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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

재동 백송

지난 주말 오후에는 동료 K와 같이 종로구 재동(齋洞)에 있는 백송(白松)을 보러 갔다. 지금은 헌법재판소 구내에 속해 있는데 정문 수위실에 백송을 보러 왔다고 하니선선히 통과시켜 준다. 본관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서니 뒤편 얕은 언덕 위에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철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품위가 손상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백송은 누가 보아도 절대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흰색 줄기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동 백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는데 과히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백송은 중국 북경 부근이 원산지로 번식시키기가 까다로워 희귀한 나무이다. 중국에서 ..

천년의나무 2004.10.11

토평의 코스모스 꽃밭

서울에서 가까운 토평의 한강변에는 넓은 코스모스 꽃밭이 있다. 마침 오늘은 구리 시민의 날과 겹쳐서 강변북로와 한강 둔치에는 차와 사람들로 넘쳐났다. 철 지난 코스모스 꽃밭에는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니는 바람에 꽃들이 밟혀 죽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발길을 덜 타서 온전한 꽃밭을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늦게 씨를 뿌렸는지 싱싱한 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코스모스는 남미 원산의 외래종이지만 이미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 된지 오래다. 포플러나무가 도열한 신작로 양편으로 코스모스 꽃길이 환했던 옛날 고향 가을 풍경도 아련하다. 지금은 중부 지방 산들의 단풍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는데 가을이익어가고 있는 우리 산하는 어딜 가도 아름다운 풍..

꽃들의향기 2004.10.10

미국쑥부쟁이

암사동 한강 둔치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자연 생태 보전 지역이 있다.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고 출입 금지된지가 1년이 되는데 지금은 억새, 갈대를 비롯해서 온갖 식물들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땅이 되었다. 여기에 가 보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땅은 금방 생명으로 가득차서 생태계가 회복되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장자리를 따라 전에는 보지 못했던 흰 꽃이 군락을 지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꽃 모양은 개망초와 비슷한데 크기는 훨씬 작았으며, 올망졸망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양이 가을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이 꽃은 '미국쑥부쟁이'였다. 70년대에 꽃다발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들여왔는데 지금은 온 나라 산야에 두루 퍼져있다고 한다. 꽃이름에 '미국'이나 '서..

꽃들의향기 2004.10.09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

길위의단상 2004.10.08

이사를 하다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하다. 도시에 내 집이 없는 사람은 현대판 유목민이다. 어떨 때는 집주인과의 관계에서 서러운 일을 겪기도 한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내 집을 가질려고 애쓰는구나 하고 긍정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변화가 두려워진다. 정든 장소,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되는 것이 부담이고 스트레스다. 변화란 젊은 때는 희망이지만 나이가 들면 두려움이 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한 장소에 안주하는 대신 변화는 신선한 자극을 주고 삶의 의미를 깨우쳐 준다. 이사를 자주 할수록 생활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살림이 간소해진다. 너무나 많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이사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을 깊이..

사진속일상 2004.10.07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날씨가 참 좋지요?" 오늘은 이런 인사를 많이 주고받았다. 시리다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것일까, 서울에 나타난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도 푸르다. 너무 파래서 저 하늘에는 서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것만 같다. 파란 색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쓸쓸함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 만든 색깔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가을[秋]과 마음[心]을 합하면 쓸쓸할 수[愁]가 된다. 가을의 모든 풍경 속에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은 쓸쓸함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날은 한 일주일쯤 휴가를 받아 낯선 길로 떠나고 싶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들길과 산길을 따라 마냥 걷고만 싶다. 가을 여행은 혼자서 떠나는 것이 어울린다. 여름의 번잡스러움을 지나서 가을은 홀로 스스로에게 향하는 계절이다..

길위의단상 2004.10.05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경기상고 반송

경기상고에서 반송을 보다. 경기상고는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학교 본관 건물 앞으로 늘어선 반송이 참 봄직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면 대부분이 소나무를 말할 것이다. 소나무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야산에서 구불구불 자라는 소나무도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고, 하늘을 향해 쭉 쭉 뻗은 소나무 또한 시원하고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 중에서도 반송이 좋다. 반송의 가장 큰 특징은 주된 줄기가 따로 없고 땅에서부터 여러 개의 줄기들이 뻗어 나온다. 영어 이름이 'Japanese Umbrella Pine'인데 그 이름대로 생긴 모양이 우산을 쓴 것 같이 대칭형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붉은 색을 띤 줄기도 시원시원하다. 원산지가 우리나라로 알고 있는데 영어 이름에는 'Japanese'가 들..

천년의나무 2004.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