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50

자전거 / 이원수

달 밝은 저녁에 학교 마당에오빠가 자전거를 배웁니다. 비뚤비뚤 서투른 오빠 자전거뒤를 잡고 밀어주면 곧잘 가지요. 중학교 못 가는 우리 오빠는 어제부터 남의 집 점원이 되어 쏜살같이 심부름 다닌다고달밤에 자전거를 배운답니다. - 자전거 / 이원수  자주 나가는 야탑역 광장 한편에 '이동노동자 간이쉼터'가 있다. 컨테이너로 된 작은 건물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름 그대로 배달 기사나 대리운전기사를 위한 짧은 쉼터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작지만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발표되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1960대 중반에도 우리 반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

시읽는기쁨 2024.12.24

삼천포 / 백석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볏짚 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삼천포-남행시초4 / 백석  백석은 20대 때 남해안을 여행했다. 통영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쓴 시가 '남행시초(南行詩抄)'로 여러 편이 전한다. 이 시 '삼천포'도 당시의 따사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에 유난히 마음이 가 닿는다. 요사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따스한 가난'에 가슴이 뭉클..

시읽는기쁨 2024.11.26

너의 목소리가 들려

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벌이는 대폭주는 규모가 엄청났고 시민들에게 주는 피해도 컸다. 저게 무슨 짓거리냐,가 대부분의 반응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경찰력으로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걸 원망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들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는 폭주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을 그들의 시선에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가출 청소년의 어두운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이런 삶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지하의 사연을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제이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의 아이들과 지..

읽고본느낌 2024.06.17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 신경림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시읽는기쁨 2024.05.25

눈감지 마라

이기호 작가가 7년 전에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책으로 묶어냈다. 신문 연재의 특성상 짧은 내용으로 된 연작인데, 각 부분이 독립된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면서 일관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방에서 작은 대학을 졸업한 정용과 진만은 원룸을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간다. 번듯한 일자리나 기본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생존경쟁의 정글에 뛰어든 셈이다. 도리어 학자금 융자에 따른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안고 사회생활에 나선 것이다. 둘은 편의점, 택배 상하차, 출장 뷔페, 고속도로 휴게소 아르바이트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으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겨울에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팬티스타킹을 사 입고, 아파도 마음대로 병원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문화생활은 ..

읽고본느낌 2024.03.06

새로운 가난이 온다

철학자인 김만권 선생이 쓴 책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을 선생은 제2 기계 시대로 부른다. 이전 시대의 증기나 전기 에너지에 의한 산업혁명을 하나로 묶어 제1 기계 시대라 하고, 디지털과 AI에 의한 혁명을 제2 기계 시대라 명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만큼 제1 기계시대와 구분되는 근본적이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제2 기계 시대를 맞는 우리의 불안은 대체로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 기계가 마침내 우리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기계가 우리의 일자리를 가져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선생은 다가오는 시대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헤쳐나가자고 한다. 첫..

읽고본느낌 2024.02.14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오누이 / ..

시읽는기쁨 2023.01.16

빈곤 포르노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 부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김건희 여사가 독자 일정으로 병원을 방문해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을 안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이것을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비판하니까, 여당에서는 여성 혐오와 아동 비하라고 발끈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모금 유도를 위해 가난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영상을 말하는 용어다.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유발하는 이런 행위를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으로 비판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먹방을 'Korean Food Porno'로 부른다고 한다. '포르노'가 우리가 상상하는 외설..

길위의단상 2022.11.17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지은이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다가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직장을 잃었다. 수입이 끊어진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돈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삶의 우아함을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 이다. 이제 풍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지은이의 말은 불안한 국제 정세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면 동감이 된다. 전과 같은 고성장의 호황기는 다시 올 것 같지 않고 절약이 불가피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과거와 같은 성장과 자원 낭비가 계속되면 지구가 여러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환경 파괴도 심각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읽고본느낌 2022.08.21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와 '가난'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가난과 단순한 삶을 예찬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짚었다. 는 가난해도 멋있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MZ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소비하는 세대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부모 세대처럼 근검 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부유한 생활을 즐기고, 통장 잔고가 바닥을 쳐도 눈앞의 케이크를 황홀하게 탐닉하는 것이 이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돈 버는 방법은 잘 몰라도 돈 쓰는 방법 하나는 귀신 같이 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카르페 디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가난할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걸 이미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는 수밖에 ..

읽고본느낌 2022.07.24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

시읽는기쁨 2021.11.15

노매드랜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다.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유목민의 땅'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여자 주인공인 펀은 석면 원료를 생산하는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수입이 끊기고 집까지 잃는다.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는 우리나라 IMF처럼 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밴에 살림살이를 싣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단기 일자리를 얻으면서 살아간다. 현대판 유목민의 삶이다. 그렇다고 펀이 절망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처지의 이웃들을 만나면서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도와주며 꿋꿋하게 살아낸다. 무리를 이끌고 지도하는 밥 웰스를 비롯해 영화에 나오는 인물 다수는 배우가 아닌 실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읽고본느낌 2021.05.23

빈곤을 보는 눈

며칠 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최근 3년간의 국가 행복지수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OECD 37개 국가 중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35위였다. 우리 밑으로는 그리스와 터키만 있었다.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는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빈곤율 수치도 행복지수와 마찬가지로 하위권이다. 빈곤율은 약 15% 정도 되는데 우리 아래로는 미국과 일본 정도가 있다. 특히 노인의 빈곤율은 40%가 넘어서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은 경제 규모만 그렇다 뿐이지 삶의 질은 형편 없다. 나라는 부자여도 국민은 힘들게 살아간다. 자칭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도 빈부격차나 빈곤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부동산 폭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읽고본느낌 2021.05.22

조커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계급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은 영화다. 우리만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 어디나 양극화 문제는 심각하다.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다수는 점점 가난과 소외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계층 사이의 이동이 불가능하면 계급사회가 되는 것이다. 계급 차이는 갈등을 낳고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서는 루저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병든 노모를 모시고 힘들게 살아간다. 영화는 그가 사회로부터 멸시와 조롱, 폭력까지 당할 때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커의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동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악마로 변하는 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섬뜩하고 강렬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조커'는 영화 '기생충'과 닮..

읽고본느낌 2019.11.19

우리 시대의 가난

오랜만에 참석한 이번 주 미사의 복음 말씀은 루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비유였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강론을 들으면서 과연 종교적 심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에게 죽은 뒤의 복락에 대한 약속이 타당한지, 부자에게 주는 경고가 그들에게 얼마나 유효할지 자꾸 의문이 생겼다. 예수가 곧 도래할 하늘나라를 강조한 것은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변혁시킬 혁명을 꿈꾸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영적인 혁명만 얘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양극화라고 생각한다.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계급화가 고착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메이저와 마이너 리그로 나누어진 것이 보인다. 요사이 정의와 공정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그마저도 기득..

참살이의꿈 2019.10.05

기생충

지난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기념이 될 성과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 '기생충'이 최초다. 최근에 우리나라가 문화 예술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잠재력이 깨어나 빛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잔뜩 기대를 갖고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수가 9백만을 돌파하면서 힘이 꺾였는지 넓은 극장에는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처음에는 난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이 흘러서야 나름의 감이 잡힌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선'과 '냄새'다. 둘 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경계..

읽고본느낌 2019.06.20

가난한 꽃 / 서지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 가난한 꽃 / 서지월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더 바랄 것이 없으니 자족의 기쁨이다. 누가 봐주든 말든 상관 없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 말한 예수의 뜻도 비슷하지 않을까. 인간 세상에서는 욕망의 꽃밭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뭇 사..

시읽는기쁨 2018.09.23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맨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인간 세상에 가난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다. 돈 많은 사람과 ..

시읽는기쁨 2018.01.24

죽여주는 여자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 늦게서야 보았다. 우리 시대 노인의 성과 가난, 소외 계층의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자극적이거나 웅변조가 아니고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 1인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의 유명도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한 무게감이 있다. 윤여정이 연기한 소영은 파고다공원에서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팔아가며 살아간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으로 통하면서 다른 아줌마의 질시를 받는다.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소영은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죽는 사람보다는 소영의 심적 고통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소영은 일찍 보내주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것..

읽고본느낌 2017.12.01

500원

500원 줄서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모 종교 단체에서 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노인들로 긴 줄이 생긴다는 것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어떤 노인은 새벽에 집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몸싸움도 생기고 싫은 소리도 나오는 모양이다. 500원 때문에.... 500원 주기는 IMF 때 시작했다는데 찾아오는 노인들이 줄지 않으니 중단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고작 500원을,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몇 년 전 보도에서는 꼭 돈이 궁해서 줄 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혔다. 무료해서 놀이 삼아 나온다는 노인도 있었다. 사연도 여러 가지겠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다. 66~75세의 빈곤율은 43%, 76..

참살이의꿈 2017.11.19

강냉이 / 권정생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

시읽는기쁨 2017.09.22

선우사 /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선우사(膳..

시읽는기쁨 2017.05.22

굴뚝집 / 김명국

꿈이 있다면 비록 허름하더라도 내 집을 갖는 일이다 논도 한 서너 마지기쯤 있으면 좋겠다 텃밭도 조금 있고, 남들도 갖기 꺼리는 밭이라도 내 몫이 된다면 그곳에다 채소를 심으리라 경운기는 있어야겠지만 없어도 괜찮겠지 가끔씩은 멀리 가야 하므로, 헌 자전거가 하나 있어야겠다 지붕은 슬레이트든 기와든 상관없겠지만 초가집이면 더욱 좋겠다 손수 들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해두리니, 지붕을 잇는 가을날이면 눈부시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행복하리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더라도 근심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답답하면 논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면,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겠다 옆집에서 넘어온 오이순을 탐내지 않았듯 눈이 많이..

시읽는기쁨 2016.05.13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

시읽는기쁨 2015.09.24

아름다운 가난

"올해 초 우리 가족은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는 아들과 딸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보아야 한다는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여행지 가운데 하나로 포함된, 물 위에 산다는 수상촌을 방문했을 때였다. 수상촌에 가기 위한 배를 타기 전, 여행가이드는 그곳 마을 아이들에게 나줘 주기 위해서 일행들에게 과자를 몇 박스 사도록 했다. 우리는 당연히 마을의 학교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그 과자를 기부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배가 수상촌 초입에 들어갈 즈음 그 가이드는 일행에게 과자 박스를 뜯어서 한 봉지씩 던지도록 했다. 아이들은 줄지어 '강남스타일' 춤을 추고..

참살이의꿈 2015.02.26

인간의 선

고분고분하거나 말을 잘 들으면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렸을 때는 이런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달라진다. 정신적 미성숙자가 아니라면 그런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권위나 체제는 순종하는 인간을 원한다. 잘 길들여진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지만 속내는 지금도 여전하다. 착하다, 선하다, 바르게 산다는 의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선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고 할 때 선하고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선하지 않다면 개인의 선량함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체제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결..

참살이의꿈 2014.07.14

아버지의 일기장

만화가 박재동 선생의 부친이 쓴 일기를 선생이 펴냈다. 선생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건강 문제로 젊은 나이에 퇴직한 뒤 아내와 함께 만화방, 문방구, 떡볶이 장사를 하며 자식 셋을 길렀다. 전 생애가 매일매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의 연속이었다. 부친은 19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 매일 일기를 썼는데, 질병의 고통, 아내에 대한 연민,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 꿈을 이루지 못한 남자의 회한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선생의 부친은 특별한 것 같지만, 일반적인 우리들의 아버지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겉으로는 엄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뒷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면 우리가 알았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

읽고본느낌 2014.05.28

논어[80]

선생님 말씀하시다. "잘났구나! 회야말로. 한 그릇 밥, 한 종지 물로 움막살이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련만, 회는 즐거운 모습에 변함이 없으니, 잘났구나! 회야말로."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 雍也 6 보통 사람에게 가난이 닥치면 괴로움[憂]에 힘들어하지만, 안회는 즐거움[樂]을 변치 않았다. 물질적인 부(富)와 빈(貧)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다. 도가(道家)식으로 말하면 안회는 무위(無爲)의 삶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에서는 마음공부를 공자와 안회의 대화를 통해 설명한다. 장자의 핵심 사상이 유가의 대표적인 두 인물을 등장시켜 설명하는 게 흥미로운데, 허자심재(虛者心齋), 비우는 ..

삶의나침반 2014.04.27

안나와디의 아이들

책을 읽는 내내 슬프고 우울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안나와디는 인도 뭄바이 공항 옆에 있는 빈민촌이다. 저자인 캐서린 부(Katherine Boo)는 4년 동안 안나와디 주민들과 함께하며 가난한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사건을 생생하게 그렸다. 글에 나오는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공항과 호텔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주워서 연명한다. 그마저도 경쟁이 되어서 살아가자면 도둑질을 해야 한다. 고물을 훔치던 칼루는 불량배들에게 맞아 길거리에서 죽는다. 수닐은 먹지 못해 키가 크지 않는다. 미나는 부모와 오빠들에게 맞다가 자살한다. 압둘은 쓰레기를 분류해서 그나마 안정된 삶을 살지만 파티마 분신 사건에 연루되어 가정이 풍비박산 된다. 소송 과..

읽고본느낌 2014.04.16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보도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지병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두 딸과 함께 이승을 버렸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읽는기쁨 201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