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36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곡성'에서 효진이 아빠에게 절규하며 부르짖는 말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 남아 있는 건 이 한 마디밖에 없다.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경찰인 종구는 악귀가 든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건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딸을 돕는다는 게 오히려 더 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악마와 한 편인 무당을 불러 굿을 해서 효진을 괴롭힌다. 마지막에는 딸을 살릴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만 좋았을 뿐 현상의 이면을 볼 줄 몰랐던 종구는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한다. 효진의 "뭣이 중헌디?"라는 외침이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종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열심히 산다는 게 결국 악의 세력에 복무하는 결..

참살이의꿈 2016.08.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되는 입구에서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게 있다. 나이 든다고 절대 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더 철딱서니가 없어지고 옹졸하게 된다. 그런 내 꼬락서니를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 서글픈 일이다. 몸이 쇠약해지는 건 차라리 괜찮다. 나이가 들면 원숙해지고 인격도 높아질 거라 생각한 건 젊었을 때의 착각이었다. 퇴직 이후의 삶을 연상하면 우선 여유가 떠올랐다. 시간의 여유와 함께 당연히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관용과 이해, 그리고 흘러가는 세상을 관조하는 힘은 노년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친구는 별로 없다. 늙으면서 가장 경계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되는 일이다. 인생의 경험이 옹고집으로 변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자기 세계에..

참살이의꿈 2016.08.03

평상심

중국 바둑 기사 중에 스웨(時越) 9단이 있다. 1991년 생으로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이다. 지금은 랭킹이 좀 떨어졌지만, 전에는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기사 킬러로 유명하다. 삼성화재배였던가 큰 번기 승부를 할 때 스웨 9단에게 기자가 물었다. 대국 사이에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스웨 9단은 를 읽으며 마음을 다스린다고 대답했다. 그 말이 무척 인상 깊어서 기억에 남아 있는 기사가 스웨 9단이다. 스웨 9단이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 바둑의 본질은 무엇인가? "의 논리가 바둑과 비슷하다. '변화'가 의 초점이자 바둑의 핵심이다." - 마음에 남는 다른 책은? "와 이다." - 스스로를 '싸움꾼'으로 묘사한 적이 있..

참살이의꿈 2016.07.19

진리의 역설

오래된 노트를 열어보다가 메모해 둔 찰스 비어드의 글을 보았다.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미국의 역사학자로 역사 연구에 있어 객관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현대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학파인 상대주의 사관을 만든 사람이다. 이 사관은 역사 연구에서 완벽한 과거 복원을 불가능하고,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이 필연적으로 개입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찰스 비어드는 평생 역사를 연구해서 '진리의 역설'로 불리는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1. 하느님은 멸망시킬 자에게 권력을 줘 날뛰게 한다. 2. 심판의 맷돌은 더디게 돌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간다. 3. 벌은 꿀을 도둑질해서 꽃을 피운다. 4.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

참살이의꿈 2016.07.06

목표 지향의 삶

근대화가 한창일 때는 목표 지향의 삶이 찬양받았다. 국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지도자가 군인 출신이어선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지배한 시대였다. 그때는 개인의 삶도 비슷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그래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건 사실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쟁 중심의 피로사회는 그 시절이 남긴 쓴 유산이다. 아직도 6,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몸은 어른으로 성장했는데 아직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꼴이다. 목표를 중시하는 결과주의 사회는 자아 실현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집단주의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집단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온상이면서 개인적으로는 불행의 씨앗이다. 목표를 중시하게 되..

참살이의꿈 2016.06.13

자유죽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한들 실제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 이렇게 외치게 시켰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어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연사보다는 태반이 이런저런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옆에서도 힘든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싶다. 그럴 때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죽느냐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몇 해 전에 본 인도 영화 '청원'이 생각난다. 전신마비가 되어 마지못해 살아가는 전직 마술사인 주인공은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법원에..

참살이의꿈 2016.05.30

가늘고 길게

굵게 사는 삶은 꿈꿔 보지 않았다. 거창한 꿈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초등학교 학적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장래 희망은 내리 교사가 적혀 있었다. 부모 희망란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그런대로 했으니 의사나 판사를 시켜볼 만도 했건만 아버지는 오로지 교사 되기를 바라셨다. 대학생 때 고시 공부하던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도 나를 잘 파악하고 계셨다. 요사이는 교사 되기가 어렵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교사가 부족해서 단기 양성 과정도 있었다. 남자가 교사를 희망하면 졸장부 취급을 받던 때였다. 어릴 때부터 내 기본 마인드는 적게 먹고 적게 싸자 주의였다. 나는 햄릿형이다. 소심하다. 사상체질로는 소음인에 속한다. 가늘게 살 팔자다. 당연히 굵고 짧게 사는 걸 부러워하지 않는다. ..

참살이의꿈 2016.05.17

외로움이 필요한 시대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면 정신이 튼튼해지지 못한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이 밖에서 위안을 찾는다. 전철에 타 보면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심심한 걸 견디지 못한다. 아무 목적 없이 스마트폰을 연다. 기갈에 시달리는 사람들 같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허전해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다. 스마트폰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현대인이 혼자 있을 때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안다. 외로워야 할 권리를 스스로 반납하고 있다. 그러면서 혼자 놀 줄 모르는 무능력자가 되어 간다. 어른만 그런 게 아니다. 식당에 가 보면 어린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부모가 많다. 만화영화에 빠져서 얌전해지기 때문이다...

참살이의꿈 2016.05.09

열정

도전과 열정을 외치며 젊은이들을 닦달하지 마. 소수의 성공담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이것 아니면 못 살아, 라는 필생의 과제를 발견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런 꿈이 있으면 좋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는 그렇지 못해. 차라리 각자의 방식대로 살도록 가만 내버려 둬. 너도 빨리 사다리를 기어오르라고 부추기지는 마. 제발. 그보다는 세상의 생태 구조를 가르쳐 줘. 약육강식의 먹이 피라미드를 보여 줘. 이 세상이 아름답고 살 만하다고 헛소릴랑은 하지 마. 무슨 시스템이든지 추종자가 없으면 작동되지 않아. 저들은 그게 두려운 거지. 그러니 욕망의 만족을 미끼로 네 넋을 빼앗아 가는 거야. 열정을 가지라고 외치는 거야.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위한 열정인지 고뇌해야 해. 젊음의 패기란 그런 것이지. 덩달아 ..

참살이의꿈 2016.04.29

다 공부지요

차례를 지내기 위해 지방을 쓸 때 '학생(學生)'이라는 글자에서는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학사금이 없어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의 한이 생각나서다. 돌아가셔서야 '학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생'이 벼슬을 하지 못한 망인에게 붙인다지만 의미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다. 꼭 학교에서 배우는 게 공부가 아니다. 삶이 곧 공부인 것이다. '학생'이라는 말에는 인생을 배우는 과정으로 보는 유교의 관점이 들어 있다. 학(學)은 도(道)나 각(覺)보다 훨씬 친근하고 가깝다. 도나 각은 아무나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삶을 통해서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학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살아서도 학생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학교의 학생인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

참살이의꿈 2016.04.17

아무래도 괜찮아

늙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라고 젊었을 때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보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늙으면 늙은 대로 맛이 있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알아챌 수 없다. 인간은 적응력이 무척 뛰어난 동물이다. 몸이 아파도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나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떨어지고 다리 힘이 없어지면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한다. 어디든 쏘다닐 수 있는 젊은이로서는 불쌍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면 다니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니 멀리 못 나가도 아무렇지 않다. 동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 대신에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 좋게 말하면 관조의 편안함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청춘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별로 내세울 게 아니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

참살이의꿈 2016.03.31

시시하다

시시포스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큰 바위를 죽을 힘을 다해 산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바위는 저절로 산밑으로 굴러내린다. 그러면 다시 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영원한 형벌이다. 시시포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통과 절망 속에서 비탄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시시포스는 아마 인생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아챌 때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인생을 장밋빛으로 낙관할 때 고통은 고통이 된다. 삶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면할 때 살아낼 힘이 생긴다. 시시포스의 힘이다. '시시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단한 데가 없어서 보잘것없다'로 나와 있다. 그렇다. 인생을 시시하다고 보는 데서 시시포스의 힘이 생긴..

참살이의꿈 2016.03.14

재미와 의미

재미와 의미, 둘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로 인생관이 달라진다. 한쪽 극단에 쾌락주의가 있고, 다른 쪽 극단에 금욕주의가 있다. 한쪽에서는 인생은 재미가 우선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어떤 즐거움도 의미가 없으면 헛것이라고 말한다. 재미가 있으면서 동시에 의미도 있는 일이라면 금상첨화다. 불행하게도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은 둘 중 하나만 갖추어져도 만족한다. 최악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한탄이 나오는 경우다. 그러나 살면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거리는 많이 있다. 힘들게 일해도 돈 버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풍찬노숙을 할지라도 이 세상을 위해 고귀한 일을 한다는 자부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중간지대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참살이의꿈 2016.02.26

헐렁한 게 좋아

몇 주 전에 아내가 겨울 티셔츠를 사 왔다. 색깔이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사이즈가 95라고 포장지 비닐에 적혀 있어 더 확인하지 않은 채 라벨을 떼어버리고 옷장에 걸어두었다. 95나 100이면 내 몸에 잘 맞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옷을 꺼내 입으니 헐렁한 게 너무 컸다. 그제서야 옷에 붙은 사이즈를 보니 105였다. 포장지 표시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미 교환할 수도 없게 된 상태라 그냥 입기로 했다. 목에는 주먹 하나가 들락거리고 허리 부분은 몇 겹이나 주름이 졌다. 다행히 겨울 티셔츠라 겉옷 안에 숨어서 볼품을 따지지 않아도 되었다. 전에는 꽉 조이는 옷을 즐겨 입었다. 이 옷은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은 없지만 굉장히 편안하다. 한복을 왜 편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아마 ..

참살이의꿈 2016.02.16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국민교육헌장이 나온 게 1968년 12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1968년은 북한에 의한 청와대 습격,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져 남북관계가 최고로 긴장 상태였던 해였다. 그리고 박정희 장기 집권의 시작이었던 삼선 개헌의 전해였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개인의 자유나 행복보다 국가 발전을 우선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중간에 나오는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라는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공익', '질서', '능률', '애국', '애족'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권리보다는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국민교육헌장에 담긴 기본 이데올로기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반공이라고 ..

참살이의꿈 2016.01.29

퇴직하는 후배에게 주는 충고

퇴직 시즌이 다가왔다. 교육계는 학기제로 움직이므로 교사는 2월과 8월에 전근과 퇴직이 이루어진다. 내 주변에도 명퇴 신청을 한 사람이 몇 있다. 재수, 삼수까지 한 사람들인데 이번에는 무난히 커트라인 안에 들 것 같다. 정년 전에 그만두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자의로 나오지만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가 보다. 얼마 전에 만난 후배도 일 없이 어떻게 인생을 재미있게 보낼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뭔가를 열심히 배우고 동호회에도 가입해 바쁘게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말한다. 지금껏 일에 매여 살았으니 이제는 나를 얽어매는 일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바쁘게 살았으니 게을러질 필요가 있다. 지금껏 재미있는 것만 찾..

참살이의꿈 2016.01.19

사람도 다 썩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서 어느 사진작가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 분은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국화빵 장사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자에게 한 말 중 뼈 아팠던 게, "한국은 나라만 썩은 게 아니라 사람도 다 썩었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었다. 이 분은 일본에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고 한다. 주변에서 한국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20년 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실제 마주친 한국은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었다. 일본은 가지지 못한 자의 설움이 한국보다 훨씬 덜하다고 한다. 월세 산다고 서럽지 않다. 주인에게 비굴할 일도 없다. "모두가 썩었다"는 표현이 충격적으로 들렸다. 썩은 물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썩은 줄을 모르는 법이다...

참살이의꿈 2015.12.26

부끄러운 손

내 손은 여자처럼 작고 곱다. 신동문이 말한 '야위고 흰 손가락' 그대로다. 스스럼없는 사람은 악수할 때 놀리듯 말한다. "남자 손이 이렇게 곱다니, 쯧쯧" 그래서 악수하는 게 싫다. 남자의 크고 투박한 손에 갇히면 한방에 제압당하는 기분이다. 모임에 나가면 도착하는 순서대로 일제히 악수를 하게 된다. 고역이다. 나는 통로에서 멀찍이 자리 잡고는 손 흔들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때도 가능하면 핑계를 대고 악수를 피한다. 못난 손을 의식하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렸을 때는 작고 흰 손이 자랑스러웠다. 공부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노동과 거리가 먼 손이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채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유약한 백면서생이라는 증거..

참살이의꿈 2015.12.16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

종편 MBN의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를 가끔 본다. 이번 주의 제목이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었다. 여느 분과 마찬가지로 삶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산속에 들어가 혼자의 행복을 찾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이 성대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과연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도시의 빈털터리라면 먼저 노숙자가 떠오른다. 빈털터리란 재산도 수입도 없는 사람이다. 도시에서 돈 없이,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빈털털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산속에서 홀로 살아간다. 욕심을 버리니 행복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남과 비교하며 경쟁을 시키는 시스템 속에서는 평상심을 지키기 어렵다. 빈..

참살이의꿈 2015.12.11

되면 한다

'하면 된다'라는 정신이 온 나라를 휩쓸었던 시대가 있었다. 사회가 온통 군영 같았을 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구호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공격적인 언어였다. 군대에서 고문관 노릇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하면 된다' 정신이 이룬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 두드러졌다. 한강의 기적도 이런 억척스러움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빨리빨리' 같은 조급증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새겨져 있다. 김재규가 권총으로 박정희를 겨누며 내뱉은 말도 그랬다. "저도 한다면 합니다." 도전 정신을 나무랄 수는 없다. 특히 젊은 시기에는 바위를 뚫을 만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 해 보지도 ..

참살이의꿈 2015.11.27

상어가 사람이라면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상어가 작은 물고기들에게 더 잘해줄까요?" K씨에게 주인집 여자의 딸아이가 물었다. 그는 "물론이지." 하고 대답했다.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을 위해 바닷속에 거대한 우리를 짓도록 할 거야. 그 안에는 식물은 물론 동물까지 포함한 온갖 종류의 먹이를 넣어놓겠지. 상어들은 그 우리 안의 물이 항상 신선하게 유지되도록 할 것이고 온갖 위생 관리를 할 거야. 가령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다칠 경우 즉시 붕대를 감아주겠지. 잡아먹기 전에 때 이르게 죽어나가면 안 되니까 말이야. 작은 물고기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가끔씩 커다란 수중 축제가 열리기도 할 거야. 우울한 물고기보다는 기분 좋은 물고기가 맛이 있거든. 그 커다란 우리 안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이 학..

참살이의꿈 2015.11.18

누가 듣는다

입주해서부터 신경을 쓰게 하는 게 윗집 소음이다. 밤 12시가 넘도록 잠을 못 들게 되면 부처님이 아닌 한 울화가 치미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나마 이젠 많이 적응되었고, 윗집 아이들도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니 소음도 많이 줄어들었다. 몇 주간 평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잔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실감한다. 그런 어느 날 기뻐서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요사이는 윗집이 조용하지? 참 고마운 사람들이야.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웬걸 바로 그날 밤에 천정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며 내 가벼운 입방정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과학적으로는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허투루 생긴 것도 아닐 것이다. 돌아보면 자신 있..

참살이의꿈 2015.11.08

나는 개인주의자다

아내한테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두 딸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불만인 것 같다. 이기주의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 나와 있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기주의자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배려가 부족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건 억울하다. 사고나 행동의 중심에 나를 두고 있지만 결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내가 소중한 만큼 타자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내가 간섭받기 싫은 만큼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각자가 독립된 인격체다. 가족 사이라도 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기..

참살이의꿈 2015.10.27

좋은 세상

지난달에 영국으로 연수를 간 조카가 외국 생활의 일면을 가끔 전해준다. 런던에 방을 얻고 세간살이를 장만하는 것부터 한국과 비교하면 너무 늦어 불편하다고 하소연이다. 인터넷을 신청했더니 일주일 만에 와서 설치해 주더란다. 너무 느린 나라에 오니 적응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게 사는 한국 사람이 불쌍해 보이더라고 말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음지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보인 것이다. 얼마 전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보험회사에 연락했다. 기계음이 들리면서 위치 추적을 허용하시겠느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10분 뒤에 바로 기사가 도착했다. 있는 곳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신속 정확도 좋지만 너무 잽싸니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 제일이라고 할 만하..

참살이의꿈 2015.10.07

염치

염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한다. 내 경우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때가 많다. 바깥 경치를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중에 옆에서 들리는 소음은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긴급한 연락도 아니고 잡담 수준의 통화를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계속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의 사생활 얘기를 억지로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의식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자기만 아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 없다고 말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염치 없는 자가 항상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일 수도 ..

참살이의꿈 2015.09.21

귀엽게 나이 들기

나이가 60이 넘어도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어떨까? 얼마 전의 일이다.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나한테 귀엽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어리벙벙했지만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분은 형님뻘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전에 학교에 있을 때는 코흘리개 아이들한테서도 그런 소리를 가끔 들었다.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난감했다. '귀엽다'는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단어다. 어렸을 때는 은근히 자랑스러웠지만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뭔가 모자라고 덜 떨어진 인간이 된 듯하여 주눅 들기 일쑤였다. 하물며 어른이 되어서는 오죽하겠는가. '멋있다'거나 '남자답다'는 말은 나에게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런데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한 친구로부터 살짝 그..

참살이의꿈 2015.09.11

삼관

노년 행복의 조건이 '삼관'이라고 한다. 삼관은 관절, 관계, 관심거리다. 즉, 튼튼한 관절, 원활한 대인관계, 즐거운 관심거리가 있어야 노년의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관절이 튼튼하다는 건 본인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다는 걸 뜻하니 넓게 말하면 건강하다는 뜻이다. 관절에 이상이 없어도 병석에 누워 있다면 아무 소용 없다. 어느 경우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즐거움의 반은 포기한 셈이다. 나는 특히 걷기와 산을 좋아하니 행복의 조건으로 관절을 드는 데 주저함이 없다. 가고 싶은 산을 다리 때문에 못 간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불행해질 것 같다. 그래서 미래를 위하여 산길을 걸을 때는 조심한다. 특히 내려갈 때는 발을 세게 디디지 않도록 한다. 스틱이 없더라도 주의만 한다면 크게 문제..

참살이의꿈 2015.08.29

[펌] 청년 전쟁

이오덕 선생의 옛글 여느 구석엔 권정생 선생과 조우한 순간이 적혀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동화작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권정생은 이오덕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 하지만 평생 온몸에 퍼진 결핵과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하루 30분도 앉아 일하기 어려운 날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누구보다 맑고 강렬하게 사유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의 안동집에서 한담을 나누던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까 뱀이 방에 들어왔어요.” “마당의 잡초를 그냥 두시니까 뱀이란 놈이 방 안과 밖을 구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독사면 어쩌시려고요.” “독사는 방에 안 들어와요.” “그런가요.” 다녀와 그쪽 전문가에게 물었더..

참살이의꿈 2015.08.14

혼자 노는 즐거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더 큰 즐거움은 혼자 놀 때 찾아온다. 옛사람이 말하는 독락(獨樂)의 즐거움이다. 늙어서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누구나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관계에 매달리면 자신에게 소홀해진다. 밖으로 향하는 재미는 더 많은 자극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르다가는 늘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주위의 친구보다는 내가 나의 벗이 되어야 한다. 오직 담담할 뿐이다. 노자가 말한 무미지미(無味之味)야 말로 참맛이다. 홀로 책을 읽고, 홀로 산길을 걷는다. 이보다 더한 충만이 없다. 풀, 나무, 구름, 바람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진정으로 고독한 자는 외롭지 않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편안하다. 마음이 분주하지 않다. 고독을 찬양하는 문화는 사라졌다. 스마트폰은..

참살이의꿈 2015.07.21

호기심

8개월 된 손자는 이제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작은 몸이 나아가는 목표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의 눈이 꽂히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TV 리모컨 같은 전자기기라는 게 신기하다. 특히 리모컨만 보면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이 된다. 몸이 굳어지고 돌진한 태세를 갖춘다. 희한하다. 검은 직사각형 플라스틱 막대기의 무엇이 아기를 사로잡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지는가 보다. 손주를 지켜보면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징이 호기심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일부 영장류의 새끼도 주변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기의 눈은 세세하게 주위를 스캔하는 카메라 같다. 낯선 것..

참살이의꿈 201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