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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와 복숭아

그저께 안산에 가서 바깥 찬바람을 오래 쐬었더니 코감기가 찾아왔다. 쉼 없이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약간의 미열을 제외하고는 오직 코에만 이상이 나타났다. 특이한 감기다. 그러니 오히려 짜증이 더 난다. 이틀간 나 죽었소 하며 침대에서만 버티었다. 어제 오후에는 겨우 내내 기다리던 눈이 살짝 내렸다는데 그것도 모르고 어두운 방 안에서만 지냈다. 소식을 듣고 창문을 열어보니 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오늘은 저도 질렸는지 감기가 슬슬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이때 마지막 아듀의 순서는 복숭아 통조림이다. 감기와 복숭아 통조림과의 연결은 그 연원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나에게는 역사가 길다. 그것은 영양 보충제이면서 몸살의 특효약이다. 몸이 좋지 않으면 아내의 시장바구니에는 늘 복숭아 ..

사진속일상 2005.01.09

수련

기회가 된다면 수련을 키워보고 싶다. 작은 연못을 하나 만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입이 넓은 그릇에 물을 담고 수련을 띄워 거기에 작은 꽃이 피어난대도 좋겠다. 한여름의 물 위에 넓고도 여유롭게 떠있는 잎사귀는 거울처럼 윤기가 있고, 그 사이에 한두 송이 청초하게 피어있는 수련을 보면 온갖 마음의 시름이 다 잠들 것 같다. 그래선지 수련은 한자로 水蓮이 아니라 잠잘 수자로 된 睡蓮이다. 마음의 걱정과 시름을 잠재워 준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수련을 키워본 사람의 얘기로는 수련의 지는 모습이 무척 예쁘다고 한다. 처음 꽃봉우리였을 때처럼 꽃잎을 여미고 나서는 소리도 없이 물 밑으로 자취를 감추는데, 그 마지막 모습이 그렇게 단아하고 우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상으로만 그려 보는 것이지만 수련이..

꽃들의향기 2005.01.06

1단이 되다

휴게실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속에서 바둑판 앞에 사람들이 늘 모여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개인별로 컴퓨터가 보급되고, 같이 모이기 보다는 각자 컴퓨터로 게임을 즐긴다. 그래서 휴게실에도 바둑판이 사라졌다. 바둑을 가끔씩 두는 편인데 아직 컴퓨터 바둑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대부분이 속기여서 생각할 여유가 없어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돌 놓는 소리, 사람들의 훈수하는 소리가 어우러진 바둑판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 컴퓨터 바둑에서 1단으로 올랐다. 처음에 2급으로 시작했는데 두 달만에 두 단계가 오른 셈이다. 실제 급수는5급 정도가 되는데 온라인 상에서는 급에 거품이 많이 끼여있는 것 같다. 한때 바둑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이젠 긴 시간 집중이되지 않는다. 수를 읽어내는 능력도..

사진속일상 2005.01.05

작고 단순하게

무료할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나는 백지 위에 낙서를 합니다. 특히 지리한 회의가 끝도 모르게 길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종이 위에 낙서를 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회의에 열중하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귀로 몰려드는 소리들을 내쫓으며 하얀 백지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저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말들을 적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종이 위에는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단어만을 계속 적기도 하지요. 언제고 제일 많이 적혀있는 단어는 날 비[飛]자입니다.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뻗어 한껏 멋을 부리며 이 글자를 쉼 없이 쓰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종이 한 면이 이 한 글자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는 ..

참살이의꿈 2005.01.04

쓰나미의 수수께끼

지난 연말에 남부 아시아 해안을 휩쓴 지진해일로 20만 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다. 앞으로 사망자가 더 확인되면 그 피해가 얼마나 될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의 대재앙이었다. 지진해일의 공식 명칭은 ‘쓰나미’(津波, Tsunami)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쓰나미의 무풍지대였기 때문에 이 용어에 생소한데, 쓰나미의 설명을 보면 여러 가지로 특이한 점이 많고 잘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첫째, 쓰나미는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일반적으로 파동의 속도는 매질의 관성적 성질과 탄성적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쓰나미의 경우,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바다 깊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다 깊이가 1000m 정도 되는 해저에서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생겼다면 그 속도는 시속 350km나 된다는 것이다. 만약 바..

길위의단상 2005.01.03

두물머리 느티나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수령은 약 400년이고, 높이는 26m로 경기도 지정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안내문에 보면 예전에 이곳이 두물머리 나루터였는데 한양과 왕래하는 짐을 싣고 온 말이나 소들이 이 느티나무 아래서 쉬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류에 팔당댐이 건설되어 그때와는 지형이 많이 변했을 것이다. 수량이 많아져서 느티나무 바로 옆에까지 강물이 들어와 있는데, 강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호수로 보인다. 나무 옆에 서서 그 옛날의 풍경을 연상해 보려 하지만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하여튼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는 아주 좋다. 강변을 따라 산책길이 길게 만들어져 있어 데이트 장소로도 최고일 것 같다. 어느 TV 드라마의 촬영 장소였기도 해서 찾는 이가 많다는데, 만약..

천년의나무 2005.01.02

새 아침의 기도 / 조창환

새 아침에 꽃씨 하나 받게 하소서 작고 단단한 꽃씨 어루만질 때 씨앗 한 점에 우주가 담긴 그 신비, 느끼게 하소서 꽃나무 모종 하나 가슴에 품고 새봄 맞게 하소서 꽃나무 모종 하나 뜨락에 심고 실비 내리는 새벽 바라보게 하소서 햇빛 이글거리는 날 뜨거운 바람 번득일 때 백일홍, 채송화, 과꽃, 접시꽃.... 사람의 마을에 붉은 꽃 가득 넘쳐 그 꽃밭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마침내 산그늘 홀로 무거워지고 사람의 마을에 가을이 오면 그늘 속에 맑은 열매 줍게 하소서 흐린 하늘과 차가운 바람 속에 저희가 너무 오래 떨었사오며 거친 말, 욕된 날, 무서운 밤을 저희가 너무 오래 겪었사오니 새 아침에 단단한 꽃씨 한 점 내려 주시어 거기서 실비 내리는 새벽과 이들거리는 사랑 보게 하시고 그늘 속에 맑은 열매 ..

시읽는기쁨 2005.01.01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가족과 함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다. 며칠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큰 아이가 표를 끊어온 것이다. 오래 전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으니까 20년 전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만화 영화가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었는데,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코난의 다음 편 때문에 일요일이 무척 기다려졌었다. 지금은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였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진 자연과 동심의 순수함과 문명 비판 등이 어우려져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만화 영화하면 나에게는 코난이 제일 먼저 연상된다. 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이 아닌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읽고본느낌 2004.12.31

북한강의 아침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지는 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12월 중순까지만 해도 너무 따스해서 걱정을 했건만, 연일 쉬지도 않고 이어지는 추위가 요놈들나 죽지 않았다는고함 소리처럼 매섭게 들린다. 아침에는 북한강변을 지나갔다. 수면 위로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 오르고, 강변에 있는 나무에는수증기가 얼어붙어 하얀 얼음꽃을 만들었다. 자꾸만 옆으로 눈길이 가게 되는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자연은 아름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남쪽 아시아 지방에서는 해일로 인해 1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인간만을 위해 자연이 존재하지는않을 것이다. 또한 자연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헛된 욕망임도 알게 된다. 어디에선가 본 글이 생각난다. '인간은 자연에 굉장히..

사진속일상 2004.12.30

12월 / 정호승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각장애인이 종각역에 내려 흰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 분 곁에 서서 팥죽 한 그릇 얻어 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 12월 / 정호승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만나고 너와 내가 가슴으로 만나서, 따스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의 손을 이끌고, 같이 팥죽을 나누는 세상이 된다면.....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기다려진다.

시읽는기쁨 200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