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7644

빈 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의 빈 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쓸쓸합니다. 논과 밭의 결실을 끝냈는데도 농촌에는 무기력과 한숨만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만나는 농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농업 정책이 세계화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다고도 하고, 이 방법이 농민을 위하는 유일한 거라면서 나라 살림 맡은 이들은 달래지만 살림살이는 해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갑니다. 몸이 부서져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점점 멀어집니다. 농사에 뜻을 두고 투자를 한 사람이라면 빚만 늘어나기 십상입니다. 농민들은 이것을 농업을 포기한 농정 정책 탓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반도체를 수출하는 대..

참살이의꿈 2005.11.14

경복궁 은행나무

경복궁 서쪽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 한적한 곳에 시골 마을의 정자나무 역할을 하는 이 은행나무가 있다. 별로 크지도 않고 눈에 띄는 특징도 없으나 아담한 것이 도리어 더 친근감이 드는 나무이다. 특히 나무 밑에는 줄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벤치가 마련돼 있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는 아주 좋다. 나도 자주 이 앞을 지나가면서한가할 때는 가끔씩 나무 아래에 앉았다 가곤 한다. 지금 뒤쪽은 경복궁 복원 공사로 어수선하지만 아직은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지 않어선지 조용한 편이다. 가을이 되면서 이 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어머니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고, 노란 은행잎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에 발길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는 나무와 사람들의 어울림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

천년의나무 2005.11.12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1994). 목사님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셨다.목사님은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

시읽는기쁨 2005.11.11

짝사랑과 엑스레이

대학교 때 내가 짝사랑한 여학생이 있었다. 다른 과의 여학생이었는데 일주일에 몇 시간은 공통과목 강의를 같이 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까이서 얘기 한 번 나누어볼 기회는 없었다. 어떤 계기로 그녀가 눈에 들어오고 끌리게 되었는지는 너무 오래 되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 사랑의 화살을 맞았다는 것이고, 그 화살이 그녀가 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별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나는 늘 강의실 뒤쪽에 앉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강의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항상 앞 줄 가운데에 앉았는데 긴 생머리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몇 달 동안은 자나 깨나 눈에 아른거리며 상대를 못 잊는 사랑의 병을 앓았다.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

길위의단상 2005.11.10

가을앓이

늦가을 풍경이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 이런 가을을 펼친조물주는 아무래도 심술쟁이인가 보다. 가을을 앓는 사람을 더욱 서럽게 만드니 말이다. 그래도 나로서는 가을의 우울이 이번에는 덜 한 편이다. 한 때는 가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도 했는데, 다행히 올해는 미열 수준으로 통과할 것 같다. 축 늘어져 있는게 안돼 보였는지 옆의 동료가 농담을 한다. "이런 날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나눌 애인 하나 있어야 한다니까요. 아직 그런 애인 없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신경을 쓰고 투자를 해 놓았어야 하는데 말이예요." 아플 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고 싫지만 사랑스런 애인이라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인이 상처를 낫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을의 우울은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덧없음과 관련이 있다. ..

사진속일상 2005.11.09

自歎 / 田萬種

聞古仁無敵 看今義亦嗤 富榮貪益顯 貧賤是爲非 天意豈能度 人精未易知 山深水綠處 早晩不如歸 - 自歎 / 田萬種 예부터 인자무적(仁者無敵) 들어왔건만 요즘 보니 의로워도 비웃음 당해 부유하고 영화로우면 탐욕 더욱 드러나고 가난하고 천하면 옳은 것도 그르게 되네 하늘의 뜻 어찌 헤아리랴마는 사람의 마음 쉽게 알기 어려워라 산 깊고 물 푸른 곳으로 조만간 돌아가는 게 낫겠네 예로부터 사람 마음을 일촌심(一寸心)이라고 불렀다. 한 치 작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한 치밖에 안되는 마음 알기가 천의(天意)를 터득하기만큼이나 어렵다. 마음 속 휘몰아치는 폭풍에 비틀대기도 하고, 음침한 기운에 질식 당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마음 속에서 돋아난 바늘이 나를 찌르고, 상대방을 향해 무수히 날아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시읽는기쁨 2005.11.08

명륜당 은행나무

명륜당(明倫堂) 앞마당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 중중 14년(1519)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두 그루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나무가 더 크다. 그런데 이 나무는 전쟁 중에 피해를 입어 가지가 일곱으로 갈아졌는데도 각각이 모두 굵게 잘 자랐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59 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은행나무는향교나 문묘 등에 널리 심어 온 나무로 우리나라 보호수 가운데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유교와 관련된 기관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공자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행단(杏壇)'이라고불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행단은 일종의 야외학습장인 셈인데, 나무를 뜻하는 '행(杏)'을 은행나무로..

천년의나무 2005.11.07

봉화산과 황사

생활관에 들어가는 둘째의 짐을 실어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봉화산에 들렀다. 봉화산은 서울의 북동쪽에 있는 높이 131m의 자그마한 야산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가 팽창하면서 사방으로 아파트가 들어서 도심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고립된 녹색 섬이 되었다. 약 20여 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데 정상에는 '아차산 봉수대'라고 부르는 봉화대를 복원해 놓았다. 원래 이 산 이름이 아차산이었다는데 조선시대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온 제1봉수로의 마지막 지점이 이곳 아차산 봉수대였다고 한다. 여기서 바로 남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전에 서울을 떠날 생각을 하면서그 해 여름에 서울과 서울 근교에 있는 모든 산들을 다녀 본 적이 있었다. 산 이름이 붙은 곳은 아마 거의 다 찾아보았을 것이다. ..

사진속일상 2005.11.06

한 장의 사진(3)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받은 학교가 K여중이었다. 당시에는 대학 4년 동안의 성적순으로 발령을 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는 정식교사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우선 임시교사로 이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기간제교사였던 셈이다. 그해 12월에 다른 학교로 정식 발령을 받았으니까 여기서는 약 6개월 정도 근무했었던 것 같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첫 직장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 학교이다. 부임하던 첫 날 교무회의 시간에 선생님들께 인사하던 내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데 어느덧 벌써 30년이 흘렀다. 돌아보면 그때와 지금과의 거리가 한 호흡 간격만큼이나 짧게 느껴진다. 그때 내 자리는 시청각실이었다. 선배 선생님 한 분과 같이 있었는데 시청각기자재를 선생님들께 빌려주고 관리하는 일..

길위의단상 2005.11.05

행복 /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란 말을 적어넣는다 - 행복 / 박세현 정말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만큼이나 지금은 황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요사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뉴스의 내용이란 걸 살펴보면 왜 시인이 그 시대를 행복이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시는 노장사상의 '무위(無爲)'를 떠올린다. 세상은 점점 유위(有爲)로넘쳐나고, 그 속에서 무위의 삶이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결코 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행복은 사회 체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뉴스가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까? 뉴스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

시읽는기쁨 200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