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13

토지(13, 14)

4부의 시작인 이 두 권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고착화되면서 지식인들은 좌절하고 패배 감정에 젖게 되는 시기다. 처세를 위해 친일에 영합하는 부류도 많이 생겨나고, 민중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13권의 서두에서는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을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타파를 외치고 민족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 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 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 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히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

읽고본느낌 2025.02.23

토지(11, 12)

11, 12권은 3부 후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환과 봉순이의 안타까운 죽음이 나온다. 동학군의 장수였던 김개주의 숨은 아들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환의 죽음은 너무 뜻밖이고 허무하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환의 죽음은 그동안 숨어 버티던 동학 운동의 몰락이었다.  박복하고 가련한 여인인 봉순 역시 섬진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제 마음만 잘 다스렸으면 딸을 키우며 그런대로 남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련만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던 것 같다. 뭇 수컷들이 기생을 노리개로 여기며 데리고 놀다가 버렸다. 그나마 마지막에 서희가 봉순이를 챙겨주는 마음이 따스했다. 길상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서희가 하동에서 경성을 오가며 면회를 ..

읽고본느낌 2025.02.08

토지(9, 10)

9, 10권은 3부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서희가 간도에서 돌아온 뒤인 1920년대 이야기로 경성, 진주, 하동, 만주 등이 무대다. 신분 질서가 붕괴되며 양반과 상민 사이의 결혼이 나타는 시대다. 서희와 길상의 뒤를 이어 홍이와 허보연이 두 집안의 마찰을 이겨내고 결혼한다. 관수는 백정의 사위가 되어 형평운동을 주도한다. 3.1만세 뒤 민족의 미래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다양한 분파가 생겨난다. 환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이어가는 동학 후예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임정과 공산당 조직이 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모습도 자주 나온다. 이상현처럼 시대의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서의돈 같은 사회주의 그룹이 있고, 민족자본을 육성해서 일본에 대항하려는 일군도 있다. 어쨌든..

읽고본느낌 2025.01.31

토지(8)

8권은 2부의 마지막이다. 용정 생활을 마치고 10여 년 만에 서희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공 노인의 도움으로 조준구한테 빼앗긴 땅을 되찾고 귀향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인 길상은 서희와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고, 우국지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연해주에 남는다. 이 권에서 월선이 죽는다. 월선은 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다. 일편단심 한 남자를 사모하면서 갖은 고난을 겪다가 암에 걸려 죽게 된다. 대척점에 물욕으로 가득찬 임이네가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용이도 속깨나 끓였으리라. 산판 일을 마치고 열 달 만에 돌아온 용이 월선의 마지막을 지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8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읽고본느낌 2025.01.21

토지(6, 7)

6권과 7권은 하동, 용정, 경성을 무대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다. 일제에 빌붙어 약삭빠른 처신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뿌리 없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향에서 쫓겨나 연해주나 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다행이랄까 서희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돈을 모으고 용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일본과 척을 지지 않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준구에게 복수하려는 일념 때문이다. 7권 끝에는 공 노인을 통해 조준구에게 옛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은밀한 복수 작업이 시작된다. 두 권에는 의병 및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펼쳐진다. 주로 옛 동학교도들이 모여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중심인물은 환, ..

읽고본느낌 2025.01.12

토지(3, 4, 5)

4권에서 1부가 끝나고, 5권부터는 2부가 시작된다. 1부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일강제병합이 되는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최참판댁은 몰락하고 마을 사람들과 간도로 이주하면서 1부는 끝난다.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은 조준구에 의해 서희는 집과 땅을 빼앗긴다. 젊은이들은 의병이 되어 마을을 떠나고 전염병과 흉작으로 평사리는 쑥대밭이 된다. 를 통해 1900년대 초의 나라 상황과 민초들의 삶을 그림으로 보듯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서희가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잠재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서희의 성격 묘사 중에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하다'는 표현이 이색적이었다. 2부는 2011년의 용정 마을 대화재로 시작한다. 불은 시가의..

읽고본느낌 2025.01.04

토지(2)

올 겨울에는 박경리 작가의 를 읽으려 한다.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한 5부작, 20권으로 된 대하소설이다. 처음 나왔을 때 1부까지 읽고 나머지는 뒤로 미루어뒀는데 이제야 완결 지으려고 한다. 지난달 통영에 있는 박경리기념관에 갔을 때 한 결심이다. 전집을 사서 읽을까, 도서관에서 빌려 볼까, 고민했는데 후자를 택했다. 도서관에는 다산책방에서 나온 20권 전집이 있다. 그런데 서가에 1권만 빈 채로 있어서 2권부터 시작한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한 번 읽은 적이 있으니 큰 지장은 없을 듯하다. 그렇지만 눈에 익은 등장인물은 최치수, 서희, 길상 정도다. 40년도 더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2권에서는 최치수의 죽음과 함께 최참판 댁의 몰락이 시작된다. 1890년대 후..

읽고본느낌 2024.12.12

삶 / 박경리

대개소쩍새는 밤에 울고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풀 뽑는 언덕에노오란 고들빼기꽃파고드는 벌 한 마리애닯게 우는 소쩍새야한가롭게 우는 뻐꾸기모두 한 목숨인 것을미친 듯 꿀 찾는 벌아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모두 한 목숨인 것을달 지고 해 뜨고비 오고 바람 불고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슬픔도 기쁨도왜 이리 찬란한가 - 삶 / 박경리  통영 미륵산 자락에 있는 박경리기념관 뜰에 이 시가 적힌 시비가 있었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쓴 시들에서는 소설에서 읽지 못하는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만난다. 작가에게 다가가는 데는 소설보다 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한 인생이 농축되어 있는 작가의 시에는 고운 영혼의 향기가 풍긴다. 그 향기는 내 마음으로도 스며들어 따스하게 위무해 준다. 작가의 시는 쉽다. ..

시읽는기쁨 2024.11.18

바느질 /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 바느질 / 박경리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한 게 군대에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군대 생활을 하자면 실과 바늘이 필수였다. 그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바늘귀에 실을 꿰 드리는 게 내 담당이었다. 지금은 아내한테서도 바느질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꿰매야 할 정도로 해진 옷을 입지도 않거니와, 어지간하면 세탁소에 맡기기 때문이다. 어쩌다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하는 아내 모..

시읽는기쁨 2020.05.05

일본산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고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우리 정부도 맞대응하며 일본과 맺은 지소미아를 폐기했다. 처음 우려한 것과는 달리 우리 산업계에 미치는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부품 국산화 등 탈일본으로 가는 계기가 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지금은 양국 모두 숨 고르기를 하는 것 같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NO JAPAN' 캠페인이다. 일본 제품 불매와 일본 여행 안 하기 운동이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과거 같으면 불이 붙었다가 금방 사그라지는데 이번은 달랐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들의 혐한 소동도 반일 감정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읽고본느낌 2019.10.18

성지(1) - 용소막성당, 후리사공소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 성지를 모두 순례해 보자고 아내와 다짐한지 어느덧 7년이 지났다. 퇴직할 무렵이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아내는 열심인 신자이지만, 나는 그동안 냉담으로 변했다. 이번 순례에는 종교적 의미 외에 부부가 국내를 함께 여행한다는 데에도 방점이 있다. 전국을 돌면서 큰 나무를 보고, 지역 명소를 찾아보고, 맛있는 음식도 맛보려 한다.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는 400여 곳이 된다. 가까운 곳은 당일로 다녀오지만, 먼 곳은 1박이나 2박의 여정이 될 것이다. 3년 정도면 일주를 하지 않을까 싶다. 무겁지 않게 경쾌한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딘다. 1. 용소막 성당 1904년에 세워진 교회로 강원도에서는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피..

사진속일상 2017.08.23

여행 / 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여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

시읽는기쁨 2016.08.29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

시읽는기쁨 2008.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