔은 어두운 녹색이었다. 2. 3 년에 한 번씩 새로 칠을 하면서 페인트 가게에 가서 꼭그 어두침침했던 색깔만 고집했다. 10..

사진속일상 2005.10.07

종덕리 왕버들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은 물을 좋아한다. 호숫가나 물이 많은 개울가에서 잘 자라는데 어떤 나무는 물 속에서 크기도 한다. 왕버들은 이름 그대로 버드나무 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라고 오래 사는 나무이다. 주산지에 가면 호수 주변에서오래된 왕버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왕버들 한 그루를 보러 김제에 들어서니 너른 평야지대여서 시야가 확 트인다. 지나간 지평선축제를 알리는 안내 깃발도 보인다. 봉남면 종덕리라는 마을은 너른 들판 가운데에 있다. 마을이라면 의례 뒤에 야산을 등지고 있는 풍경에 익숙한데 이런 모습은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왕버들은 마을에 이웃한 앞쪽에 당당하게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왕버들이라고 한다. 바로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아마 이 물이 나무를..

천년의나무 2005.10.06

Job 뉴스 / 장정일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를 본다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 Job 뉴스 / 장정일 개미나 꿀벌을 찬양하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의 고군분투란 Job을 얻기 위한, 또는 더 나은 Job을 차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읽는기쁨 2005.10.05

재산세 6만원

어느 날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번 가을에 나온 부동산에 관한 재산세가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이 오른 재산세 때문에 현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여과없이 털어놓았다. 세금이 올랐지만 우리 사회가 공평하게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 명중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각자 나온 재산세가 얼마나 되는지 묻기 시작했다. 제일 적은 사람이 10만 원대였고 대개는 20에서 40만 원대였다. 몇 사람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고, 제일 많은 사람은 100만 원 가까이 되었다. 거기에 모인 동료들의 나이는 대부분 4, 50대였다. 그런데 나에게 나온 재산세는 이번에 6만원이었다. 물론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은 액수였다. 나이 50이 넘어서 재산세를 고작..

길위의단상 2005.10.04

[펌] 거미의 일기장

내가 사는 곳은 여섯 평가량 되는 방이다. 이곳에는 20여 마리의 거미들이 집을 지어 살고 있으며, 개미들의 나라가 3개국이 있다. 남쪽 모서리에 있는 개미 제국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며, 북쪽 부엌 쪽으로 통하는 벽면에 있는 개미 제국은 최근에 건국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6개월가량 살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거미들과는 왕래를 하지 않는다. 발로 바닥을 딛고 다니는 우리와 달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생명체들도 여럿이다. 여름에는 모기와 나방들이 수도 없이 날아 들어왔고, 요즘엔 파리들이 주로 날아다닌다. 우리는 서로 먹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덫을 놓기도 하지만, 먹지 않을 것을 죽이지는 않는다.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방문이 열리고, 암컷 사람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나를 비롯한 우리 거미들..

참살이의꿈 2005.10.02

신대리 백송

너무 단 맛은 입맛을 잃게 하고, 너무 화려한 구경거리는 뒤의 경치를 시시하게 만든다. 로마 구경은 맨 나중에 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처음 만난 백송이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는 재동 백송이었는데 지금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나무였다. 그것이 나무에 관심을 갖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눈맛을 버려놓기도 한 셈이다. 그 뒤에 만나는 백송들이 기대에 못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천 신대리에 있는 백송은 마을 뒤쪽 경사진 언덕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는 16 m 가량으로 키도 크고 모양새도 좋다. 그러나 백송의 가장 큰 특징이 줄기 색깔인데 이 나무는 흰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무의 큰 줄기는 재동 백송과 마찬가지로V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 안내문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210..

천년의나무 2005.10.01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정일근

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 날숨 고른 숨소리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내가 잠 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 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졌으니 어머니 부엌살림처럼 내 몸 낱낱이 알고 계신다.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정일근 겨울이 되면 온 식구들이 한 방에 모여 잠..

시읽는기쁨 2005.09.30

소립자

오랜만에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미셀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소립자(Les Particules)'라는 책이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물리적 내용을 소재로 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20세기 서구 사회의 변화와 그 와중에 희생된 개인의 일생과 문명의 전환을 다룬 스케일이 큰 소설이다. 특이한 점은 포르노 수준의 적나라한 성 묘사가 가득해서 읽는 사람을 나른하고 어둡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니 ‘소립자’라는 제목이 전혀 엉뚱한 것만도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각 개인은 마치 소립자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소립자는 외부의 물리적 장(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서로 간에 상호작용을 하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이 책..

읽고본느낌 2005.09.29

평화, 그 먼 길 간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평화를 기원하는 거리 공연이 매주 화요일 저녁에 광화문 교보빌딩 옆에서 열리고 있다. 어제 친구와 만나서 이 공연에 동참하기로 했는데 저녁 식사 후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쓸데없는 종교 논쟁을 하는 바람에 늦어져서 공연이 끝날 때쯤 되어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평화, 그 먼 길 간다'라고 적힌 무대는 생각보다 간소했고, 사람들은 보도에 앉거나 서서 두 분의 뜻에 동참하며 열띤 호응을 보냈다. 두 분은 이 땅과 생명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환경과 반전, 소외계층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계시지만, 이번 거리 공연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직접 시민들과 만나며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정태춘 음악과의 인연은 10여 년 전 독일 연수를 갔을 때 맺어졌다. 우리..

사진속일상 2005.09.28

예초기로 잔디를 깎으며

지난달에 예초기를 샀습니다. 잔디를 깎기 위해서입니다. 집 주변에 심어놓은 잔디가 넓지도 않은데 낫으로 깎자면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립니다. 지난 초여름에는 일주일이 걸려도 다 깎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작업이 서툰 탓입니다. 그래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힘들지만 그럭저럭 견뎌냈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예초기로 마당의 잔디를 깎는 것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낫으로 깎는 것에 비하면 순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쉽고 빨리 일이 끝났습니다. 그분은 미련하게 살지 말라며 예초기를 사서 쓸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부탄가스로 작동되는 신형 예초기를 산 것입니다. 저는 기계치(機械痴)라고 할 정도로 기계나 도구를 만지는데 서투릅니다. 어쩌다 기계를 다루게 되면 꼭 무슨 ..

참살이의꿈 2005.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