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15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입에 녹는 안심살, 감칠맛 돌가자미, 세상의 별난 음식 먹어봐도 몇 번이면 물리고 말지. 고구마밭 지심맬 제 이랑 고랑 지천으로 자라 뽑아도 뽑아도 질긴 생명력으로 힘들게 하던 쇠비름, 다른 놈들은 뽑아서 흙만 털어놓으면 햇볕에 말라 거름이 되는데 이놈은 말라죽기는커녕 몇 주 후라도 비가 오면 어느새 뿌리를 박고 살아나지. 하는 수 없이 밭고랑 벗어난 길에 던져놓아 보지만 오가는 발길에 수없이 밟혀 형체도 분간 못할 지경이 되고서도 비만 오면 징그럽게 살아나는, 시난고난 앓고 난 뒤, 먹고 싶었다. 푹 삶은 쇠비름, 된장 고추장 고소한 참기름으로 비빈 -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쇠비름을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생 시절 읍에서 외할머니와 둘이 살 때, 여름 별미는 된장으로 무친 쇠비름이었다. 보..

시읽는기쁨 2021.06.29

잡초 비빔밥 / 고진하

흔한 것이 귀하다. 그대들이 잡초라고 깔보는 풀들을 뜯어 오늘도 풋풋한 자연의 성찬을 즐겼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숱한 맛집을 순례하듯 찾아다니지만, 나는 논 밭두렁이나 길가에 핀 흔하디흔한 풀들을 뜯어 거룩한 한 끼 식사를 해결했느니. 신이 값없는 선물로 준 풀들을 뜯어 밥에 비벼 꼭꼭 씹어 먹었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이 개망초 민들레 질경이 돌미나리 쇠비름 토끼풀 돌콩 왕고들빼기 우슬초 비름나물 등 그 흔한 맛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너무 흔해서 사람들 발에 마구 짓밟힌 초록의 혼들, 하지만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나니, 그렇게 흔들리는 풋풋한 것들을 내 몸에 모시며 나 또한 싱싱한 초록으로 지구 위에 나부끼나니. -..

시읽는기쁨 2017.07.21

한 장의 사진(21)

중학생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열다섯 해를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부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만났을 뿐,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철없던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고마움을 몰랐다. 오히려 투정을 많이 부렸다. 내가 그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손주를 돌보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를 안다. 나만이 아니라 동생 넷도 전부 객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컸다.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백수를 하셨으니 장수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백 세를 넘기신 분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서 모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 드..

길위의단상 2015.09.06

등짐 / 임보

꿈에서는 그 꿈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아마 그런갑다 꿈에서 얽힌 일들 깨고 나면 다 풀리듯 이 세상 근심 걱정도 깨고 나면 다 풀릴 걸 등짐만 공연히 지고 등이 휘게 가는 갑다 - 등짐 / 임보 살아 생전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던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 가장 편안한 얼굴을 보이셨다. 등짐을 내려놓으니 그리 마음 편하셨나 보다. 삶이 버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모두들 무거운 등짐 하나씩 지고 사막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스스로 자청해서 진 등짐이고, 근심 걱정 또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인생이다. 죽어서야 벗어놓을 수 있는 등짐 하나씩 지고 우리는 살아간다.그 안에는 등이 휘어질 듯 무거운 돌맹이가 들어있다. 다들 돌맹이를 황금..

시읽는기쁨 2009.09.10

풍장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

시읽는기쁨 2009.08.17

이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1909년에 나셨으니 꼭 100년 동안의 지상에서의 삶이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세 딸을 홀로 키우신 뒤 나중에는 큰딸 집에서 50여 년을 사셨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외손자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넋두리를 자주 들었는데 정말 말처럼 되었다. 마지막 임종이라도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연이 닿지 않았다. 말년의 치매를 앓는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사람을 찾고 기다렸다. 혼자 있는 걸 못 견뎌하셨다. 그만큼 외할머니의 일생에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쌓여 있었다. 이제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니 좀더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짜증이 났을 때는 좀 빨리 가셨으면 하고 바랐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옆에서 딸의 시중을 받으시며 천수..

사진속일상 2009.08.12

그곳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험할까

나흘간 고향집에 머물렀다. 외할머니는 확연히 기력이 쇠약해지셨다. 하루에 겨우 물 몇 모금 드시며 종잇장 같은 몸을 지탱하신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외할머니의 몸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로 가는 길이 왜 이리 험할꼬." 어머니는 자꾸 탄식하신다. 외할머니는 참으로깔끔하신 분이셨는데 이젠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신다. 대소변도 그냥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 슬프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정신을 놓으신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이승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이 힘겹고 고통스럽다. 아내는 사촌과 함께 외할머니에게 대세를 드리고 성당 교적부에 등록했다. 이날 주일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식구가 되는 공동체의..

사진속일상 2009.07.29

외할머니의 기적

외할머니께서 식음을 못하시고 자리에 누우신지 열흘 째가 넘었다. 하루에 죽 서너 숟가락 드시는 게 고작이다. 기력이 없으니 종일 누워서 주무신다. 내가 갔을 때도 누워 계시다가 겨우 눈을 뜨실 정도였다. 음식을 드시질 못하니 몸은 뼈밖에 안 남았다. 다리가 꼭 젓가락 같은데 안타까워서차마 바라보지를 못하겠다. 고향집에는 이모도 와 계셨는데, 모두들죽음에 대한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수를 하셨으니 지금 돌아가셔도 사실 아쉬울 일도 없다. 오래 또는 함께 산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 지금은 도리어 외할머니 본인을 위해서나 딸들을 위해서나 편히 가시는 길이 복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방에 누워 계시던 외할머니가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거실로 혼자 걸어 나..

사진속일상 2009.06.28

외할머니의 귀

외할머니는 올해 호적으로는 100 살, 집의 나이로는 101 살이 되셨다. 치매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시는데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모시고 계신다. 어머니에게 외할머니는 아픈 무릎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100 살을 넘기는가 했는데 바로 한 식구 중에서 생겼다고 어머니는 신기해 하신다. 귓볼이 늘어진 사람이 장수한다는 말이 있는데,그 말대로 외할머니 귓볼은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크다. 고향 동네에서 80이 넘은 분들을 보면 그런 특징들이 보인다. 귓볼과 수명 사이에는 무언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관상을 통해 사람의 성격이나 운명을 예견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나는 내 귀를 만져보고, 또 어머니의 귀도 살펴본다. 아시아의 한쪽 구석에 눈이 작은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나라가 있..

길위의단상 2009.02.10

사람이 이리 기리워서 우에 사노

설날이 점점 쓸쓸해진다. 고향을 찾는 형제도 둘 뿐인데, 그나마 아이들이 커버리니 동생네는 두 부부만 참석했다. 그래서 올 설은 넷이서 차례를 지냈다. 더구나 올해는 여동생도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그런 걸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자꾸 술을 찾으신다. 형제들이 우애있게 지내는 것보다 더한 효도는 없는 것 같다. 저녁에 이종사촌네가 북적거리며 찾아왔지만 반갑지가 않다. 사람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 것도 피곤하고 헛헛하다. 사람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 자신이 밉기도 하다. 사람보다는 먼 산으로 들판으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드디어 고향에 계신 외할머니 연세가 100 세가 되셨다. 출생년도가 1909년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꼭 100 세가 되신다. 백수(百壽)를 한다..

사진속일상 2008.02.08

고향집에서 빈둥거리다

나흘간의 연휴를 고향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졸리면 자고, 책 보고 싶으면 책을 읽고, 그냥 멀뚱히 누워있기도 하고, 나로서는 최대의 사치를 누린 셈이었다. 빈둥거린다는 것은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현대의 생활 법칙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일하기보다는 빈둥거리기를 좋아한다면 이 경제 체제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 상상을 즐기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껏 게으름을 부려 보았다. 세상이 아무리변했다고 해도그래도 아직 시골 마을은 정으로 얽힌 공동체다.시골 사람들의 화법은 도시와는 다르다. 시골에는 아직 도시와는 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영위해왔던 생활방식이고 사고방식이다.그러나 시골의 노인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전통적 의미의 정은 박물관의..

사진속일상 2007.12.25

고향집에서 쉬다

고향집에 내려가서 일주일간 푹 쉬었다. 한 주일 내내 비가 오면서 날씨까지 도와줘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빈둥거리며 지냈다. 책을 몇 권 들고 갔으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어머니는 매일 밭에 들르시고, 반짝 볕이 난 한낮에는 고추 첫물을 따셨다. 어머니의 밭은 역시 단정하고 깔끔했다. 어머니의 실력은 집안 살림보다는 들일에서 발휘된다. 밭을 왕복하는 길에서 만나는 미루나무 풍경이 아련하고도 서럽게 내 마음을 울렸다. 하루는 동생네가 다녀갔다. 바람에 찢어진 비닐하우스를 새로 고쳤다. 저녁에는 숯불에 구워먹는 삼겹살과 고등어구이가 아주 맛났다. 그러나 동시에 비어있는..

사진속일상 2007.08.12

상사화

외할머니는 20대에 혼자가 되셨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딸 셋을 키우고 청춘의 긴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살아오셨다. 그리고 늙어서는 외지에 나간 외손주들을 기르느라 객지 생활로 평생을 사셨다. 외할머니의 속을 어린 손주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있었을까? 예전 어느 날 고향 집 화단에 핀 상사화를 보고 넋두리 하시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꽃은 잎을 못 보고, 잎은 꽃을 못 보고, 얼마나 애달플꼬." 그 말은 분명 당신의 신세를 꽃에 견주어 말씀하신 것으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당신의 일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었고, 우리도 또한 물어보지 못했다. 저 상사화를 보면 그때 외할머니의 슬픈 표정이 떠올라 괜히 서글퍼진다. 교정에 상사화가 무리를 지어 피었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왔..

꽃들의향기 2006.08.01

외할머니

나는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을 떠나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학교가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읍내에 방을 얻어 외할머니가 내 뒷바라지를 해 주신 것이다. 그 뒤로 동생들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 집 다섯 남매는 모두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성장하였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외할머니와 함께 보낸 셈이 된다. 당시에는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 것에 불평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가 고생을 무척 많이 하신 것 같다. 사춘기를 겪는 반항기의 외손주들을 하나같이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당시에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다. "00 니는 인정머리가 하나도 없다." "외손주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데 내가 왜 이리 헛고생 하는지 모르겠다." 왜 이런 부정적인 기억이 강하게..

사진속일상 2005.07.17

2004 추석

넷이서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하나는 송편 빚는시범을 보여주는 어머님의 손이고, 하나는 딸 아이의 손이고, 나머지는 조카 둘의 손이다. 우리 집에서 송편 만들기는아이들 몫이다. 내 어린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추석 송편 만들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이쁘게 안 나온다고 몇 개 만들다가는 쫓겨나곤 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농작물을 말리는 계절이다. 마당에도 마루에도 방에도 정성스레 수확한 곡식들이 널려있다. 저 고추는 한낮의 햇살을 쬐다가 밤이 되면 군불을 땐 방으로 들어가 다시 몸을 말린다. 곡식을 가꾸는 것도 힘들지만 뒷 손질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걸 안다면 작은 곡식 한 알도 헤프게못 할 것 같다. 가을 하늘에 눈이 시리다. 집 마당에서 무심결에 쳐다본 하늘이 너무 파래서 ..

사진속일상 200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