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29

경안천 버들(210531)

경안버들한테는 4월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 5월이 되면 길이 풀로 덮이고 진창길로 변해 가까이 가지를 못한다. 멀리서 망원으로 당겨 찍을 수밖에 없다. 10월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어느새 경안버들은 녹음 짙은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경안버들은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처럼 강 한가운데 늠름하게 서 있다. 태풍이 치고 홍수가 져도 굳건히 버텨낼 자세다. 경안버들이 올여름을 어떻게 보내는지 응원하며 지켜봐야겠다.

천년의나무 2021.05.31

동네 장미

블로그에 꽃 사진을 못 올린 지 두 달 가까이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18년이 되는데 이렇게 뜸했던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지금은 봄으로 풍성한 꽃의 계절이 아닌가. 그만큼 꽃구경하기 위해 바깥출입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활짝 핀 장미를 보았다. 매년 같은 곳에서 보는 장미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의 인사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본다(see)'는 겉모습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보고 만난다는 뜻이다. 동시에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네팔의 인사말인 '나마스떼'와 비슷하다. 내가 장미를 본다고 할 때,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보는' 것일까? 눈 뜬 장님이 무엇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지 염치 없는 짓이 아닌..

꽃들의향기 2021.05.30

힘겨운 5월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지만 나에게 올 5월은 너무 힘겨운 달이다. 많이 지치고 심신이 녹초가 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꽃구경하러 바깥나들이 한 번 나가지 못했다. 제일 괴롭히는 건 7주째 계속되는 대상포진이다. 포진은 가라앉았으나 아직도 개미 한 마리가 얼굴을 기어다니고 있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 밑에서 입술까지 흉터가 띠 모양으로 나 있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지만 원래 상태로 돌아갈지 의문이다. 이달 중반에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이 생겼다. 그 탓으로 위장에 탈이 났다. 속이 부글거리고 소화가 안 되니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마음의 평형이 깨지면 내 위장은 즉각 반응한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외부 충격에 약한..

사진속일상 2021.05.29

마르코복음[14]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 한쪽 손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분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인데도 그분이 그를 고쳐 주실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하시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 그들 마음이 완고함을 슬퍼하시며 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손이 다시 성해졌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 - 마르코 3,1-6 예수와 바리사이들의 갈등이 점점 고조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고발할 핑곗거..

삶의나침반 2021.05.28

청소를 끝마치고 / 강소천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잡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 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

시읽는기쁨 2021.05.27

덕 볼 일이 없으면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제일 강력한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이욕(利慾)'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개체의 생존과 종족 번식의 욕구는 이기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돈 많고 권력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뭔가 덕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덕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발걸음을 끊는다. 오죽하면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 나잇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손주를 자주 보는 방법은 올 때마다 용돈을 듬뿍 쥐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효자인 줄 알았더니 속셈은 따로 있었다. 제가 부모한테 덕 볼 일이 없어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척할지는..

참살이의꿈 2021.05.26

자산어보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영화에 나오는 정약전의 독백이다. 그렇다면 정약전은 동생인 정약용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는지 모른다. 조선 시대 유학자가 이런 사상을 품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정약전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멋진 대사다. 실제로 노론 사이에서는 정약용보다 정약전이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정약전의 유배지가 절해고도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1801년, 정조라는 방패막이 사라지자 남인을 향한 신유박해의 피바람이 불고 정약종은 순교를 한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각각 흑산도와 강진에 갇힌다. 잘 나가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폐족이 된 것이다. 정약전은 16년간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 중 죽었고, 정약용은..

읽고본느낌 2021.05.25

답답하면 바둑을 둬요

한 달 넘게 대상포진으로 시달리다 보니 심신이 지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멀리 있는 사람한테서 스트레스까지 받으니 위마저 말썽을 부리고 있네요. 이래저래 힘든 5월입니다.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답답한 처지를 잊기 위해서는 바둑이 제일입니다. 바둑을 두면 저절로 몰입이 되고 그동안은 만사를 잊습니다. 내 바둑 상대는 컴퓨터 안에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입니다. 사람 대국자는 피곤해서 사람과의 온라인 대국은 기피하지요.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러는지 바둑 예절이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또한 너무 승부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싫고요. 여러 AI 바둑 프로그램 중에서 요사이 내 파트너는 인간 기보로 학습한 릴라제로입니다. 다른 프로그램보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두세 점은 깔아야 해요. 바둑..

길위의단상 2021.05.24

노매드랜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다.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유목민의 땅'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여자 주인공인 펀은 석면 원료를 생산하는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수입이 끊기고 집까지 잃는다.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는 우리나라 IMF처럼 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밴에 살림살이를 싣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단기 일자리를 얻으면서 살아간다. 현대판 유목민의 삶이다. 그렇다고 펀이 절망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처지의 이웃들을 만나면서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도와주며 꿋꿋하게 살아낸다. 무리를 이끌고 지도하는 밥 웰스를 비롯해 영화에 나오는 인물 다수는 배우가 아닌 실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읽고본느낌 2021.05.23

빈곤을 보는 눈

며칠 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최근 3년간의 국가 행복지수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OECD 37개 국가 중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35위였다. 우리 밑으로는 그리스와 터키만 있었다.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는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빈곤율 수치도 행복지수와 마찬가지로 하위권이다. 빈곤율은 약 15% 정도 되는데 우리 아래로는 미국과 일본 정도가 있다. 특히 노인의 빈곤율은 40%가 넘어서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은 경제 규모만 그렇다 뿐이지 삶의 질은 형편 없다. 나라는 부자여도 국민은 힘들게 살아간다. 자칭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도 빈부격차나 빈곤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부동산 폭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읽고본느낌 2021.05.22

고향은 무겁다

묘한 일이다. 짐을 덜 줄 알고 환영했는데 결국은 무거운 짐을 더한 꼴이 되었다. 인간 세상에서 앞날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좋아서 기뻐하다가 눈물을 흘리게 되고, 슬퍼 울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으로 변하는 게 인생사다. 고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고향에 내려가서 사흘을 지냈다. 어머니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뒤라 뒤를 보살펴 드렸다. 그나마 어머니가 꿋꿋하신 게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쳤다. 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處世不求無難].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사진속일상 2021.05.21

마르코복음[1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길을 내며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보시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궁핍하고 굶주렸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읽어 본 적이 없습니까? 에비아달 대제관 때 어떻게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관 말고는 못 먹도록 차려둔 빵을 먹고 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까?" 이어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 마르코 2,23-27 내가 보기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고의적으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한 것 같다. 종교적 규율 속에서 자기 만족에 ..

삶의나침반 2021.05.18

빗속을 걷다

비 내리는 산길은 적막하다. 원래 뒷산을 찾는 사람이 드물기는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인적이 끊겼다.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걷는 느낌도 괜찮다. 비가 오면 어지간해서는 바깥출입을 삼가는데 이젠 생각을 달리 해야겠다. 길에는 아까시 향기가 그윽하다. 비가 오니 더 진해진 것 같다. 비를 이기지 못해 떨어진 아까시꽃은 길을 덮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는 억지가 없다. 반면에 자연에 반하는 역리(逆理)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주문을 걸 듯 중얼거리며 걷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1시간 반 정도 마을과 뒷산 언저리를 산책한 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에 흠뻑 젖은 운동화를 빨아서 베란다 창가에 세워두었다. 며칠 햇볕을 쬐고 나면 보송보송해진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겠지.

사진속일상 2021.05.17

문 닫으면 곧 깊은 산

몇 해 전 봄에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 간 적이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사랑방에 걸린 편액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선생이 직접 쓴 글씨가 소박한 나무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杜門即是深山" "문을 닫으면 곧바로 깊은 산 속이 된다"는 뜻이겠다. 글씨 옆에는 '丙辰榴夏 午睡老人'이라 적혀 있는데, 병진년은 1976년으로 선생이 회갑이 되던 해다. 오수노인(午睡老人)은 선생의 호로 '낮잠 자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떠나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선생의 생각이 묻어 있는 글씨다. 요사이 이 글씨가 자꾸 떠오른다. 두문의 문(門)이 집의 현관문은 아닐 것이다. 응당 '마음의 문'으로 봐야 하겠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어떤 의미일까. 세상 속에 살면서..

참살이의꿈 2021.05.16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요즘은 혼자만 있을 때가 잦아졌다 나 홀로 느긋하게 온갖 생각의 안팎을 떠돈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보거나 내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가 잦다 빈 집에서 빈 방 가득 생각들을 풀어내다 거둬들이다 하면서 나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좋아졌다 혼자 마신 술에 젖어 술이 나를 열어주는 길을 따라 나 홀로 유유자적 거닐 때가 좋다 적막이 적막을 껴입고 또 껴입으면 혼자 그 적막을 지그시 눌러 앉히곤 한다 눌러 앉혀 다독이면 그윽하게 따뜻해지는 적막이 좋다 나 홀로,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대상포진 걸린 지가 세 주가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포진이 생긴 얼굴은 전류가 흐르는 듯 지릿지릿하다. 마치 폭격을 당한 느낌이라 '포진'의 '포(疱)'가 나에게는 '포(砲)'로 읽힌다. 근 한 ..

시읽는기쁨 2021.05.11

정약용의 여인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여인의 시중을 받았고 딸까지 낳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여인의 이름은 진솔이고 딸은 홍임이다. 다산이 18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마재로 돌아올 때 진솔과 홍임도 동행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다산에게 소실이 있었다고 해서 그분의 학문이나 인격에 흠이 되지는 않을 텐데, 후학들이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쉬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에 흥미를 느끼던 차에 찾아본 책이 최문희 작가의 소설 이다. 소설에는 다산의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부인인 혜완(惠婉), 그리고 유배지에서 만난 진솔과 홍임의 이야기가 얽혀서 나온다. 혜완은 명문가의 따님으로 다산보다 한 살 위였다. 혜완은 선비집 안방마님으로서의 위엄..

읽고본느낌 2021.05.09

50년 전

* SNS의 고등학교 동창방에 대학 원서 쓰던 때의 얘기가 여럿 올라오고 있다. 나도 거기에 한 마디를 보탠다. 대학 원서 마감 사흘 전에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지원 대학을 결정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나는 서강대 공대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 사대였다. 당시에 이과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던 학과는 공대 전자공학과였다. 나는 서울대 공대 갈 실력은 안 되고 차선책으로 서강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실력으로 서강대 공대 전자공학과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생일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생활기록부의 학부모 희망사항란에는 초, 중, 고 모두 초지일관 '교사'라고 적혀 있다. 나 역시 교직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

길위의단상 2021.05.08

억지로 뒷산

졸지에 5kg이나 늘어난 난감한 몸을 일으켜 뒷산으로 향했다.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몸이 망가질 것 같다. 지금도 거울 앞에 서면 배불뚝이 노인의 모습이 가관이다. 배낭도 카메라도 놓아둔 채 휴대폰 하나만 들고 오른다. 천천히 걸으니 호흡이 가쁘긴 하지만 그런대로 올라갈 만하다. 산은 어느새 녹색의 나뭇잎으로 풍성하다. 산바람이 시원한 걸 보니 벌써 여름이 가까워졌나 보다. 산에 드니 계절의 변화가 실감 난다. 자연에 둘러싸인 몸과 마음이 평온하다. 집에서 나오는 결단을 내리길 참 잘했다. 사람 없는 산길은 호젓하며 고요하다. 이런 길을 걸으면 잠시나마 마음도 그리 닮을 것이다. 산정 나무 의자에서 오래 쉬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점은 수시로 모양을 바꾸면서 남쪽으로 사라진다. 처음 들..

사진속일상 2021.05.07

+5kg

보름 동안에 몸무게가 5kg이 늘었다. 대상포진이 준 선물이다. 이번 대상포진은 특이한 게 엄청나게 허기가 지고 엄청나게 잠이 왔다. 걸신들린 듯 먹었고, 낮밤 없이 잠을 잤다. 그 결과 몸무게가 최고치를 찍었다. 대상포진 전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식(小食)이었다. 아침에 누룽지죽, 점심은 밥 반 공기 정도, 저녁은 야채주스 한 잔이 고작이었다. 그게 속이 편하고 좋았다. 육체 활동이 많지 않으니 그 정도 음식이면 넉넉하다고 믿었다. 몸도 가뿐하고 좋았다. 그런데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크게 피곤한 일도 없었는데 대상포진에 걸리고 면역력이 약해진 것은 평소 식사량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한다. 아내를 비롯해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상포진에 걸리니 몸이 마구 음식을 ..

길위의단상 2021.05.06

다읽(10) - 좀머씨 이야기

20년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좀머씨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좀머씨에 연민을 느끼면서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씨의 외침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내 마음 상태가 좀머씨와 닮은 바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는 좀머씨 개인의 불행보다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서 더 비중 있게 읽힌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 따스하게 읽힌 이야기였다. 특히 화자와 관련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재미있고 공감이 되었다. 두 개의 에피소드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카롤리나와, 미스 풍켈이라는 피아노 선생님에 관계된 일화다. 둘 다 어떤 상실감과 관련되어 있다. 잔뜩 기대했던 카롤리나와의 만남이 깨진 허전함, 그..

읽고본느낌 2021.05.05

마르코복음[12]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했다. 사람들이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어째서 당신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혼인잔치 손님들이 단식할 수 있습니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 그 날에는 단식할 것입니다. 아무도 헌 옷을 생베 조각으로 깁지 않습니다. 그러면 새 헝겊이 헌 옷을 잡아당겨 그 옷이 더 고약하게 찢어집니다. 또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그러면 포도주가 가죽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가죽부대도 못 쓰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는 법입니다." - 마르코 2,18-22 좋은 신앙심의 ..

삶의나침반 2021.05.04

넓어지는 텃밭

처음에는 한 이랑만 만들었다. 재미 삼아 고추와 상추만 심는다고 했다. 그런데 흙을 만지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기나 보다. 옆으로 넓혀나가더니 어느새 세 이랑이 되었다. 고추, 상추 외에 가지, 고구마, 파, 호박이 추가되었다. 텃밭은 아내의 일로 정했으니 나는 지켜보기만 한다. 시내에 나가 퇴비를 사 오거나 무거운 것을 들 때 힘을 보탤 뿐이다. 어쨌든 아내는 텃밭 만드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나는 일은 안 해도 가끔 들러서 지켜보는 재미도 괜찮다. 앞으로 아내의 경작 욕구가 얼마나 더 뻗어나갈지 살짝 궁금해진다.

사진속일상 2021.05.03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붉은머리오목눈이'를 알게 된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이름을 불러주게 되다니,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자책이 되었다. 이 동시에 나오는 '비비새'가 붉은머리오목눈이다. 또는 '뱁새'라고도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에 나오는 바로 그 뱁새다. 살펴보니 비비새, 즉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자주 눈에 띈다. 얼굴이 통통한 게 무척 귀엽게 생겼다. 대체로 갈대 덤불 속에서 무리를 지어 지낸다. 그런데 여기 묘사된 비비새는 특이하다. 혼자서 그것도 전봇줄 위에 있는 경..

시읽는기쁨 202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