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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요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이다. 분명히 내 육체도 연속적으로 늙어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평상시에는 잘 의식하지 못한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대로 마음이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월의 흐름을 알아채게 된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감지하고 불현듯 놀란다. 어떤 때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내 나이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주름진 얼굴에서, 또는 훌쩍 큰 조카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에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느낀다. 또 아내의 돋보기 쓴 모습이나 하나 둘씩 늘어나는 흰 머리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마음까지 아리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럴 때는 무척 어색하다. 내 나이가 얼만데, 도대체 외모가 어떻게 보이..

길위의단상 2003.12.15

전원의 즐거움 / 문일평

옛 글 한 편을 읽는다. 文一平(1888-1939)님의 글이니 아마도 70년쯤 전에 씌어진 글일 것이다. 낯 선 한자 단어들이 자주 나와 읽기에 거북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풍스러운 맛이 느껴져서도리어 새롭다. 그러나 이런 전원 생활을 그리다가 실족한 사람도 많음을 명심하자. 제목; 전원의 낙(樂) 경산조수(耕山釣水)는 전원생활의 일취(逸趣)이다. 도시문명이 발전될수록 도시인은 한편으로 전원의 정취를 그리워하며 원예를 가꾸며 별장을 둔다. 아마도 오늘날 농촌인이 도시의 오락에 끌리는 이상으로 도시인이 전원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류는 본래 자연의 따스한 품 속에 안겨 토향(土香)을 맡으면서 손수 여름지이를 하던 것이니 이것이 신성한 생활이요 또 생활의 대본(大本)일는지 모른다. 이른..

참살이의꿈 2003.12.14

월드컵의 추억

어제 일산에 다녀오면서 월드컵 공원에 들렀다. 예전에는 난지도로 불리웠던 섬이었는데 서울 시민들의 쓰레기를 15년 동안이나 쌓아 올려서 지금은 높이 100m의 산으로 변해 버렸다. 그 쓰레기 위에다 흙을 덮고는 공원으로 조성했다. 올라가 보니 주로 억새가 많이 심어져 있다. 그런데 1억t의 쓰레기더미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묘했다. 지금 발 밑에서는 온갖 쓰레기들이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침출수와 가스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부패 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화스럽기만 한 풍경이 아이러니칼했다. 이 공원은 현대 문명의 상징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치 희망의 땅이라도 될 듯이 한 쪽에서는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갖다 버린 쓰레기는 분명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

사진속일상 2003.12.13

유안진의 詩 두 편

슬퍼지는 날에는 어른들아 어른들아 아이로 돌아가자 별똥 떨어져 그리운 그곳으로 가자 간밤에 떨어진 별똥 주우러 가자 사랑도 욕스러워 외로운 날에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물어보자 개울가의 미나리아재비 물봉숭아 여린 꽃이 산기슭의 패랭이 엉겅퀴 산난초가 어째서 별똥 떨어진 그 자리에만 피는가를 어른들아 어리석은 어른들아 사는 일이 참말로 엄청 힘들거든 작고도 단순하게 경영할 줄도 알아야지 작아서 아이같은 고향 마을로 가서 밤마다 떨어지는 별똥이나 생각다가 엄마 누나 무릎 베고 멍석자리 잠이 들면 수모도 치욕도 패배도 좌절도 횃불꼬리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찬란한 별똥별이 되어주지 않을꺼나 문득 너무 오래 사람이었구나 아장걸음 걸어오는 새벽 봄비에 미리..

시읽는기쁨 2003.12.12

오래된 미래

어제 서강대에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저자인 호지 여사의 강연이 있었다. 500석의 좌석이 다 차고 일부는 서서 강연을들을 정도의 성황이었다. 그러나 내용은좀 아쉬웠다. 그분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듣고 싶었는데,현대 문명의 부작용과 대처 방안에 대한 개론적인 설명만 있었다. 아마도 유명세에 따른 기대 탓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미래`가 우리나라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청중들의 열성도 대단했다. 약 3/4 정도는 여성이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온 아주머니도 있었고여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이 도리어 감동적이었다. 역사를 주도한 것이 지금까지는 가부장적 문화의 남성 중심이었지만 그 부정적 측면이 현대에 들어와서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

길위의단상 2003.12.11

아내의 내복을 입다

날씨가 추워져서 내복을 입으려니까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아내의 내복을 입기로 했다. 아랫도리 중에서 제일 헐렁한 것을 골라 입으니 그런대로 몸에 맞는다. 여자 옷을 입으면 고추가 떨어진다며 아내가놀린다. 그러나 이젠 별로 쓸데도 없지 않느냐며 같이 웃다. 다른 사람 몰래 바지를 치켜 올리고 보면 무척 재미있다. 분홍색 바탕에는 예쁜 무늬도 들어 있다. 불편한 점이라면 화장실에 가서 거시기할 때 뿐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 하겠지. 만약 안다면 不出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ㅋㅋㅋ......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재미있다.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이런 사소한 변화를 즐긴들 누가 탓하랴.

사진속일상 2003.12.10

일희일비 않기

`살아보니까 내 인생에 즐거운 날은 몇 날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날들은 그 즐거운 하루를 즐긴데 대한 빚을 갚는 날이었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본 구절인데 무척 공감이 되었다. 다만 즐거운 날이 몇 날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궂은 일도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이지만 우리는 많은 굴곡을 경험한다. 행복과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결코 삶은 뜻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나타나고 평탄한 길이 지나면 가시덤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떨 때는 늪을 통과해야 한다. 거기에는 맹수가 살고 있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

참살이의꿈 2003.12.09

그림자

어제 밤, 퇴근하는 길 가로등 불빛을 받은 나무 그림자가 벽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물체의 그림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길 위에 또는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 특히 앙상한 나무 가지가 만드는 그림자 무늬에는 자주 발길을 멈추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 비유로 그림자 현실과 이데아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우리네 삶이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더 높은 차원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림자가 주는 이미지는 특별하다.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 하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罔兩이 景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景이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

사진속일상 2003.12.06

한가한 오후

한가한 오후 시간이다. 창 밖의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금새라도 비가 내릴듯 하다. 하늘은 연한 잿빛 도화지같다. 긴 붓에 무지개빛 물감을 묻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즐거워 할 그런 그림이면 좋겠다. 텅 빈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따스하다. 달콤한 향이 오늘따라 특히 고맙다. 근 한 달 가까이 술과 커피를 멀리 했다. 속이 아파서 식사도조심하며 지냈다. 가끔씩 속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향이 그래서 고맙고 향기롭다. 사실 산다는게 별 것아니지 싶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내적 만족이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반짝이는 보석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곳에 숨어있는지 모..

길위의단상 200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