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185

낯선 모교

고향에 내려간 길에 모교에 들렀다. 헤아려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덧 52년이 흘렀다. 가늠하기 힘든 까마득한 세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어제 일 같기도 하다. 나이 들고 옛 자리를 찾아보는 일은 어디든 착잡하기만 하다. 옛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나무로 된 검은색 옛 교사는 진즉에 사라졌다. 운동장 귀퉁이에 서 있던 큰 느티나무도 운동장이 확장되며 오래전에 베어졌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현재와 연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교인데 너무 낯설다. 대신 학교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모던해졌다. 시설 투자가 많이 되는 것 같다. 작년에는 강당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전체 학생수는 66명이다. 한 학년에 겨우 한 학급씩 유지되고 있다. 그것도 면내에 있었던 세 학교가..

사진속일상 2016.07.15

아련한 양지꽃

야생화에 관심을 가진지 올해로 20년 째다. 1996년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해다. 눈을 감으면 처음 꽃을 만나던 감격이 아련히 떠오른다. 모든 게 신기하고 감동이었다. 야외로 나가는 내 손에는 김태정 선생이 쓴 이라는 도감이 들려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야생화 교과서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 권으로 된 그 책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도감에 보니 '양지꽃' 페이지에 '1996. 4. 7.'이라고 적혀 있다. 처음 양지꽃을 본 날이다. 그날의 상황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다.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에 올랐다. 아내도 동행했다. 성벽 아래서 쉬고 있는데 바로 옆에 노란 꽃이 보였다. 도감을 찾아보니 양지꽃이었다. 아, 이게 양지꽃이구나, 사진으로 보던 것을 실물로 확인할 때만큼..

꽃들의향기 2016.05.23

나를 위한 글쓰기

고등학교 1학년 때 소설이랍시고 끄적거린 적이 있다. 글을 쓴 계기는 사랑의 열병 때문이었다. 서울로 유학 온 열여섯 살 시골 촌놈이 사춘기를 맞았는데 묘하게 같은 반 남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멋있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니셜로는 JY다. J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은 동성애의 시기를 지나 이성에게로 향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동성에 대한 밀도가 너무 짙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J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며 애만 태웠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더더욱 드러내지 못할 일이었다. J 역시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짝사랑이 1년 내내 계속되었다. ..

길위의단상 2016.05.20

말 없는 아이

지인 중에 닉네임이 '머거주기'인 분이 있다. 처음에는 먹성이 좋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어렸을 때 말을 받아먹기만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말 없는 아이였다는 뜻이다. 말 없기로 치면 나도 그분 못지않았다. 어머니가 혀를 차며 자주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여섯 살 때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5일마다 열리는 장에 따라가는 게 제일 즐거운 날이었다. 신나는 볼거리도 많았을뿐더러, 군것질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탕 몇 알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었다. 집에서 장터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날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할머니는 곡식을 팔고는 호미를 비롯해 몇 가지 물건을 샀을 것이다.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길위의단상 2016.05.03

봄 펜팔 /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

시읽는기쁨 2016.04.24

한 장의 사진(22)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월로 수학여행을 갔다. 1964년도였다.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바꿔타고는 영월에서 내렸다. 산골 촌놈들이라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차 안에서는 의자 쿠션이 신기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좋아라 했다. 첫날은 화력발전소를 견학하고 허름한 여관에 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인숙 수준도 안 되는 집이었다. 저녁을 먹고는 오락 시간에 단체 춤판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천정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 빼내느라 고생했다. 몇 명이 따라 나와서 도와주었다. 안에서는 유행가가 이어지는데 뒤뜰에서 쳐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 아름다워 눈 아픈 핑계 대며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둘째 날에는 장릉과 단종 유적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사진은 ..

길위의단상 2016.04.22

의암호에서

사람과의 친밀감은 공유하는 추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무리 폭이 넓다 한들 세월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년과 십대 시절을 함께 말할 수 있는 사이라면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온기로 따스해지게 된다. 누추한 현실을 버티는 힘의 상당 부분이 추억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기억은 무척 주관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같은 시공간의 경험이라도 같지는 않다. 수면 위로 떠오른 파편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선만 그려진 도화지에 제 나름대로 채색을 해 놓은 게 기억인지 모른다. 저장된 게 아니라 만들고 가공한 것이다. 그렇게 공유하는 추억으로 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도 너는 가까이 있다. 의암호를 바라보는 춘천의 한 카페를 찾았다. 아메리카노 대신 카페라테를 주문하길 잘했다. ..

사진속일상 2016.03.06

토성 느티나무

할머니와 엄마 뒤를 따라갔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하얀 행렬이 마을을 나섰다. 기찻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고, 사과 과수원 사잇길을 한참 걸으면 장터가 나왔다. 사람 북적이고, 온갖 물건과 구경거리가 있는 장날이 아이들은 좋았다. 지나는 길에 토성 마을이 있었다. 느티나무도 한 그루 있었을 것이다. 오고 갈 때 잠시 발쉼을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50여 년 전 풍경을 잠시 회상해 본다. 공작이 나래를 편 듯한 느티나무가 그 자리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6.02.15

어떤 인연

대학 시절에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공부나 노는 방식도 비슷했다. 전공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점도 닮아서 같이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자연히 둘이서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시기도 비슷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타과 여학생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속으로 애만 태웠던 나에 비해 친구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여학생이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에 가입해서 안면을 익히며 접근했다. 그러나 진도는 상당히 느렸다. 친구는 진행 상황을 수시로 나에게 들려주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친구의 속앓이도 점점 깊어졌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한 나는 도움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소연을 들어주고 술을 ..

길위의단상 2015.10.20

세월의 쓸모

학교 동기를 만나면 의레 옛날이야기가 나온다. 공유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진해진다. 동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50년대와 60년대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같은 추억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각자가 경험한 공간은 다르지만 시기의 겹침이 정서적 유대감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추억은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준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세월의 쓸모'도 아마 그런 뜻이리라. 지은이인 신동호 시인은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소는 달라도 시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낡은 것,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살아난다. 시인의 말처럼 과거를 추억하다 보면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불..

읽고본느낌 2015.09.22

한 장의 사진(21)

중학생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열다섯 해를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부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만났을 뿐,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철없던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고마움을 몰랐다. 오히려 투정을 많이 부렸다. 내가 그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손주를 돌보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를 안다. 나만이 아니라 동생 넷도 전부 객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컸다.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백수를 하셨으니 장수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백 세를 넘기신 분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서 모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 드..

길위의단상 2015.09.06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었다. 초가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고, 한쪽에는 모깃불 연기가 매캐한 가운데 멍석 위에 상이 차려졌다. 처마에 남포등이 흔들거렸지만 달빛이 오히려 환했다. 둥근 상 둘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드문드문 말소리,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수저를 놓고 멍석에 누우면 이만큼 뜬 달이 가득 들어왔다. 외양간의 소도 고단한 몸을 쉬며 고개를 딸랑거렸다. 지금은 마당 없는..

시읽는기쁨 2015.07.09

인생의 주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렴에 걸렸다. 고열에 기침이 계속 이어졌다. 위의 형을 잃은 뒤라 가족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낫지 않자 어머니는 병원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어 치료에 매달렸다.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작은 읍이었다. 병실이 없으니 매일 병원으로 왕래해야 했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도시로 나갈 형편도 못 되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 사는 친척이 소식을 듣고 페니실린을 구해서 내려왔다. 결과적으로 페니실린은 내 목숨을 살린 기적의 약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페니실린 주사를 맞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고 열이 내렸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이 나에게도 구세주가 된 셈이다. 무슨 ..

참살이의꿈 2015.05.24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아배 생각 / 안상학 통지표를 들고 아버지 계신 사무실로 달려갔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 뒤편 독립된 방에 아버지..

시읽는기쁨 2015.03.20

몸성희 잘 있거라 / 권석창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 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몸성희 잘 있거라 / 권석창 70년대 중반쯤이었다. 군대 휴가를 나와서 옆 마을 친구한테 놀러 갔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소개를 받고 보니 시를 쓴다는 청년이었다. ..

시읽는기쁨 2015.01.11

기정 형

고향 마을에 기정 형이 살고 있다. 나보다 6살이 위다.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다. 형은 어릴 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13살이 되어서야 겨우 국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7살이었던 나와 같은 1학년이 된 것이다. 당시는 이런저런 이유로 적령기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다. 형과는 워낙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같은 학년이었지만 함께 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다. 형 친구들은 5, 6학년 아이들이었다. 형의 부친은 한학을 하신 분이라 형은 이미 집에서 한글과 한문을 깨친 상태였다. 1학년 수업 내용은 들으나마나였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다녔다고 해야겠다. 공부보다는 빨리 집에 가 일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학업도 워낙 앞서가니 1학년을 마치면서 담임선생님이 바로 3학년으로 진급하..

길위의단상 2015.01.10

한 장의 사진(19)

1974년에 초등학교에서 한 주, 고등학교에서 세 주동안 교생 실습을 했다. 우리는 다른 대학과 달리 초등학교 실습도 나간 게 특이했다. 실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초등학교 아이들과 같이 지낸 것이었다. 고작 엿새만 있었는데도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굳이 초등학교 경험을 시킨 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인지 느껴보라는 의미 같았다. 사대생 전부가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부속학교로만 실습을 나갔으니 한 학급에 열대여섯 명씩 배정되었다. 그러니 교생 실습이라기보다는 교육 현장 참관이라는 말이 옳았다. 실제 수업도 몇 번 하지 않았다. 담임을 대신하는 조종례도 돌아가며 하다 보니 고작 한두 번이었다. 얼렁뚱땅 보내도 아무 지장 없었다. 솔직히 교생 실습이라기보다는 놀러 다닌 기분이었다. 실습을 하..

길위의단상 2014.10.16

제비

제비는 참 특이한 새다. 대부분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도망가는데 제비는 사람 집을 찾아와서 둥지를 짓는다. 사람과 한가족이나 다름 없다. 사람이 지은 농작물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해충을 잡아먹으니 여러 모로 이로운 새라 할 수 있다. 날렵한 생김새며 지지배배 소리도 호감이 간다. 아마 지저귀는 소리에서 제비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제비만큼 사람과 가까운 새도 없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봄에서 여름까지는 항상 제비와 함께 살았다. 추녀에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그 밑에다 널빤지를 달아주었다. 제비 똥이나 불순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문 바로 위에 제비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널빤지는 제비 새끼가 아래로 떨어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서로 말은 못해도 제비는..

사진속일상 2014.07.26

딱 / 최재경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밥을 복 나가게 먹는다고 수저로 대갈빡을 때렸다 말로 해도 될 것을 쳐다보았더니, 대든다고 또 때렸다 "딱" 어지간히 익은 소리가 났다 엄마도 모르게 은수저를 내다버렸다 다음날도, 지금까지도 아무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열대여섯쯤 되던 해였다 지금도, 그 자리를 만져보면 대갈빡에서 "딱" 소리가 난다 복이 나갔는지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 딱 / 최재경 맛있게 밥을 먹는 자식 쳐다보는 것만큼 큰 기쁨도 없다. 부모의 마음이다. 나 역시 자식 키울 때 그랬다. 자주 야단친 게 아이들의 식사 태도였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며 밥을 먹는다든지, 꼭 한 숟가락을 남기는 버릇 등, 속이 상한 게 많았다. 어느 날은 이 시에 나오는 아버지가 되었다. 가끔 아내가 그때의 사건을 상기시켜 준..

시읽는기쁨 2014.05.25

천장에 쥐가 산다

어린 시절 시골 초가집에 살 때 부모님은 천장에 사는 쥐와 자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쥐들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운동회를 하는지 천둥소리가 나기도 했다. 정 참다 안 되면 아버지는 "이누무 쥐새끼들!" 하며 빗자루 끝으로 애꿎은 천장만 때렸다. 그런다고 쥐가 사람 마음을 헤아려줄 리는 없으니 결국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쥐약을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기르기도 했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안 되었다. 쥐약을 먹고 쥐가 죽으면 천장에서 썩는 게 아닌가, 그것이 어린 마음에 걸렸다.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보다 사실 그게 더 두려웠다. 어머니한테 물으니 쥐가 쥐약을 먹으면 목이 말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초가집에서 살았던 시절에..

길위의단상 2014.05.22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 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O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 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 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혀 그 점수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 백발 성성한 지금도 이 세상에는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걸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 화학 선생님 / 정양 큰 비극 가운데서도 중고등학교는 지금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 시를 보니 중학생이었을 때 농..

시읽는기쁨 2014.04.25

한 장의 사진(18)

인생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은 유년이 아닐까 싶다. 유년은 가족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때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남은 몇 개의 기억이 따스했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삭막한 인생살이에 지친 몸이 쉬어가는 오아시스가 바로 유년의 기억이다.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이었는데 시골 동네에는 잔치가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도 고모 등에 업혀서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시끌벅적했다. 그런..

길위의단상 2014.03.10

임진각

북쪽으로 드라이브 간 길에 임진각에 들렀다. 70년대에 부모님을 모시고 온 적이 있었으니 거의 40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었다. 그때는 버스를 타고 통일로를 따라 여기까지 왔었다. 내가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즈음이었을 것이다. 월급을 모아 산 카메라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부모님 사진을 여러 장 찍어드렸다. 그런데 나중에 현상하려고 뒷 뚜껑을 열어보니 아뿔싸, 필름이 하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초보가 필름을 잘못 장전해서 그냥 헛바퀴를 돈 것이었다. 그 뒤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진각 나들이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그때의 사진이라도 남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자유의 다리도 직접 걸어볼 수 있고, 기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까지도..

사진속일상 2014.02.22

성내리 은행나무

우리나라에 '성내리'라는 지명은 많다. 성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면, 성을 경계로 성 안 마을과 성 밖 마을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풍기도 조선 시대에는 풍기군이었으니 성내리라는 지명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 성터의 흔적도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풍기군 옛 관아터에 수령이 7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는 무척 노쇠한 모습이다. 전체 조선 시대와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옛 건물은 전혀 찾을 길 없고, 오직 이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상을 증언하고 있다. 나무 옆에는 풍기초등학교가 있다. 국민학교 3학년쯤에 여기로 전학 와서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 학교다. 아마 1961년 경이었을 것이다. 촌놈에게는 전기가 들어왔던 풍기는 휘황한 도회지였다.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면서 풍기 생활..

천년의나무 2014.01.02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날씨가 차가워지니 고향 생각,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추웠고, 먹을 것 부족했고, 모든 게 궁핍했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벽난로를 피우고 거실 한쪽 벽면을 유리창으로 환하게 만들어도, 그 옛날 창호지 유리 한 조각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추워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싸락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둠..

시읽는기쁨 2013.11.20

그늘 속을 걷다

소설가 김담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구해 읽은 책이다. 자전적 에세이인 이 책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담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초등학생일 때 성남으로 이사했다. 전형적인 이농 가정이었다. 변두리 도시에서 사는 가난한 이농자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어렵게 학업을 계속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현실에 눈을 떴고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다. 독서와 밑바닥 삶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깊이 몰두하지는 못했다.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님을 따라 다시 귀향했다. 낯선 고향이었지만 이웃과 숲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 고성은 남북 분단의 비극이 현존하는 곳으로 저자가 현대사의 아픔을 그려내고 싶어하는 무대다. ..

읽고본느낌 2013.08.06

징검다리

경안천을 산책할 때면 일부로라도 한 번은 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옆에 번듯한 다리가 있지만 돌아서라도 이 징검다리를 찾게 된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뛰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어릴 적 고향 마을 앞 개울에도 이런 징검다리가 있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쉽게 물에 잠겨 무릎 위까지 바지를 말아 올리고 건넜다. 심할 때는 아예 바지를 벗어 머리 위에 이고 건너기도 했다. 더 어렸을 때는 아버지 등에 업혀 건넜던 기억도 난다. 여름에 홍수라도 나면 당연히 학교로 가는 길이 끊겼다. 시멘트 다리가 있는 읍으로 해서 돌아가자면 두 시간이나 더 걸렸다. 저학년 아이들은 등교하는 걸 포기했고 학교에서도 말렸다. 학교에 안 가도 되는 동생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 뒤..

길위의단상 2013.06.12

스쳐 지나가는 풍경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남산 자락 후암동 친척집이었는데 결혼식이 있었는지 집안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신기해서 내 또래 아이와 오리락내리락 하며 놀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그러다가 굴러떨어져서 외할머니를 놀라게도 했다. 그때는 시커먼 몸통을 가진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객차를 끌었다. 쉴새없이 연기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가끔씩 힘들다는 듯 목쉰 기적 소리를 토해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였는지, 나는 객차 유리창문을 위로 열어놓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는 우리를 끌고가는 철마를 구경했다. 옆으로 끝없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좋았다. 잠시만 그런 게 아니라 서울 가는 내내 바깥 구경에 넋을 잃었다고..

길위의단상 2013.03.12

선거의 추억

제18대 대선이 끝났다. 박근혜 후보가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분이지만 축하를 보낸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은 14,950,303명이 있음을 잊지 말고,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 주길 부탁드린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 민생, 민생 하는데 그것보다 민본(民本)이 우선이다. 나에게도 선거에 대한 직접적인 추억이 있다. 어렸을 때 일이다. 4.19 직후 시행된 지방자치제에 따라서 면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선친이 거기에 출마한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는데 집안이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거린 정도와 선거 마지막 날 장면이 기억난다. 투표가 끝나고 선친은 졌을 거라며 술을 드시고 일찍 귀가해서 잠이 들었다. 개표 결과를 볼 필요도 없다고 포기..

길위의단상 2012.12.23

할아버지 사형제

할아버지대에는 네 형제분이 계셨다. 선비였던 증조부를 닮으신 분이 장남인 첫째 할아버지셨다. 당시 풍습대로 부모 재산은 대부분 첫째 할아버지가 물려받았다. 동생들은 형님댁 일을 거들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첫째 할아버지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글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풍농월하는 양반이었다. 비가 와도 마당에 넌 곡식 하나 거둘 줄 모르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남마저 집안 일에 관심이 없고 밖으로 나돌다가 결국은 문전옥답을 비롯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형님 집에서 나오는 삯으로 생활하던 동생네까지 졸지에 집안이 몰락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할아버지 형제네는 내 땅 한 평 없이 무척 가난한 처지였다. 양반이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집이 부유하다면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지만, 빈곤하게..

길위의단상 2012.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