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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한강에서

오랜만에 저녁 한강에 나가 보다. 집이 한강변에 있어 몇 발자국만 걸으면 한강에 나갈 수 있지만 무엇에 그리 바쁘게 쫓기며 살았는지 저녁 산책을 나간 것이 몇 달 만이다. 넓은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낮의 열기를 식혀준다. 강가에 걸터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 젊은 연인들부터 다이어트를 하는지 강변 길을 따라 열심히 걷는 사람들로 저녁 한강은 활기가 가득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하늘을 난다. 그리고 탁 트인 시야가 마음까지 넓게 열어준다. 낮 동안 답답하고 폭폭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위무를 받는다. 강을 바라보며 아내와 나란히 앉는다. 이럴 때는 아내가 친구같다. 어려울 때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기만 하다. 참된 친구란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한다. 점점 어두워지며 건너..

사진속일상 2004.06.12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

오늘 아침에 만난 사진 한 장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강 다리 난간 위에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사진이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이 지상에 마지막 짧은 글 하나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과연 무엇이 한 사람을 저토록 절망하도록 만들었을까? 절박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저 사진을 보면안타깝기만 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신을 방지하기 위해 이젠 경찰이 한강 다리를 순찰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자살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도 있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뭘 하든 못 살까하며 그들을 질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각양각색이듯 충격에 대한 반응의 정도도 사람마다 ..

길위의단상 2004.06.11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이 시는 지난 달에 발표된 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이다. 시어가 투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편안하게 읽힌다. 무거운 주제를 부담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현대는 온갖 ..

시읽는기쁨 2004.06.08

묵주

터에 찾아온 J 수녀님에게서 묵주를 선물 받았다. 돌아가신 언니 수녀님이 사용하셨던 묵주인데, 수녀님이 보관하고 계시다가 기도를 많이 하라면서 내 손에 건네 주셨다. 아마 최근에 침체된 내 상태를 전해 들으시고 자극을 주시려는 것 같다. 묵주는 황색의 묵주알에 나무 십자가가 달려있는 작고 소박한 것이다. 손때가 묻고 닳아있는 것이 오랜 기간 수녀님의 기도와 함께 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T 수녀님으로부터도 사용하던 묵주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묵주는 전부 나무로 된 것이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십자가의 귀퉁이는 닳아 없어지고 나무 색깔도 까맣게 변해 있었다. 기도가 생활화된 수녀님들이지만 이 정도까지 되자면 보통 세월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분신처럼 묵주가..

사진속일상 2004.06.07

함박꽃나무

함박꽃나무에 피는 함박꽃은 북한의 국화이다. 김일성이 이 꽃을 유난히 좋아해서 개나리였던 국화가 함박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목란(木蘭)이라고 부른다는데 우리 주위에서는 좀체 보기가 힘든 나무이다. 설마 북쪽의 국화라고 기피하는 건 아닐테고, 정원수로도 좋은 나무건만 보기가 쉽지는 않다. 몇 년전 축령산에 갔다가 등산로에서 함박꽃나무를 보았다. 일부러 심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자연 상태로 자라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숲 속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이 때쯤이었을 것 같은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함박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꽃은 목련만큼 큰 편이고 순백의 꽃잎에 핏빛같은 붉은 색의 수술대가 눈길을 끈다. 순결과 정열을 동시에 간직한 듯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꽃이다. 올 봄에는 터에 이 ..

꽃들의향기 2004.06.04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나무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식물의 특징으로 단순함을 들면서 그 단순함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단순함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천년 전의 바람은 지금도 똑 같이 불지만 지리하지 않고 늘 새롭다. 무위(無爲)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이루려는 마음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길을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그저 말없이 생각없이 맞기만 할 일이다. 쓸데..

시읽는기쁨 2004.06.03

길상사의 오후

날씨가 더워졌지만 활짝 개인 푸른 하늘이 자꾸 밖을 바라보게 만든다. 오후에는 동료와 짬을 내어 길상사와 간송미술관에 들러 보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길상사는 요정을 하던 보살님이 기증을 해서 조성된 사찰이라고 알고 있고, 그리고 도심에 있지만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해서 한번 가보고 싶었던 절이었다. 어느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는 내부적이든 아니면 외부로 부터든 새로운 바람이 늘 불어 들어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전통의 고수나 옳음에 대한 확신은 진리 자체의 싱싱한 생명력을 잃게 될 위험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길상사는 새로운 자극을 주는 사찰이라고 알고 있는데, 짧은 시간 겉모습만 둘러보았지만 평소에 느꼈던 이..

사진속일상 2004.06.01

명함

한국에서 근무하던 인도인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그 동안의 한국 생활에서 가장 난감했을 때가 명함을 가지지 않고 외출했을 때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이 서툴러서 명함이 없으면 자기 소개가 잘 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명함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한국 사회의외피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명함인 모양이다. 어떨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불쑥 명함을 내밀어서 이상할 때도 있다. 서로 초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명함을 받기만 하고, 줄 명함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없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나 아니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보..

길위의단상 2004.06.01

배수로 작업

터의 뒤쪽에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성가시게 한다. 시멘트블록 50개를 사다가 한 줄로 쌓았다. 시멘트블록을 나르랴, 줄 맞추어 쌓으랴, 안 그래도 서툰 노동인데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줄도 삐툴삐툴, 높낮이도 들쭉날쭉, 다른 사람이 본다면 허허 하며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사람을 사서 할려니 요사이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내 땀의 흔적을 보게 되는 보람일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땀이 정신적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 육체적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복잡한 세상사는 잊어버리게 된다. 내 일을 하면서 명상의 효과까지 덤으로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러..

참살이의꿈 2004.05.31

이팝나무

우리 민족의 밑바탕 정서에는 한(恨)이 숨어 있다고 한다.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한은 핏줄을 따라 대대로 이어지며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팝나무를 보면 이상하게도 그런 한이 먼저 떠오른다. 5월에 흰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는 겉으로만 보면 화사하고 화려하다. 마치 함박눈을 뒤집어쓴 듯 온통 하얀색인데 햇빛이라도 비치는 날이면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름 그대로 하얀 쌀알을 나무에 붙여놓은 것 같다. 그런데 나무 이름 탓일까, 결코마음 편하게 꽃을 감상할 수는 없다. 이팝은 이밥을 뜻하는데, 배 곯은 사람들이 저 꽃을 보며 한 공기 가득 담겨나온 하얀 이밥을 연상하며 이름을 붙였으리라고 충분히 상상이 된다. 집에 양식은 떨어지고 새끼들은 배 고프다고 울 때 풀뿌리라도 캐러 산에 오른 ..

꽃들의향기 200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