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14

그 샘 /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그 샘 / 함민복 우리는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불문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혜의 정신 대신 탐욕과 시기만 남았다. '영끌'은..

시읽는기쁨 2021.08.08

반성 / 함민복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 반성 / 함민복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는 손 세정제가 있다. 코로나를 예방하라고 관리사무소에서 마련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는 습관적으로 세정제로 손을 닦는다. 남의 손이 닿은 버튼이 오염되었을까 두려워서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는 반성했다. 먼저 손을 닦고 버튼을 누를 수도 있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동일하다. 그런데 둘 사이에 마음가짐은 천양지차가 난다. 시인의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이 지극하다. 실천 여부를 떠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마음이 아름답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뭣이 중요한지는 내팽개쳐 놓고 엉뚱한 곁다리만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읽는기쁨 2021.01.06

밴댕이 / 함민복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고 사셨으니 자, 인사드려야지 이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 밴댕이 / 함민복 '밴댕이 소갈머리'임을 자인한다. 누가 지적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찔려서 하는 말이다. 늙어갈수록 밴댕이 소갈머리를 닮아간다. 제발 나잇값을 하며 살고 싶다. 우리는 땅의 밴댕이들이 아닌가. 도시는 거대한 밴댕이 양식장 같다. 얼마나 더 작아질 수 있을까, 바글거리며 살아간다. 그런 소갈머리로 거친 세상을 헤치고 버텨낸다. 어찌 보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한 거지. 밴댕이는 나이를 먹어도 밴댕이일 뿐. 그걸 인정하면 크게 안달할 일도 없는 거지.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며 살 수 있다고, 우리 선생님이 보여주고 있잖아.

시읽는기쁨 2018.08.09

하늘길 / 함민복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보았다 - 하늘길 / 함민복 지지난달에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였다. 캔맥주를 부탁했다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승무원에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맥주도 안 주는 이따위 비행기가 어디 있냐고, 했을 것이다. 이 시를 접하니 그때 일이 더 뜨끔해진다. 시인은 하늘길에서 음식 먹는 것도 미안하고, 불경스러워 소변도 참았다는데 내 꼬락서니는 뭐였단 말인가. 아, 똑같은 길을 가도 사..

시읽는기쁨 2016.09.05

소스라치다 /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소스라치다 / 함민복 경안천에는 오리가 많다. 경안천을 걷다 보면 천변 풀섶에서 먹이를 먹는 오리를 만난다. 방해하지 않으려 피해서 걷지만 오리는 인기척만 느껴도 천 가운데로 도망간다. 미안하다. 어떤 때는 너무 예민한 그들이 야속할 때도 있다. 시에 나오는 뱀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그마한 곤충을 만나도 놀란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오히려 지상의 다른 생명들이다. 덩치가 산더미만 한 인간이 다가오는데 위협을 느끼지 않을 동물이 있을까. 역지사지해야 한다. 지상에서 인간보다 더 무서운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 모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16.02.04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아내와 휴대폰 얘기를 나누다가 결코 안 쓰겠다던 고집을 꺾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가게에 나가 싼 걸로 하나를 골랐다. 어찌 알았는지, 드디어 스마트폰을 갖게 되었냐며 몇 군데서 연..

시읽는기쁨 2014.06.01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 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 ........................................

시읽는기쁨 2014.05.02

섬 / 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섬 / 함민복 울타리는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다.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하는 장벽이다. 그런데 높이가 없는 울타리, 너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울타리도 있다. 섬을 둘러싼 바다를 물 울타리로 보는 시각이 재미있고, 일반적인 울타리의 속성을 뒤집어버리는 시인의 관점도 신선하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양한가. 이런 시를 읽으면 참 즐겁다.

시읽는기쁨 2009.12.24

지구 신발 / 함민복

너 지구 신발 신어 봤니? 맨발로 뻘에 한번 들어가 봐 말랑말랑한 뻘이 간질간질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며 금방 발에 딱 맞는 신발 한 켤레가 된다 그게 지구 신발이야 지구 신발은 까칠까칠 칠게 발에도 낭창낭창 도요새 발에도 보들보들 아이들 발에도 우락부락 어른들 발에도 다 딱 맞아 지구 신발 한번 꼭 신어보렴 - 지구 신발 / 함민복 EBS의 '세계테마기행'을 즐겨 보고 있다. 지난 주에는 알래스카편이 방송되었다. 북극권의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광이 인상적이었지만 자연을 아끼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더 감동이었다. 국립공원에는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지정 차량 외에는 운행도 금지한다. 원래 주인인 동물들을 지키고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함이다.그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읽는기쁨 2009.10.26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누구나 다 비틀거리며 그곳으로 간다. 그러니 마음아, 상심하지 말아라. 먼 훗날 언젠가, 그리운 그곳에 앉게 될 때 알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걸어간 길이 빛나는 길이었음을, 외롭고 힘들었어도 영광의 길이었음을....

시읽는기쁨 2007.10.17

그리움 / 김초혜

천둥소리 내 안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다 보면 그대 이마를 적시는 비가 되어 내릴 수도 있으리라 - 그리움 / 김초혜 내 안에서도 천둥소리 들린다. 그저 몇 번 쿵쾅거리다 말지, 아니면 번개 되고 소나기 되어 그대와 하나가 될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그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고맙고 소중한 일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리움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을 지향하는 기도며 흐느낌이다. 모든 존재가 마찬가지다. 새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도 그리움 때문이고, 종소리가 아프게 퍼져나가는 것도 그리움 때문이다. 그대를 품에 안아도 내 갈증 채워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대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비가 되어 그대 이마를 적시고 그대의 속으..

시읽는기쁨 2006.11.17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난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

시읽는기쁨 2005.10.28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으로 얼마나 커다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민박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 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보, 새싹 비빔밥, 뼈 발린 닭…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잔..

길위의단상 2005.03.04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 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 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 팔리면 내게 삼 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래에 익숙해 지면서경제적 가치로 물건을 판단하는데 길들여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삭막한 자본주의 체제라도 정말로 소중한 것은 계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정, 신뢰, 사랑을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 세상이 매겨놓은 금전적 가치보다는 숨어있는 사물..

시읽는기쁨 2005.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