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14

탄천의 저녁

분당의 바둑 모임이 끝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가 해질녘이 아닌가. 발걸음은 자연스레 탄천으로 향했다. 이번주 초반의 강추위에 얼어붙었을 텐데 며칠간 날이 풀리더니 다 녹았는가 보다. 강물은 윤슬로 반짝였다. 겨울바람이 누그러진 탄천의 하늘은 고우면서 아늑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주일 동안 두문불출했다. 몸이 피곤했지만 마음도 일말의 저기압 상태에 빠졌다. 폐허가 된 앙코르 유적이 준 느낌이 귀국 후에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인생살이의 덧없음이랄까, 뭐 그런 쓸쓸함과 우울한 감정에 잠겼던 탓이다. 문명의 흥망성쇄를 축소하면 개인에게도 그대로다. 살아 애지중지 추구하는 것들이 결국은 바람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와 같지 않은가.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인간 존재와 행위의 의미..

사진속일상 2024.01.28

말죽거리의 저녁

양재동 말죽거리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말죽거리 골목을 걸으며 아련한 옛 추억 하나를 소환했다. 50년 전 이곳에 찾아왔던 기억의 조각들이 단속적으로 스쳐갔다. 1972년이나 1973년이었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N 선교회 멤버들과 같이 농촌 봉사 겸 전도를 왔었다. 예닐곱 명의 일행은 버스를 타고 제3한강교를 건너 말죽거리에 내렸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걸어서 어느 시골 마을 앞에 텐트를 쳤다. 냇가 옆이었는데 아마 양재천이었던 것 같다. 낮에는 농촌 일을 도우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가르치며 전도를 하고, 밤에는 성경 공부를 했다. 닷새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지금은 서울 강남 지역이 되어서 천지개벽을 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당시 말죽거리에 ..

사진속일상 2023.07.21

탄천의 여름 저녁

분당에서 셋이 만나 네댓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니 저녁 무렵이었다.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 탄천에 나가서 산책로를 걸었다. 야탑에서 정자까지 약 6km 되는 거리였다. 장마철이라 공기는 꿉꿉했고, 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매직아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했다. 걷다가 우연히 너구리를 만났다. 도심 하천에서 너구리를 만날 줄이야. 숲에서 살아야 할 녀석이 어찌 인간의 마을 속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저들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쫓겨나듯 피난 온 것일까, 아니면 먹이를 찾아 여기까지 내려온 것일까. 지난 코로나의 경험으로 보건대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면 더욱 불가피한 일이 될지 모른다. 너구리 하면 1980년대에 삼미에서 활약했던 장명부 선수가 떠오른다..

사진속일상 2023.07.09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 복효근

6월 저녁 해 어스름 어둠이 사물의 경계를 지워나갈 때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어두워지는 일이 이리 좋은 것인 줄 이제 알게 되네 흐릿해져서 흐릿해져서 산도 나무도 무엇보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싸웠던 일들도 흐릿 흐릿해져서 개망초 떼로 피어선 저것들이 안개꽃이댜 찔레꽃이댜 안개꽃이면 어떻고 찔레꽃이면 어뗘 개망초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뗘 꽃다워서 좋더니만 이제 꽃답지 아니해서 좋네 이녁 화장을 해서 좋더니 화장하지 않아서 좋을 때가 이렇게 왔네 저녁 이맘때의 공기 속엔 누가 진정제라도 뿌려놓은 듯 내 안에 날뛰던 짐승도 순하게 엎드리네 이녁이라고 어디 다를라고 뭐 죽도록 억울하지는 않아서 세상 다 용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어둠 속에 둥글어진 어깨를 보네 이대로 한 이십 년 한꺼번에 더 늙어지면 더..

시읽는기쁨 2018.09.12

저녁 6시

하루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는 서쪽으로 난 창문 커튼에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는 저녁 6시 근방이다. 지는 해의 잔광을 의지해 읽던 책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무렵, 물끄러미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곱게 익어가는 감의 색깔처럼 젖빛 유리창에, 커튼에 바알간 물이 들기 시작한다. 그 색깔은 부드럽고 은은하다. 한낮에는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을 뽐내던 태양도 지금 이 시간 쯤 되면 한 마리 양처럼 얌전해진다. 우유빛 유리창을 통과한 빛은 한 번 더 유순해져서 마치 꼭 깨물어주고 싶은 아기의 뺨을 닮는다. 나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색깔의 그림자에 넋을 앗긴다. 그리고 마음은 잔잔한 기쁨과 천상에서 내려오는 듯한 평화에 잠긴다.겉으로 보이는 남루한 현실의 모습과는 달리, 세상의 속살은 ..

사진속일상 2008.01.26

아름다운 저녁 시간

늦은 감자를 캐고 옥수수의 첫 수확을 했다. 감자고 옥수수고 올해는 결실이 영 시원찮다. 수 년 중 최악의 결과다. 이것은 주인장의 마음 탓이고, 중간 관리를 제대로 안해 준 탓이다. 초라한 수확물을 들여다보니 주인을 잘못 만나 제대로 영글지도 못했는가 싶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얘들아, 잘 돌봐주지 못해서 미안해!" 두 주 전에 밭고랑의 풀을 뽑고,뽑은 풀로 고랑을 덮어 두었다. 다른 풀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풀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며 살아나고 있다. 지난 번 막바지 장맛비에 힘을 얻었는가 보다. 그래서 다시 뒤집어 주어야 했다. 다행히 아직은 뿌리가 깊지 않아 땅에서 잘 떨어진다. 어찌 보면 잔인한 노릇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작물 가꾸기란 인간의 필요에..

참살이의꿈 2006.08.07

도시의 저녁

빌딩 사이로 해가 넘어간다. 도시의 저녁은 다른 곳에서 보는 석양에 비해 왠지 더 쓸쓸해 보인다. 도시에서의 삶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유랑민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도시인들은 저 빌딩들 사이를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가 보다. 여유있는 퇴근 시간이 된 날이면 일부러 지하철 서너 정거장에서 내려 한강변으로 나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런 저녁 풍경을 가끔씩 만난다. 어떤 날은 인공의구조물들과 어울린 석양이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똑 같은 풍경이건만 그때그때의 느낌이란 내 감정의 반영에 다름 아닌 것 같다. 투영된 내 마음을 풍경을 통해 내가 다시 만나는 것이다. 쓸쓸함이든,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든, 일상의 작은 것에도가슴 떨릴 수 있는 예민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무미건조..

사진속일상 2005.11.28

어느 저녁의 단상

어제는 저녁 하늘을 보러 한 사람과 같이 산에 올랐다. 며칠간 내리던 비가 멈추고 아침에는 맑은 가을 하늘이 나타났는데, 오후가 되면서 다시 구름이 덮이며 기대했던 노을은 보여주지 않는다. 짧은 시간 연한 붉은 기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진다. 잠시 서울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내려왔다. 한 사람과 만나며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젊었을 때는 육체적 미에 눈이 쏠리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정신적인 내면의 아름다움 쪽이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 같다. 육체적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상실이면서 슬프고 아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면에서 바라본다면 나이듦은 도리어 내적 새로움과 원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몸의 노쇠에..

사진속일상 2005.09.24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사라져 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이 시를 읽으면 죽음도 노을처럼 아름다워진다. 안녕히라고 두 손 흔들며 나도 노을 타고 가벼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소멸과 쓸쓸함 뒤에는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도 짧아서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저녁 노을을 보러 앞산에 올라봐야겠다.

시읽는기쁨 2005.09.23

저녁

저녁 어스름이 좋다. 이때는 낮과 어둠의 경계선에 있는 짧은 순간이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면서 사물들은 시시각각 어둠 속에 잠긴다. 낮 동안 색깔을 현란하게 뽐내던 존재들이 이제는 자신의 숨결을 거두고 동일한 회색 톤으로 변해간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똑같이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이때는 돌아감의 시간이고 휴식의 시간이다. 세상의 일들로 소란스러웠던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창 앞에 선다. 멀리 앞집에서 아까부터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느릿느릿 흰색 연기가 처음에는 옆으로 퍼져 나가더니 지금은 곧장 위로 올라가며 십자 모양을 만든다. 아마도 김씨가 사랑방에 군불을 넣고 있을 것이다. 처음 터에 자리 잡았을 때 자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는데 지금은 조금 ..

참살이의꿈 2004.11.09

저녁 한강에서

오랜만에 저녁 한강에 나가 보다. 집이 한강변에 있어 몇 발자국만 걸으면 한강에 나갈 수 있지만 무엇에 그리 바쁘게 쫓기며 살았는지 저녁 산책을 나간 것이 몇 달 만이다. 넓은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낮의 열기를 식혀준다. 강가에 걸터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 젊은 연인들부터 다이어트를 하는지 강변 길을 따라 열심히 걷는 사람들로 저녁 한강은 활기가 가득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하늘을 난다. 그리고 탁 트인 시야가 마음까지 넓게 열어준다. 낮 동안 답답하고 폭폭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위무를 받는다. 강을 바라보며 아내와 나란히 앉는다. 이럴 때는 아내가 친구같다. 어려울 때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기만 하다. 참된 친구란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한다. 점점 어두워지며 건너..

사진속일상 2004.06.12

행복한 시간

자전거를 세워 놓고 강변에 앉아 석양을 본다. 퇴근할 때 자주 만나는 저녁 풍경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 한낮의 분주함과 소란함이 서서히 잦아들고 모든 사물이 무채색 속으로 스며드는 안식과 평화의 시간, 비록 하찮은 하루였을지라도 상처 입고, 상처를 주며 아쉽기만 한 하루였을지라도 어쩐지 모든 걸 다 사랑하고 용서할 것 같은 넉넉한 마음이 되는시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비록 도시의 한가운데지만 이런 저녁 무렵이 나는 가장 좋다.

사진속일상 200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