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5

조개의 깊이 / 김광규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

시읽는기쁨 2009.10.20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시읽는기쁨 2009.09.02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 뒤로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다시 떠난다. 인생이란 늘 새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나는 것. 우리는 길 위에 선 나그네들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새로운 길 위에 선다. 다시 떠나기 위해서 집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어찌 망설임이 없으랴. 안온한 항구의 품에 대한 미련이 없으랴. 안개에 덮인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과연 그 무엇이 있는 것이나 하는 ..

시읽는기쁨 2008.06.03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

시읽는기쁨 200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