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9

내 어릴 적 겨울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만 봐도 노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세 집은 3, 40대 부부 가정이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도 여섯 명이나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 보기는 힘들다. 등교할 때 잠깐 북적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제일 넓은 공터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운동하기 위해 나온 어른들이 많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주를 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친구와 노는 시간은 태권도학원에 나가서다. 요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틀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보면 붕어..

길위의단상 2021.01.03

재미와 의미

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

참살이의꿈 2020.12.07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 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천둥 번개에 놀란 아이들이 마리아의 방으로 뛰어들어오자 마리아는 'My Favorite Things'를 불러주며 안심시켜준다. 아이들과의 서먹한 관계가 이 일을 계기로 친밀하게 변한다.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던 장면이었다. 나이..

시읽는기쁨 2014.12.20

안산 일출

안산 자락에서 일출을 보았다.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은 듯이 해가 떠올랐다. 두 눈으로 해돋이를 보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듯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에는 그동안 내가 너무 게을렀다. 또는 마음속에 그 무슨 간절함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아니면 인생을 건성건성 살으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뒤섞인 도시 위로 우주의 등대인 양 태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새해 첫날처럼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싶어졌다. 아내와 같이 자락길을 한 바퀴 돌았다. 8km를 걷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우리 수준에서는 딱 걷기 알맞은 길이었다. 어느 길이나 다 그러하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다. 긍정과 감사의 에너지를 길에서 받는다. 원망과 미움의 감정도 스르..

사진속일상 2014.01.28

장난감 / 타고르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아침 나절을 저렇게 보잘것없이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을 하시네!'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이와 은덩이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감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 유희를 하고..

시읽는기쁨 2013.05.16

장자[153]

위생의 도란 능히 태일을 품고 잃지 않는 것이며, 능히 점을 치지 않고도 길흉을 아는 것이요, 능히 머무를 수 있고 능히 그칠 수 있으며, 능히 남들을 사면하고 자기에게서 구하며, 능히 융통 자재하고 바보처럼 진실하여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구멍이 쉬지 않는다. 화평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땅기지 않는다. 그 덕이 공손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종일 보아도 눈을 깜작이지 않는다. 외물에 편향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되 갈 곳을 모르고 머물되 처할 곳을 모르며 만물과 더불어 따라가며 그 물결에 함께하는 것이니 이것을 위생의 도라 한다. 衛生之經 能抱一乎 能勿失乎 能無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能舍諸人 而求諸己乎 能소然乎 能동然乎 能兒子乎 兒子終日..

삶의나침반 2011.01.30

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훨훨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 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냘픈 총각 애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푸레아지 인 양 매출한 두 다리는 어방없이 날쌘 장난꾸러기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삐 없는 새끼염소마냥 산으로 강으로 내닫는 그 애를 두고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탓 합니다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하지 않는가고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 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 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딩구는데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고 비 올 때면..

시읽는기쁨 2009.08.13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나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 우리가 ..

시읽는기쁨 2008.05.31

놀이터의 아이들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명랑하다. 늘 텅 비어있기만 한 아파트 단지의 작은 놀이터인데 오늘은 왠일인지 아이들로 북적댄다. 기구에 매달려 깔깔거리는 아이도 있고, 이러저리 쫒고 쫒기며 달음질치는 아이들도 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병아리들의 지저귐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이 정겨워서 절로 미소가 인다. 그러나 당연한 풍경이 이젠귀하게 느껴지는 세태가 된 것 같아 씁쓰름하기도 하다. 방과 후의 학교 운동장에도 뛰어노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인문계 고등학교쯤 되면 한낮인데도 운동장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예전 우리 때만해도 자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즘은 시분을 다투는 학생들 스케줄이 어른들보다 더 바쁘다. ..

사진속일상 200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