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1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그것도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바람 속에는 연꽃 향기 시들고 섭섭한 마음도 색이 바랜 뒤일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바람은 돌고 돌아 다시 연꽃밭을 지나갈지 모른다. 전생에서 수없는 만남이 있었음을 바람은 눈치채지 못하리라. 향기를 머금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바람은 조금은 섭섭해..

시읽는기쁨 2022.05.23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오는' 소리만 알았지, '가는' 소리를 의식하지는 못했다. 오는 게 있으면, 응당 가는 것도 따른다. 삼라만상의 변화가 그러하다. 누구나 이 세상에 던져지듯 왔다가 불현듯 사라져 간다..

시읽는기쁨 2019.02.16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도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추억의 ..

시읽는기쁨 2012.04.03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 최영미 시인은 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선운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4월쯤 되었을까, 뚝뚝 떨어진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가어느 날 떠나갔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서운하고 아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대가 어찌 꽃이 지듯 쉽게 잊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 왜 그런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소월의..

시읽는기쁨 2012.03.07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 이형기 '이제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고 허전한 마음 역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싸웠던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도 많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되고 자책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오..

시읽는기쁨 2011.02.11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매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다 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가을이어선지 이 시가 더 애절하다. 온 몸으로 시대에 저항했던 시인은 서른아홉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젊었을 때 생긴 간디스토마에서 끝내 회..

시읽는기쁨 2010.10.21

이별 / 정진규

그 여자와 작별하면서 나는 그 여자에게 이제 어머니로 돌아가라고 말한 바 있다 너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그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이별 / 정진규 며칠 전 초등학교 동기들의 송년회가있었다. 송년회라고 세 명의 여자 동기들도 함께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추억으로 인하여 서먹했던 자리는 금방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나, 오늘 늦어도 돼. 남편한테 허락 받았다구." 단발머리 소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고, 어느새 손자를 보는 나이까지 되었다.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를 가릴 수 없듯,..

시읽는기쁨 2009.12.09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

시읽는기쁨 2008.10.30

길을 잃어야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고통이며 아픔이다. 그러나, 길을 잃지 않으면 낯선 풍경을 만나지 못한다.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내꿈이었고 내 모든 것이었던 너! 나는 이제 너에게 미련없이 안녕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길 위의, 낯 설고 새로운 풍경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참살이의꿈 2006.12.03

익숙한 것과의 결별

IMF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이나 파산을 당했다. 한 순간에 찾아온 낯선 환경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 익숙한 것에서 떠난다는 것은 가슴 쓰라린 일이지만 그런 결별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가 씌어질 수 없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에게 있어 어느 순간 불가항력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에게 있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도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말로 쓰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만약 내가 사회학자라면 조사, 연구해 보고 싶은 바램도 있다. 그런 외적인 충격이 한 개인..

참살이의꿈 2004.11.30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