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18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비망록 / 문정희 비망록이란 그래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게다. 젊은 시절의 비망록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한 생애를 허둥거린들 어떠리. 아프고 흔들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새긴 별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시읽는기쁨 2021.03.27

탄실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전기소설이다. 김별아 작가가 고발하듯 펴냈다. 김명순의 어릴 때 이름이 탄실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와 시대와의 불화로 지난한 삶을 한 여인이다. 1세대 여성 문인으로서 나혜석과 닮은 점이 많다. 문정희 시인이 쓴 '곡시(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에 그녀의 일생이 잘 그려져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에서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

읽고본느낌 2019.03.27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 문정희

큰 것을 도둑맞은 것 같다 거친 숨 몰아쉬며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이 다녀간 것일까 아무것도 없다 공허뿐이라고 그냥 가 보는 거라고 말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구구구 모이 몇 알 주워 먹느라 할퀴며 깃털 뽑히며 두 날개 뭉개졌는데 벌써 떠나야 한다고 한다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가랑잎도 아닌데 자꾸 떨어져 내리다가 내일은 어디일까 정말 어디를 흔들어야 다시 푸른 음악일까 -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 문정희 지금 내 심정이다. 산다는 게 이렇게 형편없는 줄 몰랐다. 진흙탕에서 버둥대는 느낌이다. 이러면서 생은 끝나갈 것이다. 뭘 하며 산 거지, 돌아보면 공허다.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라고 물으니 더 나락이다.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는 걸 시인도 모를 리 없다. 밧줄은 썩어가는데..

시읽는기쁨 2018.06.06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 응 / 문정희 "응"이라는 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육감적인 생명의 언어다. 형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시선이 놀랍다. 그러고 보니 "응"을 쓸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카톡으로 대화할 때는 보통 "ㅇㅇ"이라 쓴다. 시인이 말하는 "응"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땅 위에서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시읽는기쁨 2018.01.19

결혼 기차 / 문정희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은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한쪽을 자르고 단호하게 뛰어내린 사람도 이내 한쪽 다리로 서서 기차에 두고 온 발목 하나가 서늘히 제 몸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 기차를 또 타기도 한다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만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선반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노을 속을 무슨 장엄한 터널을 통과하는 종점이 없어 가장 편안한 이 기차에 승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 결혼 기차 / 문정희 이기적인 욕심을 떼어놓고..

시읽는기쁨 2015.06.07

알몸 노래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 알몸 사랑 / 문정희 화끈한 사랑의 시인이다. 문정희 시인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정열의 여인인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가 원초적 생명력으로 약동한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만한 육체의 건강한 나부를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어른은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외친다. 시인에게 시들어가는 나이는 없다. 그런 사랑을 나는 감당할 수 ..

시읽는기쁨 2014.09.15

유방 /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시읽는기쁨 2013.09.04

쓸쓸 /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

시읽는기쁨 2013.03.18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치마 / 문정희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과 여, 그다사다난함의 배..

시읽는기쁨 2009.07.15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

시읽는기쁨 2009.02.23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남편 / 문정희 어느 모임에서 50대 중반을 넘긴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갱년기를 거치면서 성욕을 비롯한 이런저런 욕망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고, 그 중에는 남편에 대한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전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

시읽는기쁨 2008.11.03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

시읽는기쁨 2008.02.03

성공시대 /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 성공시대 / 문정희 부자 나라 신민들은 다 행복하여라! 그들의 인사는 "부자 되세요!"이고, 그들의 종교는 맘몬, 행동강령은 경쟁과 거침없는 ..

시읽는기쁨 2007.03.15

나무 학교 /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 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 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나무 학교 / 문정희 이 시를 새해를 맞는 나의 다짐으로 삼기로 한다. 나무의 침묵을, 나무의 인고와 기다림을, 고통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슬기를 배우기로 한다. 비 오면 ..

시읽는기쁨 2006.12.30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 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버린 것은 누구인가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 휘말려 한 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

시읽는기쁨 2005.11.25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옆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시읽는기쁨 2005.09.10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 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

시읽는기쁨 2005.08.23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 문정희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저 흙 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록 깃털로 눈뜨는 풀들과 새 떼들을 누가 저토록 간절히 키울 수 있을까요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나도 저 흙 속의 여자가 키우는 초록 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혹은 풀들처럼 싱싱하게 새 떼처럼 가뿐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하나쯤은 곁에 두고 볼을 부비며 살고 싶지만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문득 저 나무에도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끝없이 기도를 하는 푸른 손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 문정희 돋아나는 새싹 속에 그 여자가 있다. 산골짝을 흘러 내리는 도랑물 속에도 그 여자가 있다. 저 어린 아이의 맑은 눈동자 속에도 그 여자가들어 있다. 땅 풀리는 저 흙 속에, 바람..

시읽는기쁨 200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