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42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지난달 29일에 열렸던 제77회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축사를 했다. 선배로서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인데 근래 보기 드문 명연설이었다. 최 교수는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모교 생명과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부터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근무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화생물학자다. 이번 축사의 요지는 자기만 잘 살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선생은 "주변은 온통 허덕이는데 혼자 다 거머쥐면 과연 행복할까"라고 반문한다. 가진 자들은 별생각 없이 키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고 공정하다고 하지만 그건 일률적인 공평에 지나지 않는다. 키가 작은 이들에게는 더 ..

참살이의꿈 2023.09.17

인생의 의의와 가치

아주 오래전, 20대 때 본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권이 있다. 대부분 내용은 잊었는데 책의 모양과 제목만은 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책을 샀던 서점과 서가의 풍경까지 떠오른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다. 이 책을 가방 속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맛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어두운 색의 하드 커버 표지에 두께는 얇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1966년에 신조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지은이는 오이켄이라는 독일 철학자였고, 제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제목과 외형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논지를 펼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

참살이의꿈 2023.08.23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가만히 다정하게

장마철과 연관이 있을까. 짜증 나고 화가 솟는 일이 잦다. 이럴 때는 한 호흡 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정하게. 짜증 나는 원인이 밖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상은 어쩌다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핑곗거리였을 뿐. 누구나 위로 받고 사랑 받길 원한다. 고개를 돌려 둘러보라. 누가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줄 것인가. 이 시들어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자. 작고 연악한 어린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지 모른다. 다정한 미소로 다가가서 껴안아주자. 쓰담쓰담 토닥토닥. 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면 타인 역시 연민의 념으로 바라보게..

참살이의꿈 2023.07.25

병원에 안 가려는 이유

일주일 전부터 오돌토돌한 붉은 반점이 팔에 돋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퍼지더니 사흘째에는 다리에도 나타났다. 원인은 모르지만 두드러기인 것 같다. 우선 보기에 엄청 징그럽다. 다행히 간지러움은 심하지 않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면 금방 낫겠지만 그냥 견디기로 한다. 며칠 더 고생하고 병원 신세를 안 지는 쪽을 나는 선택한다. 한 달 전에는 앞니 하나에 이상이 생겼다. 건드리면 아파서 양치질도 피해서 했다. 음식 먹는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치과에 가는 대신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지나니 통증이 가라앉고 많이 진정되었다. 지금도 정상이 아니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아마 치과에 갔다면 깔끔하게 임플란트를 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이빨로 가능하면 버틸 수 있는..

참살이의꿈 2023.07.04

심심함의 변명

나는 외출보다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다. 대략 두 배쯤 된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집에 있고, 10일 정도밖에 나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은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느냐고, 아내가 늘 신기해 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없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퇴직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삶의 관성이란 무섭다. 봉사 활동이든 취미 생활이든 뭔가를 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 속에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은퇴 후에도 바쁘게 보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앗기고 있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전철에서 보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다. 휴대폰이 없..

참살이의꿈 2023.06.23

노인의 예절

노인을 대하는 예절이 아니라 노인'의' 예절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60을 넘기면 잔치를 열었고 70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젊은이는 많고 노인은 적었으니 노인은 집안이나 공동체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역전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2025년이면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간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이 1천만 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인이 넘쳐나면 존경과 대우는커녕 자칫하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노인은 생산성이 없어서 경제적 측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적다. 과거에는 지혜와 경륜으로 한몫했지만 이제는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여서 노인이 자리 잡을 영역은 좁아지고 있다.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젊은이에게 ..

참살이의꿈 2023.06.10

끼리끼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특성이 오늘의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었다.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이 계발되면서 두뇌가 발달하고 문명의 건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공동체에는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이 대표적이다. 같은 취미를 가지고 이루어진 모임도 많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결국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 대하기가 편하다. 이해의 폭이 넓은 탓이다. 예를 들어, 내향성인..

참살이의꿈 2023.05.27

몰라서 못 먹는다

집에는 냉장고가 세 대 있다. 두 노인이 사는 집 치고 과하지만 전에 자식들과 같이 살 때 쓰던 냉장고가 고장 없이 작동하고 있으니 계속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아내에게 한 대를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다 쓸모가 있다고 한다. 부엌 살림살이는 아내 소관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세 대의 냉장고는 어디를 열어봐도 빈틈없이 뭔가가 가득 들어 있다. 둘이 사는 살림에 무슨 먹을거리가 이토록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내조차도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뭘 찾자면 이 냉장고 저 냉장고로 왔다갔다 한다. 냉장고만 아니라 옷장도 마찬가지다. 십 분의 일로 줄여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냉장고 문을 열면서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늘어난 말이다. "이런 게 있..

참살이의꿈 2023.05.25

조만간 죽는다

"조만간 죽는다." 생략된 주어는 당연히 '나는'이다. 생명체가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도 짧은 지상의 삶을 누리다가 반드시 죽는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외면하려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피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불안을 동반한다. 살아 있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완전 소멸을 감당하기 힘들다. 공자마저 죽음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며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직시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불안과 부조리가 죽음이라는 숙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아는 것이 병이다. 죽음을 예견하지 못..

참살이의꿈 2023.05.08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화장실 세면대 옆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9년 전에 친구가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며 기념으로 준 수건이다. 아랫단에 친구 이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어렵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현재에만 충실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 일이 발목을 잡아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간다. 반면에 동물은 단순하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매여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리 두 마리가 연못 위에서 직각을 이루는 물길을 따라오다가 충돌했다. 이내 꽥꽥 소리와 푸드덕 날갯짓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두 오리는 서로 떨어져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네가..

참살이의꿈 2023.04.18

인간의 세 가지 편향

인간이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 두뇌는 불완전하고 허점 투성이다. 군중 심리에 쉽게 매몰되고 형편없는 신념을 금과옥조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면 근거의 박약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다. 인간은 '털 없는 원숭이'에 더 가깝다. 앞으로 AI 시대가 되면 인간의 설 자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진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너무 건방진 말이 아닐까.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고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싶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들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이 제시하는 인간이 범하는 세 가지 편향 오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첫 번..

참살이의꿈 2023.04.04

가슴에 박힌 가시들

학폭을 소재로 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인 모양이다. 드라마가 일부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소환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복수극에 통쾌해하는 것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녔던 60년대는 학교 폭력이나 왕따가 거의 없었다. 힘깨나 쓰는 치들은 저희들끼리 놀았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학폭이나 왕따라는 못된 문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학폭과 함께 교폭(교사 폭력)에 대한 비난 글도 많이 올라온다. 그 시절에 교사한테서 억울한 체벌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개중에는 교사 실명을 공개하며 적의를 드러내는 글도 있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당시의 교사들은 상당수가 처벌 대상이 되고 감옥에 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매가 아닌 교사의 감정을 못 이긴 채 어린..

참살이의꿈 2023.03.21

노년의 갈림길

노년이 시작되는 공식적인 나이는 65세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65세에 노인이 되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경로 우대증을 받기는 했지만 노인이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속에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 배어 있는 게 아닐까. 실제 노년이 시작되는 나이는 몇 세 쯤일까?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일흔을 넘어서니 노년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어봐도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인간은 세월 따라 서서히 늙어가겠지만 노인이 되었다고 정서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인생의 과정은 단계가 있고 점프하듯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불연속적인 ..

참살이의꿈 2023.03.10

내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거의 매일 밤 꿈을 꾼다. 그런데 꿈이 영 마뜩잖다. 열에 아홉은 사람들과 다투고 마찰을 겪는 내용이다. 악몽까지는 아니어도 괴롭고 답답한 꿈이다. 잠을 깨고 반추해 보면서 늘 기분이 씁쓸하다. 오늘 새벽 꿈도 그랬다. 옛 직장 동료들과 무슨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나누어준 프린트 자료가 있었는데 집에다 두고 나왔다. 내 발표는 두 번째였다. 뒤에 발표하게 되어 있는 동료에게 자료를 빌려달라 했는데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집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끼던 물건(큰 수정 구슬인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음)은 마당에서 뒹굴고, 대드는 동생과 티격태격하며 손찌검까지 했다. 너무 화가 난 상태에서 잠이 깼다. 싸우고 지지고볶고 꾸는 꿈마다 패턴이 비슷하다. 인간관계의..

참살이의꿈 2023.02.28

재미를 버릴 때 찾아오는 재미

교직에 있을 때 나를 괴롭힌 건 선생 노릇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사는 -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부모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할수록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았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보람을 느끼거나 재미있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저 버텨냈을 뿐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삶이 재미없었던 제일 큰 이유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동물이다. 무슨 일을 하건 의미/명분이 있어야 열정이 생기고 재미도 느낀다. 아니면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오락이나 쾌락이 위안을 주지만 일시적 도피일 뿐이다. 근원적인 해결 없..

참살이의꿈 2023.02.15

어른 김장하

MBC TV에서 방송된 2부작 다큐멘터리인 '어른 김장하'를 봤다.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고 여러 지역사회 운동을 지원한 김장하 선생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선생은 제목에 나오는대로 우리 시대의 '어른'이신 분이다. 선생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고사하셔서 직접 인터뷰는 하지 못하고 선생과 관련된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경남도민일보 기자였던 김주완 씨가 채현국 선생에 이어 다시 훌륭한 분을 소개해주어 고맙다. 언론이나 TV의 역할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4년생인 선생은 19세인 1963년에 한약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사천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박리다매 전략으로 돈을 많이 번다. 10년 뒤 진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번 돈을 쌓아두지 않고 지역사..

참살이의꿈 2023.01.30

산 대로 죽는다

"엄마의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즉 엄마가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박희병 선생이 어머니의 마지막 1년을 옆에서 간병하며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의 에필로그에 적혀 있다. 선생의 어머니는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장애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태도가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인식한다. 다른 동물은 현재만 살뿐 ..

참살이의꿈 2023.01.12

되어가는대로 살기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고,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가까워지지 못한다. 이만큼이나마 세상을 살아보니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더라. 세상일은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헛심만 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순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되어가는대로 살기'다. 되어가는대로 살기는 되는대로 살기와는 다르다. 되는대로 사는 것은 제멋대로 사는 것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자기 통제와 규율이 있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에는 목표가 필요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실행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열매를 맺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일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진인사..

참살이의꿈 2022.12.22

젊은 날의 초상

내 젊은 날의 노트를 열어본다. 노트 안에는 진리를 향한 갈구에 목말라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중에서 49년 전인 1973년 11월 30일의 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는 C'라고 부르면서 적은 글이다. 그 시절에 나는 인간과 세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질문에 답해주는 것이 진리였다. 진리는 반드시 존재하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믿었다. 진리야말로 무명의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었다. 내가 볼 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 정신의 금자탑이 철학이었다. 철학 사상을 파고들면 나름대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몰두했다. 전공 공부는 아예 도외시했다. 얼..

참살이의꿈 2022.12.01

쓸쓸하고 가련한

늦가을 비가 떠나가는 가을을 재촉한다. 지난밤의 차가운 비바람에 나무는 더욱 홀쭉해졌다. 성하(盛夏)의 계절을 장식하던 나뭇잎은 생명의 물기가 빠지고 바닥에 떨어져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린다.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해체되고 소멸하는 것이 생명체의 숙명이다. 인간 역시 유전하는 만물의 흐름 속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가을 끝자락 풍경을 보면 울적해진다. '울적(鬱寂)'은 사랑스러운 말이다. 사전에는 '쓸쓸하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나는 '우울한 적요(寂寥)'라고 해석한다. 즉, '우울과 함께 하는 고요/평화'다. 세상사의 덧없음을 비관하면서 동시에 긍정한다. '울적'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감정으로서의 우울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이 있다. 가을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자주 생각..

참살이의꿈 2022.11.29

인생을 낭비한 죄

오래전에 본 영화 '빠삐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빠삐용이 꿈에서 자신을 기소한 검사와 대면하는 부분이다.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은 어떻게든 탈출해서 누명을 벗으려 한다. 그러나 탈출은 실패하고 독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악몽을 꾼다. 먼 사막의 지평선에 검사가 나타나 빠삐용을 바라본다. 빠삐용은 외친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 검사는 말한다. "맞다. 너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살인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다." 빠삐용은 억울하다는 듯 대꾸한다. "그게 뭡니까?" 검사가 단호하게 말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다." 빠삐용은 고개를 떨군다. "나는 유죄다." 젊었을 때 이 장면을 보고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빠..

참살이의꿈 2022.11.21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존경하는 벗인 Y형은 글을 잘 쓴다. 잘 쓴다는 것은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진솔하면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담백한 그런 점이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도 많다. 가까워진 것도 꽃이 매개가 되어서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어,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이 나온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형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이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보내줬다. 감사하고 고마워..

참살이의꿈 2022.10.30

당연한 일은 없다

기억할 때마다 낯 부끄러워지는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외할머니가 살림을 맡으시고 동생과 함께 서울에 살 때였다. 부모님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날은 왠지 심사가 삐딱했었던 것 같다. 나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당연한 일 가지고."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다면 저 놈이 내 고마움도 모를 터가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이 말을 부모님한테 전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모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말은 내 금기어가 되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

참살이의꿈 2022.10.19

200일 & 50일

200일은 TV를 멀리 하고 있는 날짜다. 올 3월 9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바라지 않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표차는 0.7%였다. 앞으로 5년 동안 TV 화면으로 그를 봐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일이 지났다. 단, 스포츠 중계는 예외다. PBA 당구대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TV를 켠다. 다음달부터 배구 시즌이 시작된다. 여자배구를 좋아하니 자주 TV 앞에 앉게 될 것이다. 그 정도는 허용하기로 한다. 왜 그 사람이 싫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적은 없었다. TV를 안 보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다. 요사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처신을 보면 내 판단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부인한테서 받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TV를 보지 않으니..

참살이의꿈 2022.09.25

기대 없음의 행복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대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다중(多衆)보다는 고독이라고 되새김질하는 자체가 이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DNA에는 무리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야생 상태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홀로 있으면 스트레스가 작동하도록 하는 명령어에 불이 켜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때 기본적으로 기쁨을 느낀다. 야생의 위험이 사라진 지금도 인간은 소속감을 통해 안전과 위안을 ..

참살이의꿈 2022.09.21

두 가지를 경계한다

늙어지면서 두 가지를 경계한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가는 것이다. 노화는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이다. 하늘로부터 받고 누린 것을 하나하나 돌려줘야 한다. 상실이 순리라고 할지라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가슴이 뛰는가. 어린 손주의 해맑은 웃음, 왕성한 호기심,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케 한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를 보며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무지개'는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경이감일 것이다. 어린..

참살이의꿈 2022.09.11

70줄에 들어서면

공식적으로는 65세부터 노인이 된다. 내 경우에는 경노카드를 발급받을 때 벌써 노인이 되었나, 라는 씁쓰레한 심정이 앞섰다. 65세는 몸이나 마음이나 노인이라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러나 70줄에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 앞에 '6'자가 붙는 것과 '7'자가 붙는 것은 천양지차다. 우선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아무리 고령사회라지만 일흔이라는 나이의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신체나 정신도 전과 확연히 다르다. 나이 70은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되는 인생의 분기점이다. 능동적인 생활 주체가 수동적인 약자로 변하는 시기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를 보면 70줄에 들어서면 질병을 앓을 확률이 높아지면서 대부분이 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사망할 때까지 고령자의 약 10% 정도만 심신이..

참살이의꿈 2022.08.29

쌓이면 터진다

지구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상당히 역동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오는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상세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한다. 지구 내부가 인간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터전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다. 지구가 지각, 맨틀, 핵으로 되어 있듯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추측 수준이지 거의 무지하다. 인간이 지각의 표면만 겨우 건드렸을 뿐 마음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의 세계가 어떠한지는 지구의 내부처럼 신비에 싸여 있다. 지각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요인에 따라 온도가 올라가고 암석이 녹는다. 아마 천 도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런 마그마가..

참살이의꿈 2022.08.19

혼자서 잘 놀아야 노후에 행복하다

뇌리에 새겨진 한 장면이 있다. 40대였을 것이다. 직장 동료와 시골길을 걷다가 외딴 초가집 마당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나직이 말했다. "저렇게 늙는 건 비극이야. 난 저렇게는 안 되겠어."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외로움과 노년의 고단함이 묻어나기는 했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노인이라고 불쌍한 연민의 대상이기만 한 걸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나름의 자족의 행복이 있지 않을까. 나는 할아버지한테서 여유와 편안함을 읽었지만 동료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타인과 공유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수많은 인터넷 카페나 단톡방, 각종 SNS에서 넘쳐나는 사연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

참살이의꿈 2022.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