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13

그럭저럭과 그러려니

'그럭저럭'과 '그러려니'는 늙어가면서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말이다. 가끔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서로 묻는다. 이때 내 대답은 일정하다. "그럭저럭 지내지 뭐." 늙어서의 일상이란 게 그렇다. 잘 지낸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지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그럭저럭'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반면에 '그러려니'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늙으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을 안팎으로 자주 만난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성에 차지 않고, 몸도 이곳저곳이 고장 난다.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니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여러 달째 손가락과 이빨이 말썽이다. 어느 때부터 양 손의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기 시작했다. 아..

참살이의꿈 2023.11.24

되어가는대로 살기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고,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가까워지지 못한다. 이만큼이나마 세상을 살아보니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더라. 세상일은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헛심만 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순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되어가는대로 살기'다. 되어가는대로 살기는 되는대로 살기와는 다르다. 되는대로 사는 것은 제멋대로 사는 것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자기 통제와 규율이 있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에는 목표가 필요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실행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열매를 맺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일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진인사..

참살이의꿈 2022.12.22

이젠 칠십인 걸

언제부턴가 집안에 파리랑 벌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날벌레도 들어왔다. 파리채를 열심히 휘두르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텃밭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베란다의 방충망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헐~, 그동안 한여름에 방충망 없이 산 것이었다. 둘 중 누군가가 방충망을 열고 난 뒤 닫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더듬어봐도 방충망을 연 기억이 안 났다. 나는 아니라고 서로 부정하면서 상대를 의심하는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론은 늘 같았다. "우리 나이가 얼마지?" "이젠 칠십인 걸!" 나이 70이 넘고 보니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심리적으로도 노인이라는 사실에 위축이 된다. 공식적인 노인의 기준은 65세지만 장수시대라서인지 그 나이에 노인은..

길위의단상 2022.07.06

나의 사적인 그림

사람한테는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있다. 공적인 생활은 드러나지만 사적인 생활은 숨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적인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할 뿐이다. 우지현 작가의 은 작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책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글과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글이 중심이지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설명은 많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글과 연관된 그림을 보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작가가 소개하는 그림은 사탕처럼 달콤하고 봄 햇살처럼 화사하다. 이 책에서도 새로운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데 우리말로 하면 '황홀한 죄책감' 쯤 되겠다.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움을 주는 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

읽고본느낌 2022.05.24

그러려니

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이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 사전을 찾아보니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 그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덧'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상태를 그럭저럭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그럭저럭'보다 좀 더 진화한 말이 '그러려니'가 아닐까 싶다. '그러려니'에는 세상살이를 흘러가는 대로 관조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그럭저럭'보다 내 의지가 더 탈색된 느낌으로, 체념에 가까운 태도다. [체념(諦念)은 '살필 체(諦)'에 '생각할 념(念)'으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본뜻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일흔이 되니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21.12.21

마음대로 안 된다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길위의단상 2020.10.16

이럴 수도 있지

낯선 외국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가진 재산 다 털어먹고 빚까지 졌어. 희망이 없었어. 가족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뒷정리를 했어. 살아갈 일이 막막하더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스페인 북부로 정처 없이 떠났어. 사람이 적고 쓸쓸한 풍경을 택한 거지. 며칠 동안 바닷가를 배회하니 가진 돈도 다 떨어졌어. 절벽 위에도 서 봤지만 도저히 뛰어내릴 용기는 없더군.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바닷가에 있는 허름한 집 대문을 노크했어. 노부부 두 분이 사는데 따뜻이 맞아주더군. 내 행색이 그랬나 봐.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그 집에서 한 달을 함께 지냈어. 그분들도 자식처럼 대해줬어. 저녁을 먹고 나면 두 분은 소파에서 손을 맞잡고 TV를 보는 거야. 작은 화면에 금방 고장이라도..

참살이의꿈 2019.07.15

무덤덤에 대하여

노인이 된다는 건 감정이 무뎌지는 일이다. 희로애락의 진폭이 점점 줄어든다. 젊은 시절의 가슴 설렘은 멀리 사라져 간다. 크게 웃을 일도 뜸해진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감정의 요동이 적으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게 가능해진다. 웃을 일이 적다지만, 애통할 일도 줄어든다. 잃으면 얻는 게 있다. 청춘에는 약동하는 젊음이 있지만, 온갖 번뇌와 열정에 시달려야 한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가만두지 않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반면에 노년은 따스한 온기를 품은 화로와 같다. 사람들은 화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얘기를 속삭이듯 나눈다. 고된 노동 뒤 안식의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이 좋다. 무..

참살이의꿈 2018.12.31

노인과 바다

젊었을 때 읽었던 느낌은 어슴푸레하다. 고기와의 사투 장면만 남아 있는 걸 보니 그 부분이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체념이랄까, 자연과 인생을 대하는 노인의 마음이 각별히 다가온다. 산티아고 노인에게 자연은 정복 대상이 아니라 친구며 형제다. 삶의 터전인 바다도 여성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다. 며칠 동안 청새치와 밀고 당기는 싸움을 벌이지만 바탕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 깔려 있다. 배로 찾아온 휘파람새나 거북을 대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바다는 사납고 거칠지만 삶을 대하는 마음은 따스하다. 고기를 잡으러 홀로 바다로 나간 노인은 고독하다. 고독을 벗 삼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큰 청새치를 잡았지만 귀항 도중에 상어의 습격으로 뼈만 남긴 채 빈손으로..

읽고본느낌 2018.02.06

아무래도 괜찮아

늙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라고 젊었을 때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보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늙으면 늙은 대로 맛이 있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알아챌 수 없다. 인간은 적응력이 무척 뛰어난 동물이다. 몸이 아파도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나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떨어지고 다리 힘이 없어지면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한다. 어디든 쏘다닐 수 있는 젊은이로서는 불쌍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면 다니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니 멀리 못 나가도 아무렇지 않다. 동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 대신에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 좋게 말하면 관조의 편안함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청춘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별로 내세울 게 아니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

참살이의꿈 2016.03.31

되는 대로 살거라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너희는 별일 없냐?"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온다. 요즘은 그 뒤에 꼬리가 하나 더 붙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되는 대로 살아라.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다." 어머니는 되는 대로 살라고 하실 분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분이시다. 또 이런 말도 하신다. "살아보니 돈도 다 필요 없더라. 건강만 하면 아무것도 문제 안 된다." 되는 대로 산다는 게 인생에 대해 무책임한 것 같지만 어머니 삶의 지혜에서 나온 충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들려고 하는 데서 갈등과 다툼이 생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대로 받아들이고, 되는 건 되는 대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일이 ..

길위의단상 2014.06.04

일주일째

일주일째 문밖을 못 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누워 있길 좋아하는 친구라 같이 지내자니 하루의 2/3는 나도 따라 누워서 빈둥거린다. 그래도 마음 하나만은 편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결근 신청을 하는 데도 괜히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를 가지고 억지로라도 출근했을 것이다. 누워 있어도 베란다 창을 통해 바깥 경치는 다 보인다. 봄 햇살이 따스해 보이는데 직접 쬐지는 못한다. 씩씩한 걸음으로 뒷산을 향하는 사람들을 본다. 아쉬운 점은 이번 주에 산청 삼매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이미 그쪽 매화는 졌다는 소식이다. 내년으로 자동 연기되었다. 또, 한식에 선친 산소를 찾아가는 것도 미뤄지게 됐다. 청계산과 천마산의 봄꽃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새로운 구경거리..

길위의단상 2013.04.06

자신의 현실을 껴안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은 아직 허공에 떠있다. 허전하고, 고맙고, 부끄럽다. 큰일을 치른 후유증인지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이 오래 이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인가 보다. 세상살이가 어찌 내 입맛대로 될 것인가. 체념도 인생을 사는 지혜 중 하나다. 행사를 치르며 이런저런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신달자 시인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오늘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의 현실을 껴안는 것이 행복이다.”

참살이의꿈 201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