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22

외출 / 허향숙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근처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 외출 / 허향숙 요사이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 소설과 이 시의 분위기가 닮은 데가 많다. 인생에서 상심(傷心)은 늘 함께 하는 것이 ..

시읽는기쁨 2022.04.10

민망하다

얼마 전에 뒷산길을 걸을 때였다. 굽은 길을 돌아나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길 옆에서 한 여자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보고 있었다. 거리는 5m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뒤로 비스듬히 돌아앉은 여자는 외간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황당 시추에이션을 어떡 하지? 나는 알아채지 못하게 돌아서서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도망쳤다. 다행히 서너 걸음만 걸으면 보이지 않게 길은 굽어 있었다. 그리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인기척이라도 내서 여자가 알아챘더라면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내가 민망한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방심은 가끔 이렇게 황당한 일을 생기게 한다. 사전에 여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을 테지만 때로 투명인간이 있음을 잊은 것 같다. 4..

길위의단상 2021.07.13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여자, 오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여자, 지난밤도 편치 않았던 것일까, 아파트 모서리 중국단풍 아래에서 연방 담배를 피워대는 여자, 채 달아나지 못한 연기 꼬리에 또 연기를 더하는 여자,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듯 연방 연기를 토해내는 여자, 처음 볼 때는 거북했으나 날이 지나면서 연민으로 다가오는 여자, 어쩌다 보이지 않는 날이면, 웬일일까, 조금 걱정도 되는 여자, 걱정과 함께 담배 연기가 그 여자의 거친 날들을 모두 거두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치 오래된 관성처럼, 이제는 중국단풍만 봐도 떠오르는 그 여자 -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태도에서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난다. 당당한 남자에 비해 여자는 조심..

시읽는기쁨 2019.04.21

논어[330]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무래도 계집애와 심부름꾼은 취급하기가 곤란해. 가까이하면 멋대로 하고, 멀리 하면 투덜거리거든."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 陽貨 23 공자 역시 가부장적 봉건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 이런 발언을 하면 공동체에서 뭇매를 맞으리라. 지금의 잣대가 아닌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기준으로 봐야 할 발언이다. 허나, 아껴주면 기어오르는 게 여자(女子)와 소인(小人)만이겠는가. '불가근 불가근(不可近 不可遠)'의 원칙은 모든 인간, 모든 타자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삶의나침반 2019.02.22

광양 여자 / 이대흠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터로 있는 게 즐거워서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찬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

시읽는기쁨 2019.01.19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

시읽는기쁨 2017.09.09

인생을 향유하는 능력

분당을 지나는 탄천 산책로를 저녁나절에 걸을 때가 있다. 도시를 관통하는 위치 탓인지 늘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다. 넓은 공터에서는 함께 모여 에어로빅을 하는 팀도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힘찬 기합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그 소리만 들어도 절로 기운이 솟는다. 가까이 가서 보면 대부분이 아줌마들이다. 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남자는 가뭄에 콩나물 나듯 서넛 정도 끼어 있을 뿐이다. 마음은 있어도 쑥스러워서 들어서지 못할 것 같다. 반면에 여자들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리듬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흘린다. 무척 적극적이다. 누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남녀 성의 구분이 뚜렷이 나타난다. 노년이 되면 여자들이 훨씬 더 활동적이면서 다양한 관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대신에 남자들은 퇴직하고 나서 움츠러든다..

참살이의꿈 2017.08.20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둘.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주..

시읽는기쁨 2017.08.12

화장 안 하는 여자

두 달 전에 대만에서는 야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었다. 대만에서는 첫 여성 총통이어서 화제를 모았다.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 출신으로 1956년에 태어나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교수를 하다가 정치에 입문했다. 민진당 주석에 올라 이번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고 집권했다. 차이잉원의 당선에는 진보적 성향과 함께 그녀의 개인적 매력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것은 차이잉원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소개였다. 사진을 보니 꾸밈없는 수수한 얼굴 그대로였다. 얼굴에서는 그녀의 강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화장 안 하는 여자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여자가 아름답게 보이려는 걸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남자도 강하고 씩씩하게 보이려 어지간히 애쓴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

길위의단상 2016.03.08

여자의 탄생

지난달에 을 읽은 뒤 짝 맞추기로 찾아 읽은 책이다. 여성학자인 나임윤경 선생이 썼다. 두 책 모두 '사회 구성주의'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로 길러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은이의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회 구성주의란 인간이 그들의 신념과 이전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과 현상에 대한 의미를 구성 혹은 만들어간다는 이론적 시각이다. 이를 남자와 여자에 적용하면,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자궁 등 생물학적인 측면을 제외한 특징들은 모두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같은 일정 상황에 있는 남성과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남성은 남성성을, 여성은 여성성을 가지도록 키워진 것이지 선천적으로 고정된 특징은 아니라는 말이다. 타고난 능력이냐, 길러진 능력이냐는 아직도..

읽고본느낌 2015.12.17

유방 /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시읽는기쁨 2013.09.04

여인의 노래 / 이옥

一結靑絲髮 相期到蔥根 無羞猶自羞 三月不共言 검은 머리 한데 맞대고 하나로 맺어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고 했지요 부끄럽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부끄러워져 낭군에게 석 달 동안 말도 못했지요 四更起梳頭 五更候公모 誓將歸家後 不食眠日午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5경에 어른들께 문안드렸다 맹세하노니, 친정에 돌아간 뒤 먹지도 않고 대낮까지 늦잠 자리라 桃花猶是賤 梨花太如霜 停勻脂與粉 농作杏花粧 복사꽃은 너무 천박하고 배꽃은 너무 쌀쌀맞네 연지분 화장을 잠시 멈추고 살구씨 화장을 하네 歡言自酒家 농言自倡家 如何汗衫上 연脂染作花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고 말하지만 기생집에서 온 줄 전 알아요 어째서 속적삼 위에 연지가 꽃처럼 물들었나요 亂提羹與飯 照我面門擲 自是郎變味 妾手豈異昔 국그릇 밥그릇 마구 집어 내 얼굴을 겨냥..

시읽는기쁨 2013.04.23

여자의 힘

여자의 힘은 자식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아내를 보니 그렇다. 딸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내는 생기를 회복한다. 우선 목소리 색깔이 달라지면서 먹을 걸 챙기는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참 신기한 현상이다. 수컷은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한다. 나는 그런 아내에 감탄하며 질투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우선순위에서 남편이 뒤로 밀려난 건 이미 오래 되었다. 아내는 말한다. “이젠 자식들 잘 되는 것밖에 바랄 게 없어.” 자식만 잘 살아준다면 어떤 험한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여성의 본능은 남성과는 다르다. 자신의 목숨조차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모성은 위대하다. 그것은 여자이기보다는 어머니로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길위의단상 2010.09.07

이별 / 정진규

그 여자와 작별하면서 나는 그 여자에게 이제 어머니로 돌아가라고 말한 바 있다 너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그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이별 / 정진규 며칠 전 초등학교 동기들의 송년회가있었다. 송년회라고 세 명의 여자 동기들도 함께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추억으로 인하여 서먹했던 자리는 금방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나, 오늘 늦어도 돼. 남편한테 허락 받았다구." 단발머리 소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고, 어느새 손자를 보는 나이까지 되었다.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를 가릴 수 없듯,..

시읽는기쁨 2009.12.09

여자에 대하여

'아미엘의 일기'를 읽고 있다. 평생을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명상을 한 고독한 철학자 아미엘, 그도 사회적 통념에 따른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여자에 대한 관점이다. 아미엘이 살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은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여자를 동등한 인격체라기보다는 남자에 종속된 존재, 또는 정신적 미숙아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시대의 고정관념과 내적 싸움을 한아미엘의 여성관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볼 때 아마 성장 과정에서의어떤경험이 관계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미엘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일기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자는 수수께끼다. 여자는 멀리 도망치기를 좋아하며,..

읽고본느낌 2009.06.06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더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지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

시읽는기쁨 2008.10.23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그저께가 오규원 시인의 1주기였는데, 지인들과 제자들이 모여서 추모식을 가졌다는 보도를 접했다. 어느 분이 추모사에서 시인을 가리켜 '누구..

시읽는기쁨 2008.02.04

신문 읽는 여자

신문을 진지하게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게 보인다. 남자가 신문을 보는 것은 눈에 띄는 일이 아닌데, 여자의 경우는 왜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것은 여성이 원래 정치나 사회적인 현상에 남성보다 관심이 덜 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스스로 남편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 하며, 그것이 예의인 줄 알고 있지나 않나 하고 말이다. 아직도 많은 여자들이 가정에서 남편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 한다. 몇몇 여자들과 세상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남편의 생각을 대신 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이제까지의 가부장적 구조가 무의식적으로 여성을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서기 보다는 부권[父權, 夫權]에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길위의단상 2008.01.02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자락의 상쾌! -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여자가 되어보고 싶다. 바람 부는 날, 스커트 입고 벌판에 서보고 싶다. 스커트자락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를 때 여자만이 느낄 상쾌함을 맛보고 싶다. '상쾌'란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 말 속에는 남자는 죽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여자만의 비밀이 숨어있을 것 같다. 여자들의 감성, 여자들이 느끼는 사랑, 여자들에게만 주어진 축복들, 그 내밀한 속마음을 나도 한 번 나의 것으로 느껴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07.11.30

불혹의 여자 / 정숙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나날 내색할 수도 없었지만 이미 굵어져 버린 삶의 이력만큼이나 숨길 수 없이 몰려나오던, 그 쓸쓸함이 전신을 휘감아 오르고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마음의 공황 참, 이상도 하지 마른 꽃잎 같다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왜 그렇게 아기를 품고 싶어지던지 다시 한번 누군가의 절절한 사랑이 되어도 보고 몸살나게 탐스런 젖꼭지를 지닌 꼭 그만큼의 나이 홍옥 같은 여자로 돌아가고 싶던지 가을, 열매의 단맛이 더욱 깊어지려면 여름의 강한 태풍을 홀로 이겨야 하듯 나이 마흔의 여자도 그런 거더군 삶에 대한 성찰의 깊고 얕음에 비할 바 없이 기뻐 맞을 수도, 미처 피할 수도 없는 지나고 나서야 고개 주억거리며 더욱 선명히 각인되는 여자의 성 - 불혹의 여..

시읽는기쁨 2007.07.07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옆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시읽는기쁨 200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