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36

행복한 외톨이

외톨이는 어감이 좋지 않다. 왕따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타인이야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혼자의 자족을 즐긴다면 그 또한 멋진 인생이 아니겠는가.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외톨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오히려 외톨이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좋다면 굳이 밖에서 찾으려고 쏘다닐 필요가 없다. 무리를 짓고 어울리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있다. 인생에서 친구와 돈이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다. 그런 사람에게는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비극일지 모른다. 시간 낭비일 망정 마시고 떠들어야 사는 맛이 난다. 지나고 나서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순간의 쾌락이지 내면의 참 행복은 아니다. 일과 인간관계를 무시하자..

참살이의꿈 2022.04.17

의좋은 형제

비록 사진이지만 1960년도 초반에 사용된 국민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를 봤다. 시기를 맞춰 보니 내가 썼었을 교과서여서 감회가 깊었다. 책 내용 중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60년 전이라 가물하지만 이 이야기를 국민학생일 때 접했던 기억은 난다. 그런데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다는 건 새롭게 알았다. 철부지 시절에 이 일화가 주는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 옛날의 나를 떠올리며 다시 읽어본다. 옛날 어느 시골에 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 잘 가꾸었습니다. 벼는 무럭무럭 자라서 가을이 되자 곧 벼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형님. 벼가 잘 되었지요. 이렇게 잘 여물었어요." "참 잘 되었다. 언제 곧 베어야 할 거야." 누..

참살이의꿈 2022.03.19

너무 많은 비밀번호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이젠 열쇠를 보기 힘들다. 집이나 사무실에는 도어록이 되어 있어 비밀번호를 이용해 출입한다. 차 안에 지도가 사라진 것도 마찬가지다. 길을 찾아가자면 지도가 필수였는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대신한다. 그러다 보니 기억해야 할 비밀번호가 너무 많다. 일일이 구분하지 못하다 보니 비밀번호를 적어두는 장부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내 경우도 비밀번호 비망록이 따로 있다. 나는 도대체 몇 개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을까. 현관, 휴대폰, 와이파이, 카드 2, 도서관, 포털 3, 통신사, 카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페이, 원드라이브, 삼성계정, 넷플릭스, 국립공원, 광릉수목원, 사진 2, 야생화 2, 걷기 3, 바둑 2, 모야모, 교직원공제회, 국민비서구삐..

참살이의꿈 2022.03.07

인연

현재 전 세계 인구는 80억 명이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로 지구상에 생존했던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약 1천억 명이라고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다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까. 바늘 끝 같은 한 점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 끌리게 되었을까. 호텔 커피숍을 들어서는 당신을 멀리서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내 사람이구나. 밤색 투피스를 입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채 당신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무슨 신호를 접수한 것일까, 내 몸 안에서는 호르몬이 홍수처럼 분출했고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일까. 짧은 일별일 뿐인데도 치명적인 끌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반면에 수십 년을 알고 지내..

참살이의꿈 2022.02.27

아, 시원하다!

엔도 슈사쿠의 글에서 본 대목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정신도 좋고 정정한 분이었는데 하루는 며느리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먼저 옷을 벗고 욕탕 속으로 들어가더니 탈의실에 있는 며느리를 향해 말했다. "아, 시원하다!" 잠시 후에 며느리가 욕탕 속으로 들어가니 시어머니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걱정이 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할머니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이렇게 행복한 죽음도 있을 수 있구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이 "아, 시원하다!"로 너무나 행복하고 평온하게 세상을 뜨신 것이다. 글자 ..

참살이의꿈 2022.02.17

욕심 속에서 욕심 없이

옛 노트를 열어보니 어느 날의 일기에 아무런 설명 없이 '在欲無欲'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그 네 글자가 내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해석하면 '욕심 속에서 욕심 없이 산다'는 뜻이겠다. 어디서 보고 노트에 옮겨 적은 것일까. 인터넷에서 출처를 찾아보니 '휴휴암주좌선문(休休庵主坐禪文)'이다. 옛날 중국에 있던 휴휴암이라는 절의 주지 스님이 쓴 글로 '在欲無欲'이 나오는 부분은 이렇다. 在欲無欲 居塵離塵 謂之禪 욕심의 세계에 있으나 욕심이 없으며 티끌 세상에 살면서도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재욕무욕 거진이진(在欲無欲 居塵離塵) - 욕심의 세계에 있으나 욕심이 없고, 티끌 세상에 살면서 티끌에 오염되지 않는다. 밥을 먹되 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돈을 아끼되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

참살이의꿈 2022.02.03

웃으면서 비관

언젠가 밤에 차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선 고층 아파트의 창마다 켜 놓은 불빛이 환했다. 나는 저 집들마다 어떤 기구하고 아픈 사연들이 있을까, 라며 착잡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불빛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지인이 말했다. "와, 불빛이 꽃처럼 예쁘다. 창 너머 가족의 단란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똑같은 불빛을 보는 마음의 눈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 나는 지인의 옆얼굴을 부러워서 쳐다보았다. 반이 남아 있는 술잔을 보며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아 있다"라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다"라고 슬퍼한다고 한다.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에 따라 현상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 인간에게는 행복 유전자가 있고 개인에 따라 타고난 양이 다르다고 한다. 인간..

참살이의꿈 2022.01.17

룩 업

'돈 룩 업(Don't Look Up)'이 지구 종말에 관한 영화라고 해서 봤다.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는 상황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인류의 안위보다는 제 이익이 우선인 정치나 미디어계를 비판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혜성 충돌에 관한 사실적 묘사는 부족하다. 여러 군데 건너뛰면서 봤지만 인상적으로 들리는 말이 있었다. '돈 룩 업(Don't Look Up)'과 '룩 업(Look Up)'이다. 하늘에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절체절명의 때지만 상반되는 두 목소리가 있다. "올려다보지 마!"와 "올려다봐!"다. "올려다보지 마"는 지구가 파멸하든 말든 자기의 기득권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너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길만 보라고 한다. 세월호에서 객실에 갇힌 학생들에게 ..

참살이의꿈 2022.01.13

그러려니

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이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 사전을 찾아보니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 그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덧'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상태를 그럭저럭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그럭저럭'보다 좀 더 진화한 말이 '그러려니'가 아닐까 싶다. '그러려니'에는 세상살이를 흘러가는 대로 관조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그럭저럭'보다 내 의지가 더 탈색된 느낌으로, 체념에 가까운 태도다. [체념(諦念)은 '살필 체(諦)'에 '생각할 념(念)'으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본뜻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일흔이 되니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21.12.21

친구와 지인

"나에게 친구가 있는가?" 가끔 해 보는 자문이다. 여러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친구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관계로서의 친구라면 다들 고개가 저어진다. 인생에서 한 명의 진실된 친구를 가지는 일이 쉽지 않다. 당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거나, 산길을 같이 걷거나, 또는 학교 인연으로 만나서 옛날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임이 있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저 같은 즐길거리를 공유하는 아는 사이라고 해야 맞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관계는 아니다. 나를 성찰하게 해 주며 우정 속에서 서로 성장해 나갈 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잘 나갈 때는 ..

참살이의꿈 2021.12.15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어린 손주를 보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나를 위해 있고, 친구나 장난감도 마찬가지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걸 헤아릴 능력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듯 동화 나라에서 살아간다. 어른 눈에는 그런 행동마저 마냥 귀엽게 보인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배웠다. 배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구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배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꼭 신체만이겠는가. 인간의 정신도 인류 여명기의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차례대로 답습하며 성장해 나가는 건 아닐까. 5백 년 전까지도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거치며 사람들에게 지동..

참살이의꿈 2021.12.07

코로나와 마스크

며칠 전에 친구와 동네 당구장에 갔다가 과반이 마스크를 안 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빈 테이블 하나가 있어서 자리를 잡았지만 마스크를 하지 않은 채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게임을 할 수 없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예의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울철 실내 당구장은 코로나가 전파하기 쉬우므로 조심하는 게 당연하고, 상호간 유일한 방벽은 마스크 착용이 아닌가 말이다. 부리나케 한 게임만 마치고 나오면서 주인에게 왜 이렇게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많으냐고, 쓰라고 강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아예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 가는가 보다. 위드 코로나가 경각심을 누그러뜨린 것 같지만 밖에 나가보면 그렇지 않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너무 잘..

참살이의꿈 2021.12.04

개의치 않으련다

늙어가면서 신체와 정신에 변화가 생긴다. 둘을 비교한다면 정신보다는 신체의 변화가 더 빠르고 큰 것 같다.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하듯이, 노년이 되면 육체가 정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물론 정신이 먼저 문제가 생기는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이 크게 엇박자를 내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나란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진입한 나를 관찰해 보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변화가 느껴진다. 전에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을 썼다. 내 언행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먼저 살폈다. 그래서 늘 조심했고, 동시에 실수를 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이것은 내 오래된 습(習)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

참살이의꿈 2021.11.18

인생은 고(孤), 고(苦), 고(Go)

아침에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면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의 낮은 기온 탓으로 생기는 복사안개다. 창밖을 보고 있으면 나도 짙은 안갯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안갯속에서는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던 동무도 자취를 감췄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 꼭 인생길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습관처럼 "곧 죽는다"를 나직히 읊조린다. 안갯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를 본다. 안 그래도 울적하던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안개가 사라지자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일어난다. 시계는 8시를 너머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하루가 시작된다.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친구가 옆에 있어서 위안이 된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오래 살게 되면 어차피 친구도 다 떠나간..

참살이의꿈 2021.10.27

휴대폰 멀리하기

고향에 내려갔을 때 길을 걷다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쳐서 액정이 깨졌다. 바닥이 우둘투둘한 시멘트길이였는데 마침 액정면이 직접 부딪치면서 여러 군데 거미줄이 생겼다. 다행히 휴대폰은 정상으로 작동했다. 당장에는 실수를 한 것에 대해 기분이 언짢았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거였다. 화면 보기가 불편하니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볼 일이 없을 터이고, 이참에 휴대폰과 거리를 두고 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액정 수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 집에 있으면서도 수시로 핸드폰을 켜고 무슨 연락이 오지 않았나 확인한다. 그냥 습관적으로 손이 휴대폰으로 간다. 늙은 백수에게 특별하거나 긴급한 연락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개 본 걸 또 보고, 할 게 없으면 뉴스라도 검색하며 만지..

참살이의꿈 2021.10.10

디오게네스의 자신감

고등학생일 때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전해 주는 여러 철학자들의 삶과 일화가 재미있었고, 그들의 명언이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제일 감명을 받았던 철학자는 디오게네스였다. 사람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다거나,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통쾌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에 속한다. '견유(犬儒)'란 '개 같은 선비(철학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명칭으로 들리지만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으니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리자 개처럼 한 발을 들고 오줌을 갈겨댔다는 일화가 전한다. '견유..

참살이의꿈 2021.09.21

무거운 밤

어설프게 술을 마신 뒤에는 잠을 설친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온갖 꿈이 난무한다. 꿈은 대체로 어둡고 무겁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어도 영 기분이 씁쓸하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어제는 직장과 군대 꿈에 시달렸다. 둘 모두에서 나는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나온다. 직장은 학교 교무실과 교실이 주무대다. 늘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게 늦거나 교실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시간표를 착각해서 아예 수업을 빼먹기도 한다. 교실에 들어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서툴다. 수업 준비를 안 해서 무엇을 가르칠지 몰라 진땀을 흘린다. 나는 교무실 동료나 교실의 아이들한테서나 왕따 신세다. 35년 동안 한 선생 노릇이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길래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따위 꿈에 계속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교직이 적..

참살이의꿈 2021.09.04

살아나는 꿈

아내는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몇 차례 텃밭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몰두하는 것은 처음 본다. 수확해서 먹는 것은 둘째고, 작물을 심고 기르는 즐거움이 우선인 것 같다. 텃밭과 채소 얘기를 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돈다. 텃밭과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이번에 얻은 텃밭은 집 옆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텃밭에 나간 것이다. 돌아올 때는 큰 비닐봉지에 뭔가가 한가득 들어 있다. 아내의 얼굴 표정도 밝고 환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얼굴이 부은 채 방에서 나왔을 터였다. 아내의 건강에도 텃밭이 일조를 하고 있다. 내년에도 계속 텃밭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텃밭을 포함한 주변 땅에 아파트 공사가 예정되..

참살이의꿈 2021.08.18

마음의 맷집

초등학생 때 A는 씩씩하고 담대해서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 적어도 교실 안에서는 그랬다. 담임 선생님한테 야단이나 매를 맞을 때면 다들 무서워하고 벌벌 떨었지만 A는 달랐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냐면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A는 술고래인 아버지한테 욕먹고 얻어터지는 게 일상이었다. 지게 작대기에 단련된 A의 몸이 선생님의 회초리는 애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와는 별개로 A의 몸은 살아남기 위해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맷집은 시련을 통해 생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야생의 풀과 경쟁할 수는 없다. 백신을 맞는 것도 같은 원리다. 병원균에 미리 노출시켜서 적응력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호르메시스(Horme..

참살이의꿈 2021.08.09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 송현숙 논설위원 모멸감.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지난달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쫓는 내내 떼어낼 수 없었던 감정은 이 세 글자였다. 어제까지 일하던 직원의 죽음을 한사코 모른 체하려는 그 조직의 모습에, 고인이 생전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달 26일 아침, 남편과 함께 출근했던 59세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퇴근하지 못했다. 막내딸과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은 당시 힘들고 멍한 고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평소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던 그는 관악학생생활관(서울대 925동·기숙사)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사망 열흘 만이었다. 가족..

참살이의꿈 2021.07.25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

반년 전이었다. '양자인문학'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친구의 소개로 B 선생의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 양자론은 물리를 공부한 나도 몇 문장 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니, 라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블로그에서 만나게 된 B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영민한 분이었다. 그분 블로그에는 종교, 철학, 예술, 여행, 과학 등에서 수준 높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B 선생은 암 투병중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양자인문학' 등 다양한 글을 쉼 없이 쓰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암 투병 과정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힘든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B 선생은 항암치료를 '살래의 길'이라고 명명하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연..

참살이의꿈 2021.07.14

후배의 독서당

후배 H가 북한강변에 독서당(讀書堂)을 마련해서 조용히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는 얘기는 연전에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마침 통화가 되었고, 몇 번 약속이 어긋나다가 마침내 어제 찾아가 보게 되었다. H는 교직에 있으면서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 학위를 딴 학구적인 후배다. 퇴직을 하고 책을 원 없이 읽고 싶다며 남양주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강변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의 2층에 세를 들어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한 소박한 오두막과 달리 넓고 럭셔리했다. "언제 이렇게 부르주아로 변신한 거야?"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인 거죠."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후배가 대견하고 부러웠다. 나도 세컨드 하우스 개념의 이런 공간 하나 빌리고 싶은 것..

참살이의꿈 2021.06.22

평화를 빕니다

처음 가톨릭 미사에 참예하였을 때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면서 "내 탓이오"라고 오른손으로 왼편 가슴을 세 번 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미사 끝 부분에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신자들끼리 나누는 인사였다. 요사이는 성당 미사에 가뭄에 콩 나듯 나가면서 마지못해 앉아 있지만, 이 두 장면에서만은 여전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종교의 알짬이 이 둘 속에 스며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심(宗敎心)이란 내면적으로는 '내 탓'이라는 자기 반성이 핵심이다. 자기 성찰 없는 믿음은 위선이며 기만일 뿐이다. 바리사이인들이 예수한테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그들의 믿음에 자기 성찰이 빠지고 오만과 독단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선을 안으로 수렴하고 겸손해지도록 가르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21.06.15

덕 볼 일이 없으면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제일 강력한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이욕(利慾)'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개체의 생존과 종족 번식의 욕구는 이기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돈 많고 권력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뭔가 덕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덕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발걸음을 끊는다. 오죽하면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 나잇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손주를 자주 보는 방법은 올 때마다 용돈을 듬뿍 쥐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효자인 줄 알았더니 속셈은 따로 있었다. 제가 부모한테 덕 볼 일이 없어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척할지는..

참살이의꿈 2021.05.26

문 닫으면 곧 깊은 산

몇 해 전 봄에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 간 적이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사랑방에 걸린 편액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선생이 직접 쓴 글씨가 소박한 나무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杜門即是深山" "문을 닫으면 곧바로 깊은 산 속이 된다"는 뜻이겠다. 글씨 옆에는 '丙辰榴夏 午睡老人'이라 적혀 있는데, 병진년은 1976년으로 선생이 회갑이 되던 해다. 오수노인(午睡老人)은 선생의 호로 '낮잠 자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떠나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선생의 생각이 묻어 있는 글씨다. 요사이 이 글씨가 자꾸 떠오른다. 두문의 문(門)이 집의 현관문은 아닐 것이다. 응당 '마음의 문'으로 봐야 하겠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어떤 의미일까. 세상 속에 살면서..

참살이의꿈 2021.05.16

어떤 죽음

지인한테서 들은 한 노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자식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 한 자식한테 신세를 지기 싫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녔지만, 모든 자식의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자식들 사이의 관계도 안 좋아졌다. 약간 다리가 불편할 뿐 정신은 말짱했으니 요양원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던 자식들도 차츰 빈도가 뜸해졌다. 노인은 70대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았다. 그럭저럭 살 만 했지만 다리를 다친 뒤부터는 거동하기가 불편해졌다. 작은 아파트를 팔아 다섯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식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각자 한두 달씩 아버지를 맡기로 한 것이다. 초기에는 괜찮았으나 몇 해 지나면서부터 자식들이 귀찮아하는 게 보였다. 어서 다른 집으로 갔으면 하는 압박이 느..

참살이의꿈 2021.04.25

시들하다

70이 코앞에 다가오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많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몸이 예전 같아 않아, 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너 시간은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시간만 연속으로 걸어도 지친다. 하루를 활동하면 다음날은 쉬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잠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싹 가셨지만, 이젠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몸에 정신이 박자를 맞추는지 매사가 시들하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 의욕만 앞서다가는 탈이 날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는 다행인지 모른다. 늙으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다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같이 등산을 했던 그룹은 지금도 산을 열심히 다닌다. 나는 작년과 올해에 500m 넘는 산을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참살이의꿈 2021.04.17

채현국 선생 어록

우리 시대의 자유인이자 스승이신 채현국 선생이 지난 2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전설 같은 선생의 일생과 삶을 반추해 보며, 몇 말씀을 되새긴다. 고인의 안식을 빈다. 꼰대는 성장을 멈춘 사람이고, 어른은 성장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 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 방황을 겁내지 말라. 방황을 겁내면 늙어서 추해지기 쉽다. 어른들 말은 잘 안 들어도 된다. 어른들의 정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나는 가졌는데 남은 가지지 않으면 미안한 거다. 내가 남의 것을 움켜쥔 거다. 재주나 노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노력해서 이뤘다면 그 사람은 노력을 ..

참살이의꿈 2021.04.05

내맘대로 건강법

나이가 나이인지라 친구들 단톡방에는 건강 관련 글이 자주 올라온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는 건강 상식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건강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그 말이 그 말이어서 대부분 보지도 않고 삭제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허정 박사의 건강 비법이라면서 글을 하나 올렸다. 첫머리의 '자기 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기분 좋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건강의 비법'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인 건강 상식은 무시하고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자고, 내 맘이 내키는 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 너에게 맞는 식사법이 나에게 맞는 식사법과는 다르다. 획일적인 건강 상식은 없다. 박사의 건강법이 평소의 내 생각과 비슷해서 여기에 옮기며 내 생각을 첨부..

참살이의꿈 2021.03.24

나는 행복합니다

이 사나운 세상에서 그나마 주변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술에 적당히 취할 때다. 너무 과해도 안 되고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알맞다. 그 정도면 세상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단, 주변이 시끌벅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수다 가운데서는 그런 기분을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주신(酒神)을 영접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아내가 처가에 갔다. 같이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아내만 내려갔다. 며칠간 혼자서 지내게 되었다. 몇 가지 계획이 궂은 날씨로 틀어지고 외출도 못한 채 집 안에서만 보내고 있다. 하필 이런 때 미세먼지가 몰려오고 하늘까지 잔뜩 찌푸릴 게 뭐람. 그러나 외로움을 즐길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평상시에..

참살이의꿈 2021.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