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 27

고단(孤單) / 윤병무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을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 고단(孤單) / 윤병무 존재의 쓸쓸함을 자주 느낀다. 한밤중에 잠이 깨서 사위는 적막한데 사근거리는 내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라든가,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돌아오는 어두운 길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라든가 문득문득 사는 일이 ..

시읽는기쁨 2023.06.30

사기[1]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 사기 1, 백이열전(伯夷列傳) 이제부터 을 읽는다. 우선 접근하기 용이한 '열전'에서 시작한다. '열전'은 전에 읽어본 적이 있어서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텍스트는 김원중 선생이 옮기고 민음사에서 나온 다. 총 70편의..

삶의나침반 2023.06.29

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선생이 쓴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다. 전기라기보다는 충무공이 치른 해상 전투를 중심으로 장군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국뽕기가 있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사실(史實)에 입각한 드라이한 설명이 좋았다. 또한 각 전투마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조선 해군의 힘이었다. 천자총통 등의 함포로 무장한 판옥선은 일본 해군보다 뛰어났다. 충무공은 우리 해군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충무공의 기본 전술은 일본의 조총 사거리 밖 먼 거리에서 포로 일본 함선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지형이나 때를 이용한 충무공의 전술이 더해져서 23전 23승의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이 완전히 다른 ..

읽고본느낌 2023.06.28

장마 시작된 전주천

장모님 생신을 맞아 처가쪽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마가 시작된 날과 겹쳐서 사흘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비가 소강상태일 때 전주천변 길을 걸었다. 둔치에는 6월의 코스모스 꽃밭이 있었다. 이미 한창이 지난 듯 꽃씨를 받는 사람도 보였다. 전에는 코스모스가 가을의 전령사라 했는데 이젠 옛말이 되었다. 전주천의 여름은 기생초와 개망초꽃으로 환했다. 군데군데 루드베키아가 화려한 치장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말로는 원추천인국이다. 이 꽃을 보면 여름이 깊어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꽃이 피면 시들듯 인간이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인간은 다가올 죽음을 예견하며 온갖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발버둥친들 피고짐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하물며 어떤 꽃은 개구쟁이의 손에 꺾여서 버려지기도 한..

사진속일상 2023.06.27

사랑방 /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시읽는기쁨 2023.06.24

심심함의 변명

나는 외출보다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다. 대략 두 배쯤 된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집에 있고, 10일 정도밖에 나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은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느냐고, 아내가 늘 신기해 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없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퇴직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삶의 관성이란 무섭다. 봉사 활동이든 취미 생활이든 뭔가를 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 속에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은퇴 후에도 바쁘게 보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앗기고 있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전철에서 보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다. 휴대폰이 없..

참살이의꿈 2023.06.23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석 달 전에 읽은 책인데 차일피일하다가 이제야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을 정리해 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 읽고 흘려버리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내용을 재확인하는 작업만으로도 책을 두 번 읽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의 원제는 '뇌에 관한 7과 1/2의 강의[Seven and a Half Lessons about the Brain]'이다. 심리학자며 뇌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L. P. Barrett)이 썼다. 구성은 제목처럼 7개의 주 강의와 한 개의 보충 강의로 되어 있다. 200페이지 남짓으로 분량이 작아도 내용은 알찬 책이다. 우선 뇌의 정의가 새로웠다. 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생각'이 아니다. 뇌의 임무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

읽고본느낌 2023.06.21

위기의 한국 교육

일전에 지인으로부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인의 딸이 초등학교 교사여서 학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모양이다. 교실 붕괴라는 말은 내가 현장에 있을 때부터 쓰였지만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차마 교육이란 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우선 아이들이 통제가 안 된다. 수업 중에 제멋대로 돌아다녀도 제어할 수단이 없다. 요사이는 벌을 준다고 교실 뒤나 복도에 세워놓는 것도 인권침해라고 항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아이의 다리를 아프게 하고 학습권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해도 수긍하지 않을뿐더러 심하면 아동 학대로 고소당하기도 한다. 내 아이만 귀한 줄 아는 학부모의 행태는 보도에서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단체여행을 가는 아이 뒤를 따라와 제 아이의 잠..

길위의단상 2023.06.20

당남리섬을 산책하고 천서리 막국수를 맛보다

아침에 처가 쪽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아내와 같이 외출을 했다. 멀리 나가지는 못하고 여주 당남리섬을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고 천서리 막국수로 점심을 했다. 기온이 33℃까지 올라간 땡볕 속이었다. 당남리섬은 청보리는 때가 지나 모두 베어졌고, 수레국화 꽃밭도 대부분 꽃이 지고 씨를 맺고 있었다. 개망초, 금계국, 메밀꽃이 그나마 한창이었다. 멀리 남한강 이포보가 보인다. 볕이 따가워 쉼터에서 자주 쉬어야 했다. 사람들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은 운명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데 공감을 했다.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돼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 년의 수를 누리면서 호의호식하는 악인도 있다. 세상은 선악의 결과가 공평하게 구현되는 곳이 아니다. 천도(天..

사진속일상 2023.06.19

마르코복음[81]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처음으로 막달라 여자 마라아에게 나타나셨다. 일찍이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던 여자였다. 그가 가서 예수와 함께 지냈던 이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살아계시며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들은 시골로 가던 중이었는데, 되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사람이 음식상을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 믿고 세례 받..

삶의나침반 2023.06.18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스위치 누르자 전등 켜져 밝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 잘 나온다 냉장고에 일용할 음식의 한 가족 살고 작동 즉시 전율 휘감는 음악 한 그루 나무에도 공생하는 새와 곤충들 있어 저들 숨쉬는 허파와 그 심장 피주머니 숙연하다 그람자 한 필 드리우는 구름과 지척에 일렁이는 바람 손님들 이즈음 왜 이런지 몰라 사는 일 각별히 소중한지 몰라 모든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준령 오르고 있으리 눈물 말리며 걸으리 그러한 이 세상 참 잘 생겼다고 왜 문득 가슴 움켜잡는지 몰라 -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아침에 텃밭에 나가 고랑을 정리할 때 까맣게 생긴 곤충 한 마리가 뽑힌 풀 사이로 기어가고 있었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찮게 보이는 미물이어서일까, 살아가려는 생명의 움직임이 더욱 애잔하면서 숙연했다..

시읽는기쁨 2023.06.17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김형석 선생은 1920년생이니 103세가 되신다. 여전히 저술과 강연 등의 활동을 하는 노익장이 대단하시다. 선생은 우리들 대화 자리에서 노년의 본보기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이시다. 물론 이런 하늘이 내린 혜택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 선생이 행복을 소재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선생의 글은 평이하고 담백하다. 선생의 성격과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삶의 기본이 되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초등학생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에 담겨 있다. '약간 우울한 이야기'라는 글에서 선생은 늙는다는 것은 생활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나이가 들 수록 사회 공간은 없어지고, 활동 영역이 가정 공간으로..

읽고본느낌 2023.06.16

경포호 솔숲

강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소나무와 동해 바다다. 강릉에서는 어디를 가나 쭉쭉 뻗은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강릉시에서도 '솔향 강릉'이라는 네이밍으로 강릉을 알리고 있다. 강릉에 갈 때면 자주 들리는 곳이 경포호 솔숲이다. 경포호와 허난설헌 생가 사이에 잘 생긴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곳이다. 솔향을 맡으며 미인송 사이를 산책하면 기분이 상큼해진다. 강릉의 소나무는 고려 시대 때부터 심기 시작했다는데 나무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이런 멋진 품종의 소나무를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산불이 소나무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 되었다. 올해도 경포해변의 소나무를 비롯해 인근 산의 소나무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과거 기후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이만한 숲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고..

천년의나무 2023.06.15

셋이서 강릉 1박2일(2)

B가 전세로 얻은 숙소는 강릉 시내에 있는 10평형대의 소형 아파트다. 상시 거주하는 것은 아니고 쉬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서 지낸다고 한다. 견물생심이라고 나도 이런 집 하나 가져볼까, 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음만 맞는다면 두 가족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경비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둘째 날은 먼저 허난설헌 생가에 들렀다. 여기서는 언제나처럼 생가 주변의 솔숲이 제일 마음에 든다. 솔향을 맡으며 미인송 사이로 아침 산책을 즐겼다. 난설헌의 묘가 우리 고장에 있어서 더욱 애정이 가는 여인이다. 만날 때마다 애잔해지기는 마찬가지다. 허난설헌기념관을 둘러보다가 한 액자에 이름을 '虛'난설헌이라고 잘못 적은 걸 보고 실소했다. 이런 무신경을 어찌 할꼬. 다시 바닷가를 찾았다...

사진속일상 2023.06.14

셋이서 강릉 1박2일(1)

콧구멍에 바닷바람을 쐬러 가자는 제안에 셋이서 길을 나섰다. 마침 B가 강릉에 마련해 둔 작은 아파트가 있어서 숙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구름 많고 바람 선선한 초여름의 한 날이었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점심은 강릉 초당순두부를 맛봤다. 초당순두부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근래에는 찾지 않았는데 이번에 B가 추천한 '차현희순두부청국장'은 그런 선입견을 불식해줬다. 다음에는 청국장 맛도 보고 싶어지는 집이었다. 먼저 강문해변에 들렀다. 강문해변은 작은 천을 경계로 경포해변과 나란한 곳이다. 강문해변과 송정해변은 아름다운 솔숲길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길을 보면 걷지 않을 수가 없다. 경포해변, 강문해변, 송정해변, 안목해변으로 이어지는 푸른 바다와 백사장, 송림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멋진 풍경..

사진속일상 2023.06.14

코로나 후유증일까

작년 8월에 코로나에 걸렸다. 열흘 동안 격리 생활을 한 후 두 주쯤 지나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사나흘째 되는 날부터 증상(열과 기침)이 심해져서 그 뒤 닷새 정도가 힘들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수월하게 통과한 셈이었다. 코로나 뒤에는 쉽게 피로해지면서 식욕 부진이 따라왔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왼쪽 머리와 안면에 희미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굳어진 느낌이랄까, 마치 창호지를 얼굴에 붙여 놓은 듯 감각이 무뎌졌다. 손으로 만지면 다른 사람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몸 컨디션에 따라 심하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다. 일상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신경을 끄고 지냈다. 이런 증세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으니 어느덧 아홉 달째다. 있는 듯 아닌 듯 미약해서 잊고 사는 때가 ..

길위의단상 2023.06.11

노인의 예절

노인을 대하는 예절이 아니라 노인'의' 예절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60을 넘기면 잔치를 열었고 70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젊은이는 많고 노인은 적었으니 노인은 집안이나 공동체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역전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2025년이면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간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이 1천만 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인이 넘쳐나면 존경과 대우는커녕 자칫하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노인은 생산성이 없어서 경제적 측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적다. 과거에는 지혜와 경륜으로 한몫했지만 이제는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여서 노인이 자리 잡을 영역은 좁아지고 있다.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젊은이에게 ..

참살이의꿈 2023.06.10

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2014년에서 2020년 사이에 발표한 작품 아홉 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단편은 처음 읽어보는데 빨치산이었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생소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이리라. 장편소설인 과 를 떠나서는 작가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이번 단편에서도 '검은 방'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자본주의의 적' 등은 작가의 부모님과 연관된 자전적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단편은 생경해서 전혀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 듯했다. 책의 표제작인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한 자폐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먹으며 번성한다. 아예 소비와 ..

읽고본느낌 2023.06.09

일자, 고덕산 둘레길을 걷다

일자산, 고덕산 둘레길은 서울 둘레길 3코스의 일부다. 용두회 여섯 명이 이 길을 걸었다. 7년 전에 같은 모임에서 서울 둘레길 전 코스를 걸었었는데 그때와는 역방향이지만 완전히 처음 걷는 길처럼 새로웠다. 길이야 얼마나 달라졌겠느냐만 인간의 기억이란 게 대부분 아침 안개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러지기 때문이리라. 이번 길에서는 일자산공원에 있는 미루나무/포플러에 한참 눈길이 머물렀다. 미루나무만 보면 곧장 고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는 신작로 가로수가 미루나무였다. 길 양쪽에 두 줄로 도열하듯 늘어선 키다리 미루나무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미루나무는 동네 앞을 흐르는 냇가를 따라서 자랐고, 저수지 둑방에도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고향이 서운한 것은 미루나무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속일상 2023.06.08

신현회 셋이 부용산을 걷다

코로나 이후로 첫 만남이니 거의 4년 만이다. 신원역에서 다섯 명이 만나기로 했으나 실제 나온 사람은 셋이었다. 한 사람은 아침에 갑자기 불가피한 일이 생겼고, 다른 한 사람은 여름에 산에 오르기가 망설여졌는가 보다. 점심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부용산에 오르기 위해서 몽양기념관을 지난다. 작년에 공사를 시작하더니 왼편에 번듯한 새 건물이 자리 잡았다. 바로 산을 타지 않고 신원리 마을길로 들어선다. 과거 인연이 있는 분의 집에 들리기 위해서다. 정원을 잘 가꾸어놓은 집이다. 노쇠한 어머니 대신 지금은 아들이 거주하면서 관리한다. 구름 끼어서 덥지 않고 바람 시원한 날이었다. 대신 하계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양수리는 선명하지 못했다. 6월의 녹음 속을 걷는다. 부드러운 전나무 숲길이 콧노래라도 나올 듯 ..

사진속일상 2023.06.07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강도야 다..

시읽는기쁨 2023.06.06

아이고

"아이고!" 망팔(望八)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젠 아내나 나나 집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부터 저절로 튀어나온다. 앉을 때도 일어설 때도 무심코 내뱉는 말이다. "아이고!" 불과 몇 년 전이었다. 트레킹 도중에 쉴 자리를 찾아 앉으며 선배의 입에서 "아이고"라고 신음 섞인 비명이 나왔을 때 우리 모두는 웃었다. 벌써 그럴 연세가 되었느냐고 놀리기까지 했다. 이젠 나도 그때의 선배 나이를 지났고, 그리고 똑 같이 되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개화기 때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의 글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조선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이들이 수시로 '간다'라고 말해서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습..

길위의단상 2023.06.05

마르코복음[80]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에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주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에 그들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이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입구에서 돌을 굴려내어 줄까요?" 하면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매우 컸다.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흰 예복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몹시 놀랐다. 젊은이가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여러분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분은 부활하여 여기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분을 안장했던 곳이오. 그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여러분에 앞서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

삶의나침반 2023.06.04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역사학자 김영수 선생이 사마천의 삶을 재조명한 책으로 총 세 권 중 첫째 권이다. 제자와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쉽게 읽히면서도 고증에 충실한 내용이 탄탄하다. 선생은 중국 현지에서 활동하면서 문헌 속에서만이 아닌 현장의 생생한 사마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마천의 일생에는 두 번의 변혁기가 있다. 첫 번째는 20세 때부터 시작한 역사 탐방 여행이다. 사마천은 20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1차 여행은 2년 동안 12,000km를 이동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한다(讀萬券書 行萬里路)'를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두 번째는 49세 때 이릉의 화로 당하게 된 궁형이다. 사마천은 BC 99년에 흉노족에 투항한 장군인 이릉을 변호했다가 한..

읽고본느낌 2023.06.03

족제비싸리

물가나 숲 언저리에서 자주 봤지만 그동안 이름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잎이 아까시를 닮아서 아까시의 다른 종류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꽃이 아까시와는 영 딴판이다. 색깔이나 모양이 가까이하기엔 꺼려진다. 꽃에서 이런 인상을 받는 건 드문 일이다. 이 식물의 이름은 족제비싸리다. 꽃 색깔이 족제비와 비슷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족제비싸리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로 사방공사를 할 때 경사면에 심는다. 아까시나 싸리와 용도가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녀석이니 이제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꽃들의향기 2023.06.02

노루발풀

요사이는 꽃을 찾아다니지 않으니 새로운 꽃을 볼 기회가 없다. 어쩌다가 처음 보는 꽃을 만나게 되면 운이 좋은 때다. 며칠 전 산길을 걸을 때 만난 이 노루발풀이 그랬다. 앞서 가던 몇 사람이 뭔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기에 인연이 닿은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노루발풀은 꽃 생김새가 노루발굽을 닮아 붙은 명칭이다. 산속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다. 노루발풀은 항균작용이 있어서 약초로 쓰인다. 초여름의 숲에서 귀엽고 올망졸망하게 피어 있는 노루발풀 꽃이다.

꽃들의향기 2023.06.02

한평생 /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고 지음도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뿐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 한평생 / 반칠환 본디 짧고 긴 것이란 없다. 짧다고 보면 짧은 것..

시읽는기쁨 202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