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46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

시읽는기쁨 2011.12.23

장자[185]

장자는 집이 가난했다. 어느 날 장자가 감하후에게 양식을 빌리려고 갔다. 감하후가 말했다. "좋소! 내 연말에 세금을 걷으면 삼백 금을 빌려주겠소. 이제 됐습니까?" 장자는 얼굴이 벌게지며 말했다. "내가 어제 여기로 오는 길에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소. 내가 뒤돌아보니 수레바퀴 웅덩이에 붕어가 있었소. 나는 물었소. '붕어야,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붕어가 말했소. '나는 동해의 파도를 담당하는 신하라오. 그대는 물 한 바가지를 끼얹어 나를 살려주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답했소. '좋소. 내가 곧 오나라와 월나라 왕에게 유세하러 가려는데 그때 양쯔강의 물을 서쪽으로 흐르게 하여 그대를 맞이하겠소. 이제 됐습니까?' 그러자 붕어는 얼굴이 벌개지며 나에게 말했소. '나는 나의 상도를 잃고 의지할 ..

삶의나침반 2011.11.09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

시읽는기쁨 2011.10.18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버지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

시읽는기쁨 2010.04.18

사람의 손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다. 대신 15명은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다. 이 마을의 부 가운데 6명이 전체의 60%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에너지의 80%를 20명이 독점하고 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조차 없다. 지구의 자원이나 식량은.... 만약 골고루 나눠가진다면 전 지구인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3초마다 1명씩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비극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진 한 장.... 처음에는 사람의 손이 아닌 줄 알았다. 나, 어떻게 살아야 하지?

길위의단상 2009.08.06

빈자일등(貧者一燈)

석가(釋迦)께서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물고계실 때 그곳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각각 신분에 걸맞는 화려한 공양을 하였다.가난한 난타(難陀)도 부처님이 지나실 길목에다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고자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는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돈 한 푼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갔다. 한 푼어치 기름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았으나 그 여인의 말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갸륵하게 생각하여 등을 밝힐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그 기름으로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에게 바쳤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 둘 꺼져 버렸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도 모두 꺼졌다. 그러나 난타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阿難)은 이 등불에 다가..

길위의단상 2009.05.02

나의 경제 / 안도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 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

시읽는기쁨 2008.12.19

나의 가난함 /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나의 가난함 / 천상병 올 설날도 가장 자주 들었던 덕담이 "돈 많이 벌어라" "부자 되어라"는 것이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서로 하늘나라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좋아하니 참 묘한 일이다.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했던 시인 천상병,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높이 중에서 가난을..

시읽는기쁨 2008.02.10

빼기의 진보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대항발전은 20세기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삶의 이데올로기로 제시한 것이다. 경제는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확신으로 현대인들에게는 심어져 있다. 그것은 곧 발전을 뜻하고 인류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이 야기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통해서는 절대로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 발전하면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대신에 환경과 인간성 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만 낳는다. 빈곤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 번..

읽고본느낌 2007.12.22

가난해지기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다.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의미나 신념을 전달하는데 글이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길고 지리한 글은 도리어 읽는 사람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짧고 간명한 글이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 감동을 안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짧은 시의 형태로 쓰여진 피터 모린의 글은 인상적이다. 자발적 가난과 자기희생 같은 새로운 가톨릭적 가치관을 주장한 그는 안정과 물질적 자기만족을 최고로 여기는 부르조아 문화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 생각과 비전들이 '쉬운 글들'이라는 이름으로 그 특유의 짧은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잠언시로 불러도 좋을 그의 글 몇 편을 읽어본다. < 계급과 충돌 ..

참살이의꿈 2007.07.14

이 시대에서 가난의 가치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슨 살림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다시금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렸는데 그 양 또한 만만치 않았다. 현대의 도시에서의 삶은 쓰레기를 만드는 노릇에 다름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대부분이 쓰레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인데, 예전 같으면 고치고 손을 봐서 충분히 사용할 것들이 단지 쓰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다. 특히 옷 종류는 단지 유행에 뒤지고 싫증난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솔직히 버리면서도 뭔가 죄를 짓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같이 생활한 물건과의 정서적 교감 때문일..

참살이의꿈 2007.04.27

2006 노벨 평화상 - 그라민 은행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였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라민(Grameen) 은행의 창립자인 유누스(M. Yunus)의 말이다.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을 통해 ‘가난 없는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해 고민하는 나라가 있고, 한 쪽에서..

길위의단상 2006.10.16

재중이네를 보니 / 임길택

돈이 없으면 안 쓰고 옷이 없으면 기워 입고 쌀이 없으면 굶기도 하면서 할머니와 둘이서 살아가요 가난해도 어떻게든 살아가요 - 재중이네를 보니 / 임길택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사람들이 있다.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이웃을 살피며 배려할 줄 안다. 반면에 부유하지만 마음은 가난뱅이인 사람들도 있다. 있을수록 더 많이 차지하려 하면서 늘 불만과 갈증에 시달린다. 그런데 요사이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극악스럽기는 별로 다를 게 없다. 현대인들은 모두 탐욕이라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예전에는 가난했지만 사람들 마음이 이렇게 황폐화 되지는 않았다. 이 동시는 가난하지만 결코 타락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마음이 눈물겹게 읽혀진다. 남보다 앞서 가려고 정신 없이 바쁘게 살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시읽는기쁨 2006.10.14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난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

시읽는기쁨 2005.10.28

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한 삶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은 각양각색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꿈을 꾸지만 이내 현실의 벽에 부닥치면서 이상과의 괴리만 느끼며 부득이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며 만들어 갑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의 보편적 가치관이나 인간이 만든 제도, 물질의 구속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오늘 아침에는 김미순님이 쓴 ‘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한 삶’이라는 책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을 손에 잡으면 맑은 솔바..

읽고본느낌 2005.01.25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어두운 색조로 하루 일을 마치고 가난한 저녁 식탁에 앉은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삶의 신고(辛苦)가 잔뜩 묻어있는 그림이다. 고흐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농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릴려고 했으며, 그래서 겨울 내내 농민의 머리와 손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썼다. 고흐 자신은 이 그림에 굉장히 애착이 갔었는 듯 언젠가는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으로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정직한 생활일 것이다. ......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

참살이의꿈 200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