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42

문 닫으면 곧 깊은 산

몇 해 전 봄에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 간 적이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사랑방에 걸린 편액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선생이 직접 쓴 글씨가 소박한 나무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杜門即是深山" "문을 닫으면 곧바로 깊은 산 속이 된다"는 뜻이겠다. 글씨 옆에는 '丙辰榴夏 午睡老人'이라 적혀 있는데, 병진년은 1976년으로 선생이 회갑이 되던 해다. 오수노인(午睡老人)은 선생의 호로 '낮잠 자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떠나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선생의 생각이 묻어 있는 글씨다. 요사이 이 글씨가 자꾸 떠오른다. 두문의 문(門)이 집의 현관문은 아닐 것이다. 응당 '마음의 문'으로 봐야 하겠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어떤 의미일까. 세상 속에 살면서..

참살이의꿈 2021.05.16

어떤 죽음

지인한테서 들은 한 노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자식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 한 자식한테 신세를 지기 싫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녔지만, 모든 자식의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자식들 사이의 관계도 안 좋아졌다. 약간 다리가 불편할 뿐 정신은 말짱했으니 요양원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던 자식들도 차츰 빈도가 뜸해졌다. 노인은 70대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았다. 그럭저럭 살 만 했지만 다리를 다친 뒤부터는 거동하기가 불편해졌다. 작은 아파트를 팔아 다섯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식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각자 한두 달씩 아버지를 맡기로 한 것이다. 초기에는 괜찮았으나 몇 해 지나면서부터 자식들이 귀찮아하는 게 보였다. 어서 다른 집으로 갔으면 하는 압박이 느..

참살이의꿈 2021.04.25

시들하다

70이 코앞에 다가오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많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몸이 예전 같아 않아, 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너 시간은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시간만 연속으로 걸어도 지친다. 하루를 활동하면 다음날은 쉬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잠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싹 가셨지만, 이젠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몸에 정신이 박자를 맞추는지 매사가 시들하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 의욕만 앞서다가는 탈이 날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는 다행인지 모른다. 늙으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다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같이 등산을 했던 그룹은 지금도 산을 열심히 다닌다. 나는 작년과 올해에 500m 넘는 산을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참살이의꿈 2021.04.17

채현국 선생 어록

우리 시대의 자유인이자 스승이신 채현국 선생이 지난 2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전설 같은 선생의 일생과 삶을 반추해 보며, 몇 말씀을 되새긴다. 고인의 안식을 빈다. 꼰대는 성장을 멈춘 사람이고, 어른은 성장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 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 방황을 겁내지 말라. 방황을 겁내면 늙어서 추해지기 쉽다. 어른들 말은 잘 안 들어도 된다. 어른들의 정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나는 가졌는데 남은 가지지 않으면 미안한 거다. 내가 남의 것을 움켜쥔 거다. 재주나 노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노력해서 이뤘다면 그 사람은 노력을 ..

참살이의꿈 2021.04.05

내맘대로 건강법

나이가 나이인지라 친구들 단톡방에는 건강 관련 글이 자주 올라온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는 건강 상식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건강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그 말이 그 말이어서 대부분 보지도 않고 삭제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허정 박사의 건강 비법이라면서 글을 하나 올렸다. 첫머리의 '자기 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기분 좋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건강의 비법'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인 건강 상식은 무시하고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자고, 내 맘이 내키는 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 너에게 맞는 식사법이 나에게 맞는 식사법과는 다르다. 획일적인 건강 상식은 없다. 박사의 건강법이 평소의 내 생각과 비슷해서 여기에 옮기며 내 생각을 첨부..

참살이의꿈 2021.03.24

나는 행복합니다

이 사나운 세상에서 그나마 주변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술에 적당히 취할 때다. 너무 과해도 안 되고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알맞다. 그 정도면 세상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단, 주변이 시끌벅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수다 가운데서는 그런 기분을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주신(酒神)을 영접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아내가 처가에 갔다. 같이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아내만 내려갔다. 며칠간 혼자서 지내게 되었다. 몇 가지 계획이 궂은 날씨로 틀어지고 외출도 못한 채 집 안에서만 보내고 있다. 하필 이런 때 미세먼지가 몰려오고 하늘까지 잔뜩 찌푸릴 게 뭐람. 그러나 외로움을 즐길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평상시에..

참살이의꿈 2021.03.13

노년에 경계할 것

감이 익어 홍시가 되듯 사람은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늙으면 바람 불듯 물 흐르듯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가당찮은 생각이다. 잘 익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에 들어서고 보니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자기 독단에 빠지는 일이다. 노인은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하면 자신의 경험을 과대 해석하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하나의 전문 분야에 평생을 보낸 사람일수록 이런 성향이 강하다.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기준이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을 흔하게 본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목소리가 크고 모임을 주도한다. 동조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므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한다. 이런 함정에 빠지면 ..

참살이의꿈 2021.03.01

힘 빼는 데 3년

"힘을 빼라" "부드럽게 밀어라", 당구를 칠 때 옆의 고수한테서 자주 듣는 말이다. 수 년째 똑같은 지적을 받고 있으나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힘을 빼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아마 10년 정도 지나서야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한다. 전문 선수들이 그럴진대 일반 아마추어는 오죽하겠는가. 운동에서 힘 빼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이기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힘주어 친다고 공이 세게 나가는 게 아니다. 근육이 경직되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니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갈 뿐이다. 멘털 스포츠인 바둑도 마찬가지다. 힘이 들어간 수는 ..

참살이의꿈 2021.02.02

갈 때 되면 가야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라고 말하며 나를 깨우치겠다고 새해의 마음 다짐을 했다. 보름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다. 죽는다는 -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 의식이 내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한다. 좀 더 초연해진다 할까, 세상사의 헛됨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때는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날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죽음에서 예외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열심히 살..

참살이의꿈 2021.01.16

금방 죽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 세상의 하고많은 애착과 욕심을 들여다보아라. 자신만은 죽음과는 관계없다는 행동으로 가득하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 같다. 깊고 어두운 허무의 심연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운지 모른다. "금방 죽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말을 몇 번 읊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어느 분이 말했다. 단지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생생히 느끼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새해를 맞으며 나도 이분의 지혜를 차용하기로 한다. 아둔하면 반복적으로 세뇌..

참살이의꿈 2021.01.01

필요한 하나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참살이의꿈 2020.12.14

재미와 의미

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

참살이의꿈 2020.12.07

다정도 병인 양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드는 밤이 있다. 주로 윗집의 층간소음 탓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은 심란하여 잠이 안 온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거나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낡게 하고 허물어버리는 잔인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고향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요사이 같은 늦가을에는 고향을 찾을 일이 아니다. 빨리 내려와서 가을걷이를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연락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흔 연세에도 온갖 농작물을 기르고 거두신다. 그리고 가을이면 수확해서 자식에게 주는 재미로 사신다. 배추, 무, 사과, 깨, 생강, 시래기, 당근, 파, 호박 등 이번에도 차 뒤의 트렁크 하나 가득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는 않다. 고맙게 받아오고 잘 먹어주는 게 효도의 하나라고 ..

참살이의꿈 2020.11.24

청춘을 돌려다오

집에 놀러 온 아홉 살 손주가 나훈아의 '테스 형'을 자랑껏 부른다. 어린아이가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하니 웃으면서도 씁쓰레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그러랴마는, 요사이 아이들은 어른 흉내를 워낙 잘 내니 작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어쨌든 지난 추석 콘서트 이후 나훈아의 인기는 다시 치솟고 있다. 나훈아의 노래 중에 '청춘을 돌려다오'가 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로 시작하는 나훈아의 대표곡 중 하나다. 영상을 보면 무대에 꿇어앉아 통곡하듯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실제로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호소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청춘으로 돌아가서 힘든 인생을 또다시 살라고, 라며 고개를 저을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청춘이 청춘의 아름다움을 과..

참살이의꿈 2020.11.17

걱정 많은 한국인

지난 9월에 한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에서 세계 주요 14개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9개 항목(기후변화, 감염병, 테러리즘, 사이버 공격, 핵무기 확산, 경제 불안, 세계 빈곤, 국가 간 갈등, 난민)이 국가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조사했다. 이중 5개 항목에서 한국의 걱정 정도가 1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한국은 감염병 걱정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다. 감염병 확산이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한국은 89%나 되었다. 반면에 독일 55%를 비롯해 서구 각국의 평균은 60%대였다.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도 한국이 제일 높았다. 세계 경제 현황이 국가에 위협이라고 답한 비율이 한국은 83%로 1위였다. 2위가 스페인으로 76%이고, 전체 평균은 50%대였다. 핵무기 확산을..

참살이의꿈 2020.11.06

오늘은 나, 내일은 너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도 우리와 비슷했다. 다만,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장의사의 주관하에 의식을 치렀다. 망자의 입안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데 필요한 노잣돈으로 동전을 넣었다. 시신은 위생 목적에서 도시 안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시내 밖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라틴어인데 우리말로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지만,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잊지말라는 문구다. 묘지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더욱 숙연해졌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 여기서 예외는 없..

참살이의꿈 2020.10.31

하이쿠로 본 노년

일본노인요양협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이쿠를 모집해서 입상작을 뽑고 있다. 매년 여는 행사라고 한다. 아래는 올해의 수상작이다. 나도 이제 노년에 들고보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월을 이길 장사가 있는가. 몸과 정신이 쇠해지는 걸 지긋이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일본 노인의 심정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연상이 이상형인데 더 이상 없어 전철 개찰구 안 열려 봤더니 이거 진찰권 LED 전구 내 남은 수명으로는 다 쓰지도 못해 도쿄 올림픽 어디서 보려나 하늘인가 땅인가 이생의 미련 없다고 하지만 지진엔 도망가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손글씨 사실은 손떨림 사랑인 줄 알았건만 부정맥 펜과 종이 찾는 도중에 쓸 문장 까먹어 세 시간 기다려 진찰받은 병명 노환 의사가 갑자기 상냥해지면 불안해 만보계 절반 이..

참살이의꿈 2020.10.04

물멍과 불멍

친구가 한탄강에 다녀온 사진을 보내주며 '물멍'을 즐기고 왔다고 전해왔다. 처음에는 물멍이 뭔가 싶었으나 '물 보며 멍때리기'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쓰는 조어가 재치 있고 재미있다. 물멍은 흘러가는 강물이 제일이다. 흐르는 물소리의 음향효과가 더해지면 귀와 마음이 맑아진다. 강물은 흘러가는 세월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하염없이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무상한 세월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물가에 너무 오래 있으면 우울해질 위험이 있다. 특히 노인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물멍은 적당히 즐기는 게 중요하다. '불멍'이란 말도 있다. 코로나의 영향인지 가족끼리 가는 캠핑이 인기라고 한다. 야외에서 독립적으로 지내니 감염 걱정이 줄어든다. 옛날에는 가족보다 친구끼리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캠핑..

참살이의꿈 2020.09.13

게으름을 자랑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행동이 굼뜨다. 어려서부터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부모님이 걱정했는데, 학교생활이야 그럭저럭했지만 군대에 가서는 고생 좀 했다. 훈련받을 때 선착순에서는 맨날 꼴찌여서 기합은 도맡아 받았고, 자대에 가서도 고참한테 어지간히 잔소리를 들었다. 나 같은 졸병을 둔 고참도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다행히 행정병이라서 그나마 군대 3년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활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만히 혼자 있는 게 특기다. 책 한 권만 던져주면 종일을 심심치 않게 보낸다. 바깥출입 없이 몇 달이라도 혼자서 재미나게 지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단점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남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하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다. ..

참살이의꿈 2020.09.09

소의 무심

지난달에는 긴 장마와 폭우로 비 피해가 컸다. 그때 떠내려간 소가 20일 만에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다. 뒷산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멀리 합천에서 기르던 소였다고 한다. 어떤 소는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서 찾아낸 소도 있었다. 소는 몸 구조상 부력이 커서 물에 잘 뜬다고 한다. 그리고 성질이 공격적이지 않아 물살에 순응하며 떠내려가기 때문에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반면, 말은 물살을 거슬려 오르려 발버둥치다가 힘이 빠져 빨리 죽는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수명을 재촉한다. 소의 생존 비결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소를 한 마리씩 키웠다. 농기계가 없던 때라 농사를 짓기 위..

참살이의꿈 2020.09.03

도에 이르는 두 가지 길

6세기에 인도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는 선(禪)의 시조로 꼽힌다. 달마에서 전해진 선의 불꽃은 육조 혜능에 이르러 활짝 타오르게 된다. 달마대사는 온종일 침묵을 지키며 벽만 바라보고 참선을 했다고 해서 면벽바라문(面璧婆羅門)이라 불리웠다. 그만큼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정진 수도했다는 뜻이리라. 달마대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글이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이다. 도에 이르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며, '지성에 의한 길'[理]과 '행위에 의한 길'[行]로 구분한다. 지성에 의한 길은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이고, 행위에 의한 길은 삶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이다. 마치 돈오와 점수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뒷날 선사들은 도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이 글에서는 선의 정신이 보이지는..

참살이의꿈 2020.08.26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냐

김성탄(金聖嘆, 1608~1661)은 중국 명말 청초에 살았던 문예평론가였다. 재주가 뛰어났고 활달한 성격에 전통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는 태도 때문에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어겼다 해서 사형을 받았다. 그는 머리가 잘리기 전 이렇게 큰소리 쳤다고 한다. "머리가 잘리는 것은 아플 뿐이고, 가산을 몰수 당하는 것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나 성탄이 뜻하지 않은 일로 그리된 것은 참으로 괴이하도다." 김성탄을 처음 안 것은 오래 전 임어당의 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임어당은 김성탄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에는 김성탄의 글 한 편이 나온다. '행복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인데 절에 갔다가 장마로 열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인생에서 유쾌한 순간..

참살이의꿈 2020.08.07

수컷의 유효기간

동물 수컷은 나이 들고 힘이 떨어지면 쓸모가 없어진다. 생식 기능이 없고, 사냥도 못 하고, 무리를 지켜주지도 못한다면 수컷의 가치를 어디서 찾겠는가. 반면에 보살핌과 살림이 역할인 암컷은 늙어서도 효용가치가 남아 있다. 최소한 음식을 장만하고 손주를 봐줄 수는 있다. 그래서 암컷의 평균수명이 수컷보다 긴 것은 자연선택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인간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대부분 암컷의 수명이 수컷보다 20% 정도 길다. 백수의 왕자라는 사자의 세계에서 늙은 수사자는 천덕꾸러기다. 힘에 부쳐서 젊은 수사자에게 패하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광야를 헤매다가 죽는다. 그나마 암사자가 사냥해 오는 먹이를 받아먹다가 졸지에 혼자가 되면 제 먹이조차 구하지 못한다. 무리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늙은 수사자는 가차 없이 ..

참살이의꿈 2020.08.03

장미를 나눠주니 내 손에 장미향이 남았다

가뭄에 단비 같은 뉴스를 며칠 전에 봤다. 우리나라에서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보도였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숨은 선행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데 놀랐다. 보도만 보면 우리나라가 사람 살 곳이 못 되고 곧 망할 것 같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도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다. 기자들이 훈훈한 미담 기사도 많이 발굴해 주면 좋겠다. 기업인 중에서 대표적인 기부왕은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이다. 그는 2000년에 사재 1조 원을 털어 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세계 100대 자선재단 순위에서 90위에 속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재단이라고 한다. 100세를 눈앞에 둔 그는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할 수 없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는 기부 철학을 밝혔다고 한다. 조창걸 한샘 ..

참살이의꿈 2020.07.28

개구리와 소년

연못가에서 놀던 소년들이 물속에 많은 개구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많은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은 뒤, 용감한 개구리 한 마리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며 소년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그 잔인한 장난은 그만둬라! 너희는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우린 돌에 맞아 죽는단 말이야!" 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지불식간에 하는 행동이 타자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요사이 이 이야기가 실감나게 들린다. 내가 개구리의 심정이 된 것 같아서다. 층간소음 스트레스는 내 생활과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무려 10년 가까이 된다. 심할 때는 뭔가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좀 덜해지면 참고 지내보자고 하며 살아왔다.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제삼자나 관리사무소를 통해 당부해도 별 소..

참살이의꿈 2020.07.09

메멘토 모리

로마 시대 때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하면 환영 퍼레이드를 했다. 당사자는 마치 최고 권력자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장군 옆에 탑승한 노예가 개선 행진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장군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쳤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잔칫날에 재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관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게 대단하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잘 나갈 때 도리어 겸손하게 행동하라. 교만하지 말라."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현재 삶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 모리'와 비슷한 말로 '이 또한 ..

참살이의꿈 2020.07.04

막걸리 한 병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

참살이의꿈 2020.06.15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

이덕무 선생의 소품 글을 보다가 만난 구절이다. 에 실린 원문은 이렇다. 眉宇間 隱然帶出澹沱水平遠山氣色 方可與語雅致 而胷中無錢癖 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 주변에서 과연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선비 정신이 살아 있던 옛날에는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각자의 욕망 충족을 위해 허기지듯 내달리는 현대 자본주의 인간 군상들에게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혹 있지만 내가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일 테니까. 선생은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에서 벗어난 사람의 얼굴을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띠고 있다고 했다. ..

참살이의꿈 2020.06.08

시인의 마을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는 세 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넓은 평원의 단조로운 풍경이 질리도록 펼쳐졌다. 다들 눈을 감은 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를 운전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레이어에 꽂았다. 정겨운 우리 가요의 멜로디가 독일 버스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독일에 연수를 온 지 두 주일째, 뒤에서 소곤거리며 잡담이 들리던 버스 안이 숙연해졌다. 몇 곡의 트로트가 지나가고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이 나왔을 때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노래 분위기와 당시 상황이 어쩜 그리 절묘하게 맞았는지 모르겠다. 어울리지 않게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주리오 누가 내 마음의 위안 돼주리오 ..

참살이의꿈 2020.05.19

코로나19를 보는 글 두 편

코로나19를 대하는 글 두 편을 옮긴다. 첫 번째는 지난달 한겨레신문에 실린 김종철 선생의 칼럼이다. 제목이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이다.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 / 김종철 인류가 소위 문명생활을 시작한 이래, 역병은 인간 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세계의 역사는 어떤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때로는 국지적으로, 때로는 대륙 전체에 걸친 역병의 창궐과 그 후유증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력의 발전이나 계급투쟁 혹은 전쟁이 아니라, 감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표적인 예는 중세 말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일 것이다..

참살이의꿈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