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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의 속삭임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도시의 보도 블록 위로 비가 내린다. 도시의 소음에 묻혀 소리도 없이 비가 내린다. 시멘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작은 생명에게는 단비가 되어 내린다. 그 위를 지나가는한 사람의 발걸음이 바쁘다. 이런 날은 산골에 있는외딴 집 툇마루에 앉아 빗소리만 듣고 싶다. 황토 마당에 구멍을 내며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만 듣고 싶다. 세상에서 멀어지면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외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쉼없이 내리는 봄비는 자꾸만 나에게 속삭인다. 이젠 돌아가라고, 무거운 짐 벗고 이젠 홀가분해 지라고..... 일어나 지금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 지어 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홀로 살리 거기 평화 깃들어 고요히 날개 펴..

사진속일상 2004.05.28

능원사에서

터에 오가는 길에 능원사가 있다. 그 앞으로 지나다니기만 했는데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축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능원사에 들렀다. 어릴 때 외할머니를 따라 간 초파일 날의 절 분위기가 내 머리에는 아직 남아있다. 고향 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청계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평시에는 들어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적했다. 그런데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여러 마을에서 모인 할머니, 어머니들로 좁은 절은 축제터로 변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도 얻어먹으며,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밑에서 사람들은 마음 속 소원을 부처님께 빌고, 그 가피를 믿으며,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을 경축하는 축제의 날, 이 정도가 석..

사진속일상 2004.05.27

나무가 아파요

서울 시내를 걷다보면 가로수에 번호가 적힌 명찰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못을 박아서 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바라볼 때마다 영 기분이 꺼림찍하다. 물론 충분히 검토를 하고 나무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나무에 박힌 못은 왠지 불편하다. 몇 년 전에 소백산을 찾았을 때였다. 순흥 쪽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라는 작은 사찰이 하나 있다. 그런데 절 경내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소나무 두 그루에 큼지막한 대못이 박혀있는 것이었다. 보통 볼 수 있는 못이 아니고 대형 공사장에서나 쓸 법한 아주 큰 못이었다. 그 광경은 날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가 적혀있는 플랭카드를 걸기 위해서 그 짓을 한 것이었다..

사진속일상 2004.05.25

목화싹이 나오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목화밭 목화밭.....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이 목화씨를 구해 주셔서 세 고랑에 씨를 뿌린 것이 두 주전이었는데 드디어 싹이 돋아났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흙을 뚫고 나온 목화의 싹이다.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목화밭이다. 하사와 병장이 노래한 목화밭을 이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때 우리 집 뒤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을이면 하얀 솜 가득한 목화밭 풍경이며, 그리고 목화의 열매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따서 먹으면 달콤했던 맛의 느낌도 떠오른다. 또 목화 솜을 수확해서 마당에서 할머니가 흰 실을 뽑아내던 광경도 ..

참살이의꿈 2004.05.24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작년에 어느 분이 코멘트에 올려준 것이다. 이 시를 가사로 한 안치환의 노래도 있다고 하는데 귀뚜라미의 애절하고 외로운 울음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시읽는기쁨 2004.05.22

한글은 싫다

5월초에 서울시에서 주관한 축제가 있었다. 시청 앞에 잔디 광장을 꾸미고 그곳을 중심으로 10여일간 시민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 축제의 이름이 'Hi Seoul Festival'이어서 지나치게 영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사실 그 때의 포스터를 보면 온통 영어로 뒤범벅되어서 과하다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축제의 주제를 'RED'로 정하고 R은 Refreshing하는 식으로 행사의 의미를 설명해 놓아 외국인을 위한 행사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Hi Seoul' 대신에 '안녕 서울' 한다고 해서 시대에 뒤져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국인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서울시가 이번에는 시내 버스 노선을 개편하면서 버스를 4종류로 나누고 색깔로 구..

길위의단상 2004.05.21

낙화

오가는 출퇴근길의 중간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옛날 권력자들의 안가로 사용되었던 집들을 헐고 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공원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몇 종류의 꽃들도 자라고 있다. 흠이라면 너무 인공적이고 깔끔한 것인데, 그래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과거에는 여기가 서슬 퍼렀던 높은 분들의 회식과 밀담 장소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같았으면 감히 옆을 지나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원 한 귀퉁이에 모란이 피었다가 얼마 전에 보니까 꽃잎이 모두 떨어졌다. 싱싱한 꽃잎이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동백만큼 비장하지는 못해도 왠지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사진속일상 2004.05.20

흰씀바귀

터가 위치한 마을은 5월이 되면 마을길을 따라 흰씀바귀가 환하게 피어난다. 대개 노란색의 씀바귀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흰씀바귀 세상이다. 6년 전이었던가, 처음 이 마을에서 봄을 맞았을 때 길 양쪽으로 하얗게 흰씀바귀가 피어있는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수녀원이 여럿 들어와 있어서 길을 따라 오가는 수녀님들을 보게 되는데, 봄이면 흰씀바귀가 피어있는 길을 따라 하얀 수녀복의 수녀님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무척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이곳의 흰씀바귀는 꽃이 크고 화사하다. 보통 씀바귀에서 느끼는 작으며 약간은 촌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 꽃을 보면 누구나 시선이 끌리게 되고, 그 순수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에 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씀바귀의 이미지 ..

꽃들의향기 2004.05.19

아빠는 꽃처럼 살자고 했죠

나이가 들수록 동요의 노랫말이 가슴에 저며온다. 어릴 때부터 '파란마음 하얀마음'의 노랫말을 좋아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정이 가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동요가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고 옛 동무를 만난 듯 반갑기만 하다. 가끔씩듣게 되는 다른 동요의 노랫말들도 어쩌면 그리 이쁜지 모르겠다. 옛날 노래 가사에는 인간의 순수한 그리움이나 정이 자연과 잘 조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며칠 전에 '파란마음 하얀 마음'의 노랫말을 지으신 어효선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옛날에 부르던 동요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 분이 지은신 노래 중에서 널리 알려진 세 곡의 노랫말을 다시금 흥얼거려 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

길위의단상 2004.05.18

반가운 손님

빈 터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작년에 흙을 들여와깔아놓은 터에 봄이 되니 하나 둘씩 풀들이 나기 시작한다. 흙 속에 들어있던 씨들이었는가,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왔는가, 맨 땅이 초록 옷을 입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사실 이름을 모르는 풀들도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낯 익은 꽃을 피우고 미소짓는 것들도 있다. 대부분은 꽃이 아주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저것들이 귀엽고 반갑다.

참살이의꿈 200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