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84

수종사 은행나무(2)

기운차고 늠름하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모습이다. 운길산 중턱 해발 400m쯤 되는 곳, 수종사 입구에 서 있다. 아래로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수종사 중창의 주역은 세조였다. 이 은행나무도 세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1459년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555년 전이다. 이만한 세월에도 세조의 기세는 여전히 나무에 살아있다. 이 나무를 바라보면 왠지 불끈 힘이 솟는 느낌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거인이 된 한 생명체가 있다. 낙담하고 의기소침해졌을 때 이 나무 옆에 서 보라. 가슴을 열고 나무가 주는 기운을 받으라. 당당히 고개 들고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당신은 얻을 것이다.

천년의나무 2014.02.23

송촌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선생의 별서터다. 선생은 45세 되던 1605년에 부친을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집과 정자 두 개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정자 하나만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400년 세월을 지나 말없이 서 있다. 하마석으로 쓰인 노둣돌도 남아 있다. 옆에는 친절하게 말 조각상을 세워 놓았으나 어딘지 생뚱맞아 보인다. 나무는 상당히 노쇠하다. 겨울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가 보다. 선생은 두 나무를 심으면서 한 그루는 오성, 다른 그루는 한음이라고 여기면서 다시 만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역사 야사로 재미있게 읽었다. 별서는 찾아볼 길 없는데 은행나무와 노둣돌이 그때의..

천년의나무 2014.02.18

성내리 은행나무

우리나라에 '성내리'라는 지명은 많다. 성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면, 성을 경계로 성 안 마을과 성 밖 마을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풍기도 조선 시대에는 풍기군이었으니 성내리라는 지명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 성터의 흔적도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풍기군 옛 관아터에 수령이 7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는 무척 노쇠한 모습이다. 전체 조선 시대와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옛 건물은 전혀 찾을 길 없고, 오직 이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상을 증언하고 있다. 나무 옆에는 풍기초등학교가 있다. 국민학교 3학년쯤에 여기로 전학 와서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 학교다. 아마 1961년 경이었을 것이다. 촌놈에게는 전기가 들어왔던 풍기는 휘황한 도회지였다.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면서 풍기 생활..

천년의나무 2014.01.02

올림픽공원 은행나무(2)

넓은 잔디밭과 하늘을 배경으로 덩그마니 자리 잡고 있는 나무다. 도심에서 만나는 색다른 풍경이다. 예전에는 여기에 마을이 있고, 다른 나무도 함께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말끔하게 공원으로 단장되었고, 이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다. 500년의 연륜을 존중해준 탓일까? 평범하지 않은 풍경에는 자꾸 눈이 가게 된다. 극진한 보호를 받는 이 은행나무는 사람들의 주목을 즐거워할까, 아니면 외로움을 느낄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보호구역의 인디언이 떠오른다. 모뉴먼트밸리에서 지프를 몰던 주름살 굵게 패인 그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천년의나무 2013.06.30

세간리 은행나무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곽재우 의병장 생가 옆에 있는 우람한 은행나무다. 아마 곽 장군도 이 은행나무 밑에서 뛰놀며 자랐을 것이다.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1m, 줄기 둘레는 10.3m나 된다. 천연기념물 302호다. 생가 안내문에는 장군의 일생이 이렇게 나와 있다. 곽재우(郭再祐) 의병장은 1552년 8월 28일 이곳 세간리에서 태어나 1585년 별시과거에 급제했으나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파방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유격전과 기습공격에 능했던 장군은 연전연승하며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전란이 끝나고는 성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극심한 당쟁에 실망..

천년의나무 2013.06.10

구량리 은행나무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 초기에 이지대(李之帶)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1394년(태조 3년)에 경상도 수군만호로 있으면서 왜구가 탄 배를 붙잡은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그 후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1452년에는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 이때 한양에서 가지고 와 연못가에 심었던 것이 이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이 전설이 맞는다면 나무의 나이는 560년이 넘는다. 현재 나무 높이는 22m, 줄기 둘레는 12m에 이른다. 천연기념물 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를 찾아가는 길이 옹색하여 차를 몇 번이나 되돌려야 했다. 동네 할아..

천년의나무 2013.05.23

금촌동 은행나무

파주에 간 길에 잠시 만나고 온 은행나무다. 파주시 보호수로 수령이 500년 정도 되었다. 높이는 20m, 줄기 둘레는 5m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한 나무로 믿어서 경사스러운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두 개의 줄기가 V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지금은 많이 노쇠해 보인다. 마을 공동체의 쇠락과 함께 나무도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다.

천년의나무 2013.04.12

구룡사 은행나무

절집의 나무들은 대체로 순하고 단아하다. 원주 치악산에 있는 구룡사 은행나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단정한 매무새가 참하다. 이 나무 때문에라도 절에 들 때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나무는 가지가 많이 퍼져서 사방 어디에서 보더라도 부채꼴 모양이다. 마치 공작이 활짝 날개를 편 것 같다. 안내문에는 키가 19m, 나이는 200살로 나와 있다. 여느 보호수에 비해 나이는 적지만 절 입구에서 가장 먼저 중생을 맞아주는, 부처의 마음을 닮은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2.10.28

영원사 은행나무

이천에 있는 원적산 남쪽 자락에 영원사(靈源寺)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7년(638)에 해호(海浩) 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절 앞에 고운 자태의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비구니 사찰에 어울리게 단아한 여성적 외모다. 나무 역시 은행알이 열린 암나무다. 안내문에 보면 수령이 800년이라고 나와 있는데 첫인상은 그렇게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키는 25m, 줄기 둘레는 4.5m다.

천년의나무 2012.10.13

신륵사 은행나무

훤칠하게 잘 생긴 은행나무다. 신륵사에는 600년 된 나무 세 그루가 있다. 향나무, 참나무, 그리고 이 은행나무다. 어쩌면 나이가 다 비슷한지, 아마 신륵사가 중창된 나옹선사 시대 쯤으로 추정해서 나무의 나이를 정하지 않았나 싶다. 이 은행나무는 두 개의 줄기가 거의 나란하게 뻗어 올랐다. 키는 22m이고, 줄기 둘레는 각각 3.1m와 2.7m다. 한창 장년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년의나무 2012.10.07

용문사 은행나무(2)

천 년의 나무를 보러 용문사에 간다. 마음이 소란해질 때면 문득 당신을 만나고 싶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시대 때 태어난 당신, 천 년을 한결같이 한 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살고 계신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당신의 기상은 여전히 대단하다. 천 년이 하찮은 듯 잎은 더욱 빛나고, 열매는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당신 옆에 서면 내 좁은 소견이 부끄러워진다. 속마음을 들켰으니 그저 합장만 할 뿐이다. 새로 만든 안내판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

천년의나무 2012.09.27

덕동리 은행나무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에 있는 은행나무다. 수령은 600년 가까이 되었고, 나무 높이는 25m, 줄기 둘레는 6.6m나 되는 거목이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어 더욱 위풍당당하고 웅장하게 보인다. 완전히 노출된 지대여서 바람이 심할 텐데 나무는 긴 세월을 잘 견뎌왔다. 그동안 천 개가 넘는 태풍을 만났을 것이다. 이제 노쇠한 몸이 센 바람을 막아내기에는 점점 불가항력이 될 것 같다. 다행히 충북 지역은 일반적인 태풍의 진로에서 어긋나 있어 자연재해가 적은 편이다. 암나무여서 은행이 주렁주렁 많이 열려 있다.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마을을 굽어보며 서 있다.

천년의나무 2012.08.23

풍림정사 은행나무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에 있는 풍림정사(楓林精舍)는 박문호(朴文鎬, 1846~1918)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강당이다. 선생은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개화기의 혼란 속에서 과거를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의 정진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을 지어 깨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이 은행나무는 아담한 정사의 건물과 잘 어울린다. 야트막한 뒷산과 정사, 은행나무, 앞 들판이 고향에 온 듯 포근하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100년에서 200년 사이 쯤으로 보이는데, 아마 선생이 정사를 세우면서 심었을 것이다. 정사에 어울리는 나무이면서 주변 풍경과도 잘 조화를 이루는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2.08.23

행단 은행나무

행단(杏壇)에 있는 유일한 은행나무다. 행단이라고 하면 우선 은행나무가 연상되는데, 실제 현지에서는 측백나무만 있어 어리둥절해진다. 이 은행나무로나마 위안을 삼는다. 나무는 두 그루인데 하나는 고사했다. 살아있는 나무에는 '宋銀杏(Ginko of the Song Dynasty)'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송대에 심은 은행나무라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수령이 1천 년 정도는 되었다. 잠깐 스쳐갔지만 무척 반가웠던 은행나무였다.

천년의나무 2012.08.03

중앙동 은행나무

건강하고 잘 생긴 은행나무다. 과천시 중앙동 구세군회관 운동장 끝에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과천외고다. 이곳 중앙동 일대는 옛날에 관아와 향교 등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이 있다. 이 은행나무도 그중의 하나다. 이 나무의 수령은 400년이 넘었다. 높이는 21m, 줄기 둘레는 4.3m다. 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모습이 무척 예쁠 것 같은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2.03.13

영월암 은행나무

경기도 이천 설봉산에 있는 영월암(映月庵)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중건한 아담한 절이다. 절 앞에는 나옹선사가 중건 기념으로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두 개의 줄기가 나란히 붙어 자라는데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나무다. 전설대로라면 수령은 700년 가까이 된다. 나무 높이는 37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줄기 둘레는 5m다. 그런데 나무가 위치한 곳이 어수선하고 불안해 보인다. 이 은행나무는 영월암을 상징하는 나무가 아닌가. 주변 정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천년의나무 2012.01.11

남촌동 은행나무

인천시 남동구에 있는 남촌동성당 안에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우자 고려 왕족 중 한 사람이 이 마을로 피난해 왔는데, 후에 이분의 묘를 쓰면서 심은 나무가 바로 이 은행나무라고 한다. 수령이 600년쯤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나무는 줄기가 둘로 갈라져서 높이 솟아 있다. 10년 전 태풍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성당 지붕이 파손된 일이 있다고 한다. 노쇠한 듯 보이지만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많이 돋아나고 있다. 나무 높이는 31m, 줄기 둘레는 7m에 이른다.

천년의나무 2012.01.04

장수동 은행나무

수령이 8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다. 인천시에 있는 나무 중에서는 최고령일 것이다. 생김새도 범상치 않다. 다섯 개의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가 뻗어져 나온 모습이 털북숭이 큰 짐승이 웅크려 있는 것 같다. 겨울이라서 나무의 진면목이 다 드러난다. 그러나 잎이 달린 계절이라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나무 높이는 30m, 줄기 둘레는 8.6m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을 이곳은 지금은 옆으로 서울외곽순환도로의 고가차도가 지나가고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등산객들도 많이 지나다녀 북적인다. 나무 보호를 위해 이중으로 울타리를 세웠다. 그러나 나무줄기를 둘러싼 금속 울타리는 아쉽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이 음력 7월과 10월에 제물을 차리고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였고, 집안에 액운이 생기거나 돌림병이 돌면 이 나..

천년의나무 2011.12.17

용계리 은행나무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나무다. 원래 이 나무는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1990년 당시에 나무를 살리기 위해 23억 원이라는 거금을 쓰며 3년 간의 공사 끝에 15m 위로 나무를 들어 올리고 인공산을 쌓았다. 생명토 공법, H Beam 공법, 요철 공법 등의 신기술을 써서 나무를 살리는 대공사를 한 건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 한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에 우리의 건축 기술이 사용되었다는 게 나무 앞에 서면 더욱 뿌듯하게 느껴진다. 나무는 키가 37m, 줄기 둘레가 14.5m나 되는 거목이다. 국내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굵은 나무다. 나이는 700살 가량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

천년의나무 2011.11.22

하송리 은행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와 쌍벽을 이루는 나무다. 줄기 둘레가 14.8m나 되니 오히려 용문사 은행나무보다 더 굵다. 나이도 1,000살이 넘으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은행나무라고 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영월 엄씨의 시조인 엄임의(嚴林義)가 심었다고 한다. 이분은 당 현종(玄宗, 685-762) 때 새로 만든 악장을 보급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파견된 파락사(波樂使)였는데 본국에서 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월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200살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영월읍 하송리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지금은 동네 가운데에 있지만 원래 이곳에는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은행나무 주변은 넓은 공터가 만들어져잘..

천년의나무 2011.11.07

올림픽공원 은행나무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위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 초록 잔디밭 위에 홀로 서 있어 더욱 위풍이 당당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쓸쓸하게 보이기도 한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나무는 고립된 섬이다. 이 나무를 관리하는 체육진흥공단에 부탁한다. 나무 쪽으로 길을 내주고 나무 밑에는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를 마련해주면 좋겠다. 그런다고 나무의 성장에 지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연인들의 속삭임을 듣고,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주며, 나무도 흐뭇해 할 것 같다. 이 나무는 키가 17.5 m, 줄기 둘레는 6 m다. 나이는 500 살이 넘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자태가 멋진, 올림픽공원의 랜드마크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1.09.23

예안향교 은행나무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있는 예안향교를 찾아간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궁화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담장 너머로 바라본 경내에는 안내판만 있을 뿐 무궁화는 보이지 않았다. 기력이 쇠했다더니 이미 수명을 다한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대신 향교 앞에 있는 은행나무와 만났다. 향교와 은행나무는 찰떡 궁합처럼 잘 어울린다. 대부분의 향교에는 이렇게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예안향교가 세종 2년(1420)에 세워졌다는데 이 은행나무의 수령도 그 정도로 추정한다. 키는 17 m,줄기 둘레는 4 m인데 두 줄기 중 한쪽은 많이 상했다. 향교 앞에는 폐가 한 채가 있어 찾는 이 없는 향교를 더욱 쓸쓸하게 한다. 은행나무도 아마 외로움에 힘겨워하는지 모른다.

천년의나무 2011.05.21

맹사성고택 은행나무

아산시 배방면에 있는 맹사성고택은 조선 초의 명정승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살았던 옛집이다. 맹사성은 세종 때에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내며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자 청백리였다. 고려말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원래 이 집은 최영 장군 집안의 소유였는데 한 왕조의 몰락 탓인지 사위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맹사성고택 마당에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1380년 경에 맹사성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전설대로라면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당시 고불은 나무 보호를 위해 단을 쌓고 축대를 만들었으며 뜻이 맞은 사람들과 훗날 나무 아래서공부를 했는데 공자를 본떠서인지 사람들은 행단(杏壇)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나무 높이는 35 m, 줄기 둘레는 ..

천년의나무 2011.03.28

온온사 은행나무

과천시 관문동에 온온사(穩穩舍)가 있다. 절이 아니라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다. 벼슬아치들이 과천에 들렀을 때 묵었던 숙소로 쓰였다. 정조 14년(1790)에 왕이 수원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온온사'라 이름짓고 친히 편액을 썼다고 한다. '온온(穩穩)'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이다. 온온사 옆에 수령이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 개국 당시에 과천 관아터를 이곳에 잡은 뒤 심은 것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키가 25 m, 줄기 둘레는 6.5 m 되는 고목으로, 비록 한양과는 떨어져 있었지만 조선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옛 과천현감들의 선정비가 있어살아있는 은행나무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0.12.02

중앙고 은행나무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정문에 수령이 500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이 나무는 마을의수호신으로 숭앙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가을이면 오곡백과를 차려 놓고 한 해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소원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2008 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은 중앙고등학교는 민족 사학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3.1 운동의 시작도 이곳 중앙고등학교에서였다. 당시에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는데 교장 사택에서의 모임이 3.1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마 이 은행나무 아래서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걱정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은행나무는 중앙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나무의 생육 환경이 너무 나쁘다. 수위실과 인근 주택에 갇혀 ..

천년의나무 2010.09.30

중앙공원 압각수

청주시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다. 수령은 900년 정도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말의 한 고사와 관계되어 유명하다. 고려 공왕양 2년(1390)에 목은 이색(李穡) 등이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을 때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이색과 권근이 모두 체포되어 청주옥에 구금되었는데, 국문이 매우 혹독하여 일이 어찌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비가 쏟아져 한낮이 못되어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 넘쳐서 성문이 허물어져 물이 넘쳐 성안으로 들어오니, 가옥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문사관(問事官)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가 압각수(鴨脚樹)를 붙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석방하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색과 권근이..

천년의나무 2010.08.27

박세당고택 은행나무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선생 고택이 있다. 선생은 쟁론만을 일삼는 조정의 벼슬자리를 버리고 불혹의 나이가 되어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실학 사상을 다듬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석천동(石泉洞)이었다. 고택에서부터 수락산 계곡을 따라가며 선생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문화유적 안내사의 설명을 통해 서계 선생의 면모를 일부나마 알게 되었다.특히 스스로 적삼에 땀을 적시며 채전을 가꾸는 실학 사상가의 모습이라던가, 틀에 박힌 주자학을 신봉하던 당시의 학풍에 반기를 들고 사서삼경을 재해석한 을 저술했다는 데서 비주류로서의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사문난적이란 올가미가 씌워졌지만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

천년의나무 2010.08.13

두곡리 은행나무(2)

겨울에 보는 나무와 여름에 보는 나무가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 3년 전 겨울에 이 나무를 보았을 땐 안스러울 정도였는데여름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처음에는 사실 같은 나무인지도 몰랐다.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동구에 있는 이 나무는 동네쪽에서 바라보면 논의 초록 물결과 어우러져 더 예쁘다. 한 켠으로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모습같기도 하다. 이 은행나무가 있는 두곡2리는 일명 띄실마을이라고 하는데약 500년 전에 진주 유씨가 마을 뒷산에 부모님의 묘소를 모시고 묘소 옆에 띄집을 짓고 시묘살이을 하여 '띄실'이라 불렸다 한다. 당시에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이 은행나무는 마을과 연륜을 같이 하고 있으며 마을의 상징이 되는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0.07.24

전주향교 은행나무

전주향교에는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다. 그중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것만도 다섯 그루나 된다. 수령이 대부분 400년이 넘었다. 향교에 은행나무을 심은 이유는 공자가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행'(杏)은 본래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다. 살구나무가 맞는지 은행나무가 맞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로 해석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전주향교는 여느 향교와 달리 생동감이 있어 보였다. 찾는 사람도 많고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분위기도 고즈넉한 게 아주 좋았다. 안쪽에서는 몇 사람이 모여 창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향교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다섯 그루의 은행나무는 제각기 특색이 있었다. 대체로 단정하고 얌전한 모양새였다. 그중에서 하나만 모양이 특..

천년의나무 2010.06.29

사당4동 은행나무

집에서 가까운 사당4동에 동작구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이 있다.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인데, 모두다 수령이 300년 내외가 된 나무들이다. 그 가운데 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다정하게 서로 이웃하고 있다. 윗가지는 서로 겹쳐져 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좁은 골목길에서 옹색하고 자라고 있지만 예전에는 한양 외곽의 한적한 시골 마을의 동구쯤에 있었을 것 같다. 백 년 전에 찍은 동작구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천지개벽이라 할 정도로 변했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드문드문 서 있는 초가집이 백 년 전의 한양 외곽 풍경이었다. 당시에 이 나무들은 마을의 일원으로써 당당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정경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도시에서 인간들에게 삶의 터전을 ..

천년의나무 2010.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