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36

유유히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12월 3일 이전에 고른 것이지만 묘하게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맞아떨어졌다. 어제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이 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광란의 칼춤'을 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만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8년 전의 촛불 시위와 달리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많이 나왔다. 정치에 무관심한 MZ세대라고 폄하했었는데 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축제 마냥 즐기는 그..

참살이의꿈 2024.12.15

사라진 아이들

작년 여름에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마존 정글 지대에 경비행기가 추락했다. 배행기에는 세 명의 성인과 네 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하는 데 2주가 걸렸는데 파손된 비행기에는 아이들의 어머니를 비롯해 세 명의 성인 사체가 있었다. 아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열세 살(여), 아홉 살(남), 네 살(남), 한 살(여)짜리 남매들이었다. 콜롬비아 군과 원주민을 중심으로 수색대가 조직되어 아이들의 생존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에 나섰다. 40일간의 수색 끝에 생존해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추락 지점에서 직선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아이들은 맹수, 독사, 독충이 우글거리는 열대밀림에서 40일을 견디어 냈다. 한 살짜리 막내도 살아 있었는데, 수색대는 막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

참살이의꿈 2024.11.23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나갈 한국 대표를 뽑는 본선이 어제 있었는데 81세의 최순화 씨가 베스트 드레스상을 받았다. 올 가을에 열리는 세계 대회에 나갈 대표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미스 유니버스에 도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1943년생인 최순화 씨는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어느 환자의 권유로 모델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74세 때였다.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하는 나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최 씨의 목표는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 32명이 겨루는 본선까지 오르면서 주목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한국 대표가 되지는 못했다. 만약 세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지구촌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특별한 ..

참살이의꿈 2024.10.01

'3노'를 경계한다

공자는 나이 일흔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무엇을 삼가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을 게다. 보통 사람에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다.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매사를 살피면서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인간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다. 늙으면 '3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3노'의 첫 번째는 노여움이다. 늙으면 괜히 서러워지면서 화가 생기기 쉽다. 세상의 중심이었다가 변방으로 밀려난 소외감이 원인일 것이다. 전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니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이 든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다. 기대심을 내던지지 못하면 노여움..

참살이의꿈 2024.09.21

그때가 좋은 거야

추석이 다가왔다. 고향에 노모가 계시니 명절이 되면 찾아뵙는 문제로 고민한다. 동생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니 명절이 되면 근심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 올 추석은 내가 내려가야 할까 보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친구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찾아오는 자식들과 단출하게 추석을 보낸다. 연휴를 이용하여 가족이 함께 놀러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일순위가 어머니이니 자식들과의 만남은 뒤로 미루어진다. 지난 몇 차례는 동생이 어머니와 있어준 덕분에 예외가 있기는 했다. 어제 친구들 모임에서 추석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노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경우는 나밖에 없었다. 언제 내려가고 언제 올라올지 교통 정체도 걱정이다. 이런저런 넋두리를 ..

참살이의꿈 2024.09.13

속물들의 세상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쓰는 말도 달라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자주 썼는데 지금은 빈도가 확 떨어진 말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물'이다. 전에는 "속물 같은 놈"이라고 흔히 말했는데 요즘은 좀체 듣기 어렵다. 과연 속물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속물(俗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속물근성(俗物根性)이라는 말도 있는데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이다. 속인(俗人)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人) 대신 물(物)이 붙으면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속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모욕을 느낄 만하다...

참살이의꿈 2024.08.21

슬픔의 나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천국에는 커다란 슬픔의 나무가 있는데 천사가 사람들을 이 나무 아래로 데리고 와서 말한다."자, 이제 너의 슬픔과 고통의 옷을 벗어 이 나무에 걸어 놓아라."사람들은 천사가 말하는 대로 자신이 가진 슬픔의 옷을 벗어 나무에 걸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말한다."이제 다른 사람이 벗어놓은 옷을 골라 가져 가거라. 자신이 나뭇가지에 건 것보다 덜 슬프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자신의 것과 바꿔도 된다."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슬픔의 옷들을 살펴본다.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벗어 놓은 옷이다. 다른 누구의 것보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선택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인생이 그래도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럽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참살이의꿈 2024.08.04

소리를 괴롭히지 말라

위층에는 10년 넘게 올빼미가 산다. 초기보다는 활동량이나 빈도가 줄었지만 한밤중에 들리는 - 밤 11시에서 2시 사이 - 생활 소음은 잠을 못 이루게 하여 괴롭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미리 곯아떨어지는 게 제일이다. 층간소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느냐는 오랫동안 내 삶의 화두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를 괴롭히고 짜증나게 만드는 소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쓴 어느 스님의 글을 보았다. 스님은 명상을 방해하는 소음을 말하고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명상하면서 나는 나에게 묻곤 한다. "어째서 소음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까?" 밖에서 나는 새소리든 누군가가 기침하든, 넒은 홀 문이 쾅 하고 닫히든 어째서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눈꺼풀을 닫아버..

참살이의꿈 2024.07.13

뜻밖의 친절

중앙 현관문을 지나 십여 걸음 앞에 작은 초등학생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나올 거고 아이는 먼저 올라갈 터였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따라갔다. 코너를 돌아가니 웬걸,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라며 미소까지 짓는 것이었다. 뜻밖의 친절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일상에서 이런 친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절은 전염성이 있어서 나도 따라하게 된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주면 내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어떤 친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글에서 가슴 뭉클해지는 대목을 봤다. 작가가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수녀가 된 계기를 들은 내용이다.  "전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참살이의꿈 2024.07.05

절주의 기준

지난 달에 과음을 하고 실수를 한 뒤에 금주를 결심했는데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내 의지를 믿고 절주를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1년 반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금주를 실행했었다. 술을 안 마시면 심신의 모든 면에서 이득이 많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 노년이면 안 그래도 정든 것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데 술까지 억지로 빼낸다는 것은 - 너무 야박한 일이라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절주의 기준은 집에 들어왔을 때 술 마신 걸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름 정해두고 있다. 주량으로는 대략 소주 한 병 정도다. 그 이상이 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 어제 모임에서도 그 정도에서 끝냈고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

참살이의꿈 2024.06.28

행복이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다.터키의 한 시인이 화가 친구에게 행복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화가 친구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든 한 가족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얼마나 가난한지 천정에서는 비가 새고 있고, 침대의 한쪽 다리도 부러져서 벽돌로 받쳐 놓았다. 그런데도 부부와 여섯 자녀들은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침대 위에는 개와 고양이도 끼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옹기종기 어울려 같이 자고 있다.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행복은 문제가 없는 것에서가 아닌, 문제가 있는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나쁘더라도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곳에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세요. 당신이 통제할 수 없..

참살이의꿈 2024.06.15

신의 연주에 끼어들지 말라니까

"농담 하나 듣겠나. 아인슈타인이 죽고나서 눈을 떠보니 천국이었지. 자기 바이올린도 있었어. 그는 기뻤지. 바이올린을 사랑했거든. 물리학보다 여자보다 더. 천국에서 연주 실력은 어떨지 알아보고 싶었어. 바이올린을 조율하는데 천사들이 급히 그에게 왔어.- 뭐하는 건가?- 연주하려고요.- 관두게. 신께서 싫어하실 거야. 색소폰 연주자시거든.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멈췄어. 그런데 높은 곳에서 색소폰 연주가 들려와. 아인슈타인은 생각했지. 신과 함께 연주하겠어. 우리 합주는 근사할 거야. 그러고는 그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색소폰 연주가 멈추고 신이 나타났어. 신은 아인슈타인에게 다가와 사타구니를 뻥 찼어. 그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바이올린도 박살났지. 아인슈타인이 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는데 천사가 와서 말했지.- 우..

참살이의꿈 2024.05.26

홍세화 선생의 마지막 당부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자 활동가였던 홍세화 선생이 지난 1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였다. 선생은 1970년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에 망명했다가 라는 책을 내며 일반에 알려졌다.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똘레랑스'라는 말을 이때 처음 접했지 않나 싶다. 그 뒤 귀국해서 저술과 강연, 정치 등 너무 물질적으로 경도되는 우리 사회를 경고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20년 전 쯤 선생을 강연장에서 뵀던 기억이 난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주최한 강연회였는데 잠실에 있는 여성회관에서였다. 교사들 대상이었으니 강연 주제는 한국 교육의 현실 진단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프랑스 교육 제도와 비교하면서 아동 학대에 다름없는 우리의 입시 체제를 비판하면서 교육 운동을 격려했다. 그때 ..

참살이의꿈 2024.04.21

인생은 독고다이

"여러분, 인생은 혼자입니다. 마음 가는대로 사십시오. 여러분을 누구보다 아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여러분 자신이고, 누구의 말보다 귀담아 들어야 하는 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마세요. 누군가 멋진 말로 나를 이끌어주길, 나에게 깨달음을 주길, 내 삶이 더 수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세요. 그런 사람들 무리의 먹잇감이 되지 마세요. '인생 독고다이다' 생각하고 쭉 가세요." 지난달에 이효리 씨가 국민대 졸업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전한 인생 조언이다. '독고다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대로 직설적이면서 소탈한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한다.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 후배들을 위한 연설이었지만 7학년인 나는 내 식..

참살이의꿈 2024.03.20

죽음을 결정할 권리

며칠 전에 MBC 'PD 수첩'에서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소개하며 인간에게 죽음을 결정할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었다.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면 죽음을 결정할 권리도 달라는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프로그램에서는 척수염과 어지럼증을 앓는 두 분이 나온다. 그중 한 분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한 뇌염과 척수염으로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환상통에 시달린다. 생을 마감하려고 스위스 조력사망 센터를 알아봤으나 포기했다고 한다. 스위스에 가자면 다..

참살이의꿈 2024.03.09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

이근후 선생의 5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사 제목에 나온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1935년생이니 지금은 9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선생은 건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 쓰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계시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고달프고 행복은 신기루다. 쉽게 사는 사람은 없다. 겉모습은 화려할지라도 속내는 누구나 쓰라리다. 다만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아갈 뿐이다. 원한이나 분노, 불안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작은 재미로 덮어둔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슬픔을 잊고 가능한 한 재미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조다. 평생을 인간의 아픔과 마주한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한 귀결일..

참살이의꿈 2024.02.21

우울한 한국

미국의 인기 작가이자 유튜버인 마크 맨슨이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가 '우울한 한국'이라는 주제로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되어서 찾아보았다. 마크 맨슨이 내린 진단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종합적으로 짜깁기해 놓은 느낌이 들었다. 영상 제목이 '나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I Traveled to the Most Depressed Country in the World]'로 자극적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자살률인데 한국은 10만 명당 25명이 자살하여 OECD 국가 중 최고로 높다. 특히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낮은 출생률 또한 우울한 한국을 드러내주는 징표다. 마크 맨슨은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며..

참살이의꿈 2024.02.06

좌통

'좌통(좌측통행)'은 내 어릴 적 별명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다. 처음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기본 생활 지도를 했을 테고, 그중에 좌측통행 교육이 있었다. 복도에서는 뛰지 말고 좌측으로 질서 있게 다니라는 담임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 아이들이니 말을 잘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좀 과하셨던 것 같다. 학교를 나가서도 길을 다닐 때는 좌측통행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 한들 철부지들에게 학교 밖에서까지 통할 리가 없었다. 신작로를 지나 논둑길을 걷고 개울과 철길을 건너야 하는 한 시간이나 걸리는 등하교 길이었다. 교문을 나서면 개구쟁이가 되어 장난하느라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모범이 되어야 할 고학년의 형들은 좌측통행을 아예 무시했다. 그럼에도 예외가 있었..

참살이의꿈 2024.01.06

[펌] 도구적 영성

'영성'은 기독교와 함께 본격화했다. 예수가 떠난 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는 영적(spiritual) 삶을, 개인의 만족, 안락, 성공을 좇은 육적(fleshly) 삶과 대비했다. 자발적 가난, 사유 재산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새로운 세상의 갈구, 인류에 대한 헌신 등은 그들이 구현한 영적 삶의 모습들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부(마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아예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부를 좇는 일을 죄악시했다기보다, 애초에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렇다. 물질적 풍요보다 영적 풍요를 중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의 체제를 외면하지 않고 산다면 부자가 될 방법이 있는가. 1500년 후 예수의 메시지는 도래할 세상(자본주의)에 커다란 걸림돌이 ..

참살이의꿈 2024.01.04

사람을 만나고 오면 쓸쓸해진다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이번 주도 두 차례 송년 모임이 있다. 뜸한 해도 있었는데 올해는 별스럽게 만남이 많다. 사람과의 교류가 적은 편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분들은 어떨까 싶다. 모임을 다녀오면 피곤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피로도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나한테는 어렵고 힘이 든다. 대화에서는 억지로 박자를 맞춰주며 고개를 끄덕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타인과 만나고 접촉해야 활력이 솟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사소한 갈등이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람이 북적이는 데가 좋고,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생기가 돋는다고 하니 신기하다. 나는 혼자 있어야 편하다. 사람과..

참살이의꿈 2023.12.19

그럭저럭과 그러려니

'그럭저럭'과 '그러려니'는 늙어가면서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말이다. 가끔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서로 묻는다. 이때 내 대답은 일정하다. "그럭저럭 지내지 뭐." 늙어서의 일상이란 게 그렇다. 잘 지낸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지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그럭저럭'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반면에 '그러려니'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늙으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을 안팎으로 자주 만난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성에 차지 않고, 몸도 이곳저곳이 고장 난다.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니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여러 달째 손가락과 이빨이 말썽이다. 어느 때부터 양 손의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기 시작했다. 아..

참살이의꿈 2023.11.24

복이 없어 이렇게 오래 살았어요

얼마 전에 A 선배와 노년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몇 살까지 사는 것이 적당할까, 라는 물음이 나왔고 선배는 망설임 없이 85세라고 답했다. 병이 없더라도 그 이상은 살기 싫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노인을 대상으로 한 통계를 보면 100세까지 살고 싶다는 사람이 50%에 달한다. 이에 비하면 선배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일본은 100세까지 살고 싶다는 비율이 20%에 불과하다.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화사회에 들어간 일본은 장수와 고령이 가져다주는 비극을 다수가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TV를 보면 100세를 넘기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슈퍼 노인이 자주 나온다. 이걸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A 선배와의 대화에서도 김형석 선생이 화제..

참살이의꿈 2023.11.12

그냥

들판에서 자라나는 풀꽃을 생각한다. 만약 풀꽃이 말을 한다면 왜 사느냐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풀꽃은 사는 게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며 살포시 웃을 것이다. "그냥"이라는 말이 참 좋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좋을 뿐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면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슨 목적이나 의미가 있어 사는 게 아니다. "그냥" 산다. "그냥" 산다고 자신에게 가만히 속삭여 보라. 나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홀연히 가벼워지는 걸 느낄 것이다. 기쁜 일이 찾아오면 웃고, 슬픈 일이 찾아오면 울면 된다. "그냥" 그렇게 살뿐이다. 지금 좋게 보인다고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 나쁘게 보인다고 나쁜 일은 ..

참살이의꿈 2023.10.06

교양 실종의 세계

대학교에 들어갔던 1학년 때는 '교양 과정'이라고 해서 전공과 관계없이 모든 신입생이 공통된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한 기초 소양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컸다. 교과목도 국, 영, 수 중심의 고등학교 커리큘럼과 대동소이했고, 담임선생만 없을 뿐이지 사실 고등학교와 별 다른 게 없었다. 교과 수준만 약간 올라갔을 뿐이었다. '교양'이라면 이과생이라도 철학이나 인문학을 접하도록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름만 '교양 과정'이었을 뿐, 교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무척 아쉬운 점이다. '교양 과정'은 교양을 단순한 지식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나쁜 명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주간 경향' 칼럼에서 김규항 선생이 쓴 교양에 관련한..

참살이의꿈 2023.09.27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지난달 29일에 열렸던 제77회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축사를 했다. 선배로서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인데 근래 보기 드문 명연설이었다. 최 교수는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모교 생명과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부터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근무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화생물학자다. 이번 축사의 요지는 자기만 잘 살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선생은 "주변은 온통 허덕이는데 혼자 다 거머쥐면 과연 행복할까"라고 반문한다. 가진 자들은 별생각 없이 키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고 공정하다고 하지만 그건 일률적인 공평에 지나지 않는다. 키가 작은 이들에게는 더 ..

참살이의꿈 2023.09.17

인생의 의의와 가치

아주 오래전, 20대 때 본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권이 있다. 대부분 내용은 잊었는데 책의 모양과 제목만은 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책을 샀던 서점과 서가의 풍경까지 떠오른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다. 이 책을 가방 속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맛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어두운 색의 하드 커버 표지에 두께는 얇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1966년에 신조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지은이는 오이켄이라는 독일 철학자였고, 제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제목과 외형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논지를 펼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

참살이의꿈 2023.08.23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가만히 다정하게

장마철과 연관이 있을까. 짜증 나고 화가 솟는 일이 잦다. 이럴 때는 한 호흡 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정하게. 짜증 나는 원인이 밖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상은 어쩌다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핑곗거리였을 뿐. 누구나 위로 받고 사랑 받길 원한다. 고개를 돌려 둘러보라. 누가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줄 것인가. 이 시들어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자. 작고 연악한 어린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지 모른다. 다정한 미소로 다가가서 껴안아주자. 쓰담쓰담 토닥토닥. 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면 타인 역시 연민의 념으로 바라보게..

참살이의꿈 2023.07.25

병원에 안 가려는 이유

일주일 전부터 오돌토돌한 붉은 반점이 팔에 돋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퍼지더니 사흘째에는 다리에도 나타났다. 원인은 모르지만 두드러기인 것 같다. 우선 보기에 엄청 징그럽다. 다행히 간지러움은 심하지 않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면 금방 낫겠지만 그냥 견디기로 한다. 며칠 더 고생하고 병원 신세를 안 지는 쪽을 나는 선택한다. 한 달 전에는 앞니 하나에 이상이 생겼다. 건드리면 아파서 양치질도 피해서 했다. 음식 먹는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치과에 가는 대신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지나니 통증이 가라앉고 많이 진정되었다. 지금도 정상이 아니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아마 치과에 갔다면 깔끔하게 임플란트를 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이빨로 가능하면 버틸 수 있는..

참살이의꿈 2023.07.04

심심함의 변명

나는 외출보다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다. 대략 두 배쯤 된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집에 있고, 10일 정도밖에 나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은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느냐고, 아내가 늘 신기해 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없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퇴직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삶의 관성이란 무섭다. 봉사 활동이든 취미 생활이든 뭔가를 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 속에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은퇴 후에도 바쁘게 보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앗기고 있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전철에서 보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다. 휴대폰이 없..

참살이의꿈 202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