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4

설봉공원에서 놀다

이천에 볼 일이 있는 아내와 동행했다가 - 운전기사 역할로 - 남는 시간에 설봉공원에서 혼자 놀았다. 다른 때 같으면 공원의 호수 둘레를 걷든지 설봉산에 오르든지 했을 텐데 이번에는 동선이 적은 쪽을 택했다. 어제 서울에 나갔다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몸이 피곤해서였다. 설봉공원 안쪽에 들어갔더니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이 있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작품을 상시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그림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미술관 뒤에는 월전의 작업실을 재현해 놓았다. 1996년의 작품 '야매(夜梅)'다. 달 밝은 밤에 핀 백매(白梅)를 그렸다. 淸影淸影 月明人靜夜深 맑은 그림자여 맑은 그림자여, 달 밝고 인적 없는 야심한 밤 1994년 작 '매..

사진속일상 2022.08.26

나의 사적인 그림

사람한테는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있다. 공적인 생활은 드러나지만 사적인 생활은 숨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적인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할 뿐이다. 우지현 작가의 은 작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책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글과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글이 중심이지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설명은 많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글과 연관된 그림을 보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작가가 소개하는 그림은 사탕처럼 달콤하고 봄 햇살처럼 화사하다. 이 책에서도 새로운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데 우리말로 하면 '황홀한 죄책감' 쯤 되겠다.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움을 주는 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

읽고본느낌 2022.05.24

고흐, 영원의 문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888년에 아를로 옮긴 이후의 인생 후반부를 그린 영화다. 한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고흐 그림의 느낌이 나는 화면에 잘 담겨 있다. 고흐의 격정적인 삶을 차분하면서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내면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적대적이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힘들게 예술혼을 불태우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던 한 인간의 고군분투가 안타깝다. 그렇다고 고흐가 늘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는 상당 부분을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고흐를 보여준다. 화구를 메고 그림의 소재를 찾아 초원을 걷는 행복한 고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간관계는 서툴렀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는 예민한 촉수를 갖..

읽고본느낌 2022.05.14

혼자 있기 좋은 방

"화가, 작가, 꾸준함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이 책 지은이인 우지현 씨 소개의 첫 문장이다. 지은이의 그림은 보지 못했지만 글은 무척 잘 쓰시는 분이다. 글의 기교보다는 글에서 풍기는 향기와 깊이가 독자를 끌리게 한다. 은 그림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처음 보는 예쁜 그림들이 많아 눈호강을 하면서 화가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림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미가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책은 '조용히 숨고 싶은 방' '완벽한 휴식의 방' '혼자 울기 좋은 방' '오래 머물고 싶은 방' 등 4부로 나누어져 있으나 큰 의미는 없다. 꼭 방에 관한 그림도 아니다. 잔잔한 일상을 ..

읽고본느낌 2022.05.07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가 192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독일 사회를 이끌던 지도층을 조롱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화다. 그때는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치가 집권하기 7년 전이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칼을 들고 넥타이에 나치 문양을 새긴 맨 앞의 남자는 나치당원으로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다. 얼굴의 귀는 봉해져 있는데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우는 독일을 화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신문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을 상징한다. 양손에는 펜과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에는 ..

길위의단상 2022.01.26

마르코복음[20]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갑시다" 하셨다. 그들은 군중을 남겨 두고 배에 타신 예수를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갔다. 그런데 거센 회오리바람이 일어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와서 배가 곧 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안 되십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있어라" 하시자 이내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그러고 나서 "왜 겁냅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 하셨다. 그들은 몹시 질려 두려워하며 서로 말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호수조차 복종할까?" - 마르코 4,35-41 예수의 활동 ..

삶의나침반 2021.08.11

상처 입은 천사

핀란드 화가인 휴고 게르하르트 심베리(H. G. Simberg, 1873~1917)가 그린 '상처 입은 천사(Wounded Angel)'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 현직에 있을 때 전교조에서 펴낸 소책자에서였다. 당시는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다. 이 그림은 우리 교육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고 황량하다. 땅에는 나무 한 그루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을 뿐 황무지와 비슷하다. 먼 산이나 호수도 회색이다. 무엇에 다쳤는지 상처 입은 천사가 들것에 실려 간다. 천사의 눈은 가려져 있다. 천사를 나르는 둘 중 뒤에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

길위의단상 2020.11.07

그냥

멍석 김문태 선생은 '한글꽃 동심화'라는 독특한 분야를 열어 가고 있다. 동심화는 한글을 그래픽적으로 변형 시켜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동양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풍경화가 아니라 한글이 내포하는 의미를 조형적으로 그려낸다. '웃음'이라는 글씨는 마치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고요'라는 글씨는 기도하는 선승의 모습으로 산속의 정적이 그대로 느껴진다. 은 선생의 동심화 모음집이다. 그림만으로도 좋지만 옆에 붙은 글과 감상하면 감동이 두 배로 된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예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자의 한 획이 그냥 나오지 않는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림 역시 정신의 표현이다.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면 천진..

읽고본느낌 2019.08.24

풍선과 소녀

그림에 문외한이니 내막을 모르지만 지난주에 일어난 일을 보면 예술 세계란 게 참 희한하다. '풍선과 소녀'라는 뱅크시의 그림이 소더비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예상보다 높은 15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바로 뒤에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림이 액자 밑으로 빠져나가며 갈가리 찢어진 것이다. 뱅크시가 액자 뒤에 기계 장치를 해 두고 경매가 끝나자마자 그림이 파손되도록 원격조정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다. 뱅크시가 무엇을 노렸든지 간에 이런 것도 예술 행위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우선 나는 그림값이 왜 그렇게 비싸야 하는지 이해 불가다. 미술 전시회장이나 경매장은 예술을 핑계로 돈 많은 사람이 투기질하는 무대인 것 같다. 그림이 예술 자체의 가치보다는 재테크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도구..

길위의단상 2018.10.12

그림 / 신경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 / 신경림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림 속 사람이 현실로 튀어나왔다 들어가곤 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이런 건 판타지 영화에서 잘 써먹는 수법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시읽는기쁨 2016.10.03

카가야의 밤하늘

카가야의 작품 중에서도 나는 이 그림이 제일 좋다. 석양에 물든 하늘에 초생달이 떠 있고 옆에는 금성이 빛나고 있다.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까, 소녀의 어깨에 걸친 수건과 헝클어진 머리칼이 하루의 고단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개와 함께 나란히 앉아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따스하고 평화롭다. 주황색의 색감도 그런 분위기를 더해준다. 1968년 일본 사이타마에서 태어난 카가야는 어릴 적부터별을 좋아해 밤하늘 그림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여전히 별을 사랑하는 소년의 감수성이 살아 있어, 그의 그림은 사람들을 동화와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얼마 전에 카가야의 '천문 일러스트 전시회'가 국립과학관에서 열렸다. 그의 그림을 통해 아름다운 신화와 판타지의 나라에 빠져..

읽고본느낌 2009.08.2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는 국립 서울농학교가 있다. 청각장애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곳이다.외형은 일반 학교와 비슷하지만시끄러운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은 수화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교정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다. 그러나 말 없는 말은 빛 가운데에 가득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수화라는 것에 동감하게 된다. 농학교가 직장과 가깝다보니 지하철에서도 가끔씩 농아들을 만난다.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는모습은 하나 같이 밝고 귀엽다. 가슴 한 편이 아리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그들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지만 추측컨대 신체적 한계로 인해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세상의 때가 훨씬 덜 묻었을 것이다. 그들..

사진속일상 2008.06.24

루오

100여 km를 달려 대전까지 간 것은 루오(G. Rouault)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조르주 루오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루오는 예수를 비롯한 종교화와 사회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을 많이 그렸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미제레레’ 연작 등 종교성 짙은 그림들과 루오가 사랑한 광대, 매춘부, 가난한 사람들의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정물화와 풍경화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루오는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에서 영혼의 빛을 발견했다. 대신에 부자들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멸시했다. 판사들, 오페라 극장의 귀빈석에 앉아있는 부르주아들의 얼굴은 탐욕스럽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그려져 있다. 대신에 곡마단 소녀의 얼굴은 예수의 얼굴을 닮아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

읽고본느낌 2006.08.17

작은 전시회

저녁부터 가을비가 내리다. 그림을 그리는 동료의 작품 전시회에 가다. 찻집의 한쪽 벽면을 이용한 작은 전시회이다. 전시된 작품은 다섯 점인데 모두 생소한 기법으로 제작되어 있다. 액자의 유리 표면에도 물감을 칠해서 효과를 낸 것이 인상적이다. 소재는 전원 풍경과 현대 도시의 구조물들이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것은 간소하고 작은 전시회인 것이다. 보통 생각하는 미술 전시회라면 입구에 화환이 늘어서 있고, 부담을 주는 큰 방명록도 펼쳐져 있고, 그리고 관람객의 기를 죽이는 넓은 홀과 환한 조명이 연상된다. 그런 곳에서 나 같은 사람은 괜히 의기소침해진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작은 찻집의 벽면을 이용했다. 작품 밑에서 차를 마시며 부담 없이 얘기를 나눈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작가가 아닌 보통 사..

사진속일상 200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