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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대공원 산책

주일 미사를 드리고 아내와 어린이대공원을 산책하다. 결혼 초 공원 가까이에 살 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놀러온 곳이다. 하나는 유모차에 태우고, 하나는 손을 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인데, 그때로부터 세월은 훌쩍 20년이 지났다. 아이들은 다 커서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두 부부만이 옛날을 회상하며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제 무대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와서 그만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똑 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난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 아이들로부터 해방된 자유가 좋지만, 허전함 또한 없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을 골라 다녔지만, 이젠 둘이의 취향을 찾아 즐길 수 있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사람들의 ..

사진속일상 2004.12.19

2004 겨울 세종로

퇴근길에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세종로를 따라 걷다. 세상은 불경기로 아우성인데 여기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가로수마다 전구로 장식되어 불꽃나무로 변했고, 마침 ‘루미나리에’(빛의 축제) 행사도 열려 눈을 어지럽게 한다. 사람들은 주광성 생물이라도 되는 양 밝은 빛 아래로 모여들어 즐기고 있다. 잠시일지라도 세상 시름 잊어버릴 만하다. 그러나 빛의 축제장 옆에서는 기아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건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한다. 또 한 쪽에서는 보안법 폐지 촉구를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그 옆으로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시끄럽고, 분주하고, 그리고 화려한 조명으로 번쩍이는 2004년 겨울, 서울의 모습이다.

사진속일상 2004.12.18

冬來不似冬

집 근처에 있는 둑길에 제비꽃이 피었다. 겨울에 개나리가 피는 것은 가끔씩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제비꽃이 피어난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서울 지방이 이런데 남쪽은 어떨까? 지구의 기후 변화에 대해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올 겨울은 지나칠 정도로 특이하다. 12월 중순이 지나도록 영하로 내려간 날이 이틀에 불과했다. 그것도 고작 영하 1, 2도에 지나기 않았다. 제대로 된 첫 눈 소식도 없이, 밤에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며칠 전 인천에서는 17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기상 관측 이래 겨울 기온으로는 최고라고 한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한겨울에 눈앞에 나타났다. 따스한 겨울을 다행으로 생각하기에는 지구가 말하는 징후가 심상치 않다. 제비꽃 외에 민들레, 개망초, 개나리도 보인다. ..

사진속일상 2004.12.17

雜詩(二) / 陶淵明

白日淪西阿 素月出東嶺 遙遙萬理輝 蕩蕩空中景 風來入房戶 夜中枕席冷 氣變悟時易 不眠知夕永 欲言無予和 揮杯勸孤影 日月擲人去 有志不獲騁 念此懷悲悽 終曉不能靜 - 雜詩(二) / 陶淵明 밝은 해 서쪽 장강으로 떨어지고 하얀 달 동편 산봉우리로 나오네 달빛은 아득히 만리를 비추며 넓디넓게 공중에서 빛나네 바람은 방문으로 들어오고 밤중에 잠자리 서늘도 하여라 기후 변해 시절의 바뀜 깨닫고 잠 못 이뤄 밤 길어졌음을 안다네 말 나누려 하나 나와 화답할 이 없어 잔 들어 외로운 그림자에게 권하네 세월은 사람을 버려두고 가니 뜻이 있어도 펼치지 못한다오 이를 생각하다 마음은 구슬퍼 새벽 되도록 진정하지 못한다오 잡시(雜詩) 12수(首)는 도연명이 50세 즈음에 지은 시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낙향한지 10년, 그를..

시읽는기쁨 2004.12.16

구슬봉이

봄 햇살은 따스하지만 산에는 아직 새싹들이 돋아나기 전이다. 땅은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로 덮여있다. 이때 봄꽃들이 얼굴을 내미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구슬봉이'다. 뒷산을 오르다 보면 길을 따라 곱게 피어난 이 꽃을 만날 수 있다. 어떤 것은 길 가운데에서도 자라나 잘못하면 무심결에 밟을 수도 있다. 꽃을 정면에서 보면 별 모양으로 생겼다. 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 있지만, 실제 별 모양에 더 가까운 것은 별꽃이 아니라 구슬봉이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하늘의 별이 땅에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낮에도 별이 그리워 누군가가 하늘의 별을 따다가 산과 들에 뿌려놓았을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이 귀여운 보랏빛 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꽃들의향기 2004.12.13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어두운 색조로 하루 일을 마치고 가난한 저녁 식탁에 앉은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삶의 신고(辛苦)가 잔뜩 묻어있는 그림이다. 고흐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농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릴려고 했으며, 그래서 겨울 내내 농민의 머리와 손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썼다. 고흐 자신은 이 그림에 굉장히 애착이 갔었는 듯 언젠가는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으로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정직한 생활일 것이다. ......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

참살이의꿈 2004.12.11

부모는 파업중

아침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중년 부부가 말 안 듣는 자녀들 때문에 파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자녀들의 나쁜 행실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 보다가 되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집안 일 보이콧 파업을 벌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말썽을 부렸으면 이럴까 공감이 되기도 하고, 그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씁쓰레하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가 자신의 10대 자녀들의 게으름을 뜯어고치겠다고 집에서 나와 파업을 벌이는 사상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시드니 모닝 헤랄드 인터넷판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엔터프라이즈에 살고 있는 전업주부 캐트 버나드(45)와 공무원인 할란 버나드(56) 부부는 자신들의 두 자녀 벤자민(17)과 키트(12)가 집안일에 너무나 비협조적으로 ..

길위의단상 2004.12.10

소리들 /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 소리들 / 나희덕 소리가 끊어져야 소리가 들린다. 진공이 단순한 무(無)가 아니듯, 우리 귀의 고막을 울리지 않는다고 소리 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가득하다.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대음희성(大音希聲)...... 세상..

시읽는기쁨 2004.12.09

타래난초

타래난초는 작고 귀여운 꽃이다. 꽃은 꽃대를 따라 피어올라 가는데 이름 그대로 실타래에 감긴 실처럼 나선 모양을 하며 달려있다. 꽃이 너무 작아서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눈을 낮추고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면 꽃의 색깔이나 모양이 너무 예뻐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봄이 한창 무르익으면 양지 바른 곳에서 피어나는데,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산소의 잔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할미꽃과 생육 환경이 비슷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작으면 작은 대로, 눈에 띄지 않으면 또 그대로, 자신의 주어진 몫을 다해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저 작은 꽃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꽃들의향기 2004.12.08

커피 반 잔

속이 탈이 나서 일주일째 죽이나 싱거운 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 좋아하는 술과 커피는 입에도 대지 못한다. 일년에 한 두 차례, 알코올과 커피가 과할 때는 꼭 이렇게 탈이 난다. 원래 위와 장이 부실해서 작은 찬 기운에도 설사가 나는데, 사실 술, 고기, 커피 같은 것이 내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다 이런 걸 과용하게 되면 속이 쓰리면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럴 때 상당 기간 기호품을 끊고 음식을 조심하면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된다. 오늘은 옆 사람이 마시는 커피 향기를 견디지 못해 반 잔만 타서 마셔본다. 그리고 입안에 감도는 향기를 천천히 음미한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다. 오늘따라 먹고 싶은 것도 많다. 튀김도 먹고 싶고, 크림빵도 먹고..

사진속일상 2004.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