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15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시읽는기쁨 2024.03.11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

시읽는기쁨 2023.08.09

트레커에서 나오다

14년간 함께 했던 모임인 트레커에서 나왔다. 요 몇 년 동안 참여하는 횟수가 적다 보니 뜸하게 만나게 되고 마음도 멀어지게 되었다. 끝이 다가왔음을 작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해외 트레킹에서 연이어 배제되는 걸 보면서 굳이 회원으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긴 시간 함께 했던 인연을 쉽게 놓지 못했다. 즐거웠던 추억거리가 많은 트레커였다.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을 계기로 트레커 모임에 가입했다. 2008년 가을이었으니 14년이 넘었다. 그동안 국내 산행과 여행의 대부분을 트레커와 함께 했다. 특히 해외 트레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9년 랑탕, 2015년 야쿠시마, 2016년 뉴질랜드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트레킹이었다. 트레커가 아니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값진 경험이었다. 그 사실 ..

길위의단상 2022.11.26

인연

현재 전 세계 인구는 80억 명이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로 지구상에 생존했던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약 1천억 명이라고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다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까. 바늘 끝 같은 한 점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 끌리게 되었을까. 호텔 커피숍을 들어서는 당신을 멀리서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내 사람이구나. 밤색 투피스를 입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채 당신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무슨 신호를 접수한 것일까, 내 몸 안에서는 호르몬이 홍수처럼 분출했고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일까. 짧은 일별일 뿐인데도 치명적인 끌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반면에 수십 년을 알고 지내..

참살이의꿈 2022.02.27

밤골과의 인연

나에게는 세 가지 마음의 짐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밤골이다. 끝맺음을 잘하고 나오지 못해서 밤골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꿈에 밤골이 나타나면 대개가 악몽인데, 늘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곳을 떠난 지 12년이 되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쉽사리 버리기 어려운 인연도 있다.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무연대면불상봉(無緣對面不相逢)' -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떨어져도 서로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오늘, 언젠가는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아니,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지 모른다. 우연이 무수히 겹쳐지면 필연이 된다. 그래서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람이다...

사진속일상 2019.04.27

트레커 10년

2008년 11월에 가입했으니 트레커와 함께 한지 10년이 넘었다. 일기장을 찾아 보니 그동안 함께 다닌 산과 길이 아련한 추억 속에 펼쳐진다. 10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많은 도움과 즐거움을 받았고, 그러면서 실망도 있었다. 10년 간의 산행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08년 11월 강씨봉 12월 칼봉 2009년 1월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2월 고대산 3월 가리산 6월 백덕산 7월 두타연 9월 소백산 2010년 3월 금학산 7월 비학산 11월 구봉상 12월 정암산 2011년 3월 아차산, 도봉산 11월 금강소나무숲길 2012년 1월 대금산 3월 아차산 4월 북바위산 5월 응복산 10월 갈기산 2013년 2월 금병산 3월 보리산 7월 중원산 10월 금오도 비렁길 2014년 1월 칠장산 7월 가은..

길위의단상 2019.01.22

어떤 인연

대학 시절에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공부나 노는 방식도 비슷했다. 전공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점도 닮아서 같이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자연히 둘이서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시기도 비슷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타과 여학생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속으로 애만 태웠던 나에 비해 친구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여학생이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에 가입해서 안면을 익히며 접근했다. 그러나 진도는 상당히 느렸다. 친구는 진행 상황을 수시로 나에게 들려주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친구의 속앓이도 점점 깊어졌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한 나는 도움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소연을 들어주고 술을 ..

길위의단상 2015.10.20

인연이 되면

너무 안달하지 마. 조바심낼 필요도 없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늘이 허락해야 성사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게 돼. 없는 인연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어. 사람만 아니라 장소도 마찬가지야.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는 가게 될 거야. 그러니 마음속에 품고 느긋하게 기다려. 그곳이 너에게 자연스레 다가오도록. 야쿠시마가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다.

길위의단상 2015.01.22

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 이진명

한 선방(禪房) 승(僧)의 아무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첫째 이야기를 듣는다 말도 없이 출가해 수년 후 정식 비구계를 받고 고향집 양친을 찾아 갔노라고 50줄 아버지가 오늘 나랑 함께 자자며 이부자리를 펴시는데 중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안 잡니다 쌀쌀맞게 내뱉고는 다른 방에서 잤노라고 한 선방 승의 찬 하늘 구만리를 가는 기러기라도 배웅하는 듯, 젖힌 고개의 둘째 이야기를 듣는다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간다고, 공항에서라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전갈온 적 있었노라고 절방 마루 끝에 서서 비행기 출발했겠구나 산문 밖이나 건너다 보았노라고 누나 아이가 둘이라는데 그 조카들 얼굴도 모르고 한 선방 승의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이번에는 아주 작은 웃음기가 입가에 짧게 머문 셋째 이야기를 ..

시읽는기쁨 2013.02.07

식구 / 유병록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 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 식구 / 유병록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먹는 입'으로 표현한 것이 인간의 체통을 깎아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옛날에는 먹는 것이야말로 제일 중차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사람이 '먹는 입'으로밖에 보일 수 없..

시읽는기쁨 2008.09.26

신비한 힘

세상을 살다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오감으로 드러난 세계 외에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게 된다. 그런 것들 중에 심리학에서 동시성(Synchronicity), 또는 감응이라 불리는 현상이 있다. 이 신비한 현상을 최초로 규명한 심리학자는 칼 융(Carl Jung)이었다. 융은 어느 환자의 꿈에서 왕쇠똥구리 딱정벌레가 나오는 얘기를 듣던 중 창문을 두드리는 이상한 소리에 밖을 보니 그 지역에서 드문 왕쇠똥구리가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이 사건이 융을 기묘한 일치 현상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런 우연의 일치 현상은 누구나 일상에서 가끔씩 경험한다. 문득 옛 친구가 떠올랐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거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참살이의꿈 2007.05.30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있음에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치 말고 애처롭지만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람이라 지치지 말고 더 줄 수 없음에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으로 여겨 함께 기뻐하고 이룰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인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인연설 / 한용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예기치 않는 새로운 인연들과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이고, 인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만남을 우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인연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고 따뜻하다. 인연이..

시읽는기쁨 2007.05.23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의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사람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도록 사람 속에는 심연 깊은 갈증의 샘이 들어있다. 그 사람을 만남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더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나를 봐주지 않고, 저 멀리서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을 나도 무심코 외면해 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서걱거리며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것이 인생....

시읽는기쁨 2007.05.03

거미줄 /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데는 없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 거미줄 / 손택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어디 부모 자식 사이에만 있겠는가. 모든 존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끈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이 전 우주의 존재들에게 파문을 일으킨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하나로 이어진 존재들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우울한 건 멀리 있는 당신이 그 무언가로 ..

시읽는기쁨 2007.03.23

모든 것이 꿈이었다

옆의 동료가 가평에다 자신의 전원생활을 위한 터를 구했다. 폐농가가 포함된 땅인데 은행나무, 전나무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너무 좋다고, 며칠 전에 등기까지 나왔다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잔뜩 기쁨과 설레임이 들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수년 전의 내 경험이 떠올랐다. 터와 처음 만났을 때 한 마디로 뿅하고 갔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머릿 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미래의 꿈으로 가슴이 벅찼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이리라. 처음 만났을 때 쇠가 자석에 끌리듯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나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을 보통 인연이라고 얘기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정말 이 사..

참살이의꿈 2004.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