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39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

시읽는기쁨 2024.02.07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입학식이 따로 없고 자기 생일 아침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덟 살짜리와 열두 살 짜기가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돌려달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할머니와 직장인과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 등록금을 나라에서 다 대주는 나라 달리기 시합 때 아이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골인하는 나라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나라 연간 입국 관광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나라 군대 없는 나라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키우지도 않고 수입하지도 않는 나라 에너지를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 식량 자급을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존중하는 나라 새..

시읽는기쁨 2023.04.06

우리 동네 목사님 /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길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

시읽는기쁨 2023.03.13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작년에 넷플릭스 드라마를 통해 빨강머리 앤을 만난 뒤 소녀 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오래전에 애니메이션으로 빨강머리 앤을 본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은 앤을 사랑하는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다. 책을 통해 앤이 주는 희망과 따스한 위로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나 보다. 나 역시 앤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서 고른 책이다. 책에는 앤의 어린 시절을 그린 '안녕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예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초록 지붕 집에 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이 책은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살기 전의 더 어릴 때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래서 인물의 이름이나 내용에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어려도 앤의 천진한 낙천성이나 긍정 마인드는 마찬가지였다. 앤한테서는 어디서 그런 명랑함..

읽고본느낌 2021.08.07

벌써 삼월이고 / 정현종

벌써 삼월이고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 장이 넘어가고 술 한 잔이 넘어갔다. 목 메이지 말 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 - 벌써 삼월이고 / 정현종 우주 만물과 현상은 쉼 없이 움직이며 변한다. 영원하거나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적 현상일 뿐 언젠가는 사라진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와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지 모른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슬픔과 근심, 치욕마저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목 메이지도 말자. 대신 노래하자. 벌써 삼월이다. 그리고 곧 구월이 될 것이다.

시읽는기쁨 2020.03.04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즐거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 나뭇잎이 손짓하는 곳 그곳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걷다가 너를 생각해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불린 김광석의 노래다. 소년의 맑은 목소리로 들으니 느낌이 색달..

시읽는기쁨 2018.05.04

망국선언문

연초 경향신문에 손아람 작가의 '망국선언문'이 실렸다. '망국(亡國)'이 아닌 '망국(望國)'이다. 어둠이 짙어야 별이 더욱 빛나듯, 절망은 희망을 싹트게 하는 배경이다. 탄식이 깊어야 세상은 바뀐다. 늦게나마 글을 옮긴다. 망국(望國)선언문 어려운 한 해 보내셨습니다.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곳을 지옥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종말을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상력은 최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모든 시점을 우리는 그나마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이 순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연초마다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나긋하..

길위의단상 2016.01.28

초망한 소원 / 이경학

울 엄니 한 번 업어봤으면.... 출세해서 이층집 짓는 욕심은 예전에 부질없는 것인 줄 깨달았고 통일되어 아버지 모시고 고향가는 꿈은 엊그제 신문에서 미적미적 멀어졌으나 이 새벽 닥친 추위에 이불자락 끌어당기며 끝까지 놓치지 않은 하나 남은 소원은, 울 엄니 한 번 업어드려 봤으면.... 휠체어 박차고 일어나 두 발로 떳떳이 서서 울 엄니 따스한 배를 내 등허리에 얹어봤으면.... 저 작은 여인네 손주 안아보시겠다고 연세 많이 드셔서도 끝내 균형을 잃지 않고 계시니, 천성이 명랑한 아낙네 아들 사람 되는 꼴 보시겠다고 그 모진 세월에도 걸음걸이 빠르고 반듯하시니.... 달랑 업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봤으면.... 오래 사시겠다고 다짐하시는 뜻이 나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시겠다는 것이니 그 의지를 믿고..

시읽는기쁨 2014.08.30

진보 교육감에 기대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체 17개 지자체 중 13곳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승리했다. 대단히 기쁘다. 한국 교육의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결과에는 행운도 따랐다. 특히 서울 교육감으로 당선된 조희연 후보 같은 경우는 보수의 분열과 자중지란의 덕을 보았다. 지지율 4%의 낮은 인지도에서 출발하여 극적인 역전승을 했다. 13:4의 승리에는 세월호 참사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고를 계기로 우리 교육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앵그리 맘'은 교육의 변화와 혁신을 바랐다. 박근혜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 표시인 것이다. 학부모의 이기적인 의식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반갑다. 더구나 13명 중에서 8명이 전교조 출신..

길위의단상 2014.06.06

희망

은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뒤인 2011년에 나온 산문 선집이다. 선생이 어떤 분이시고 사상의 바탕은 무엇인지 이 책 한 권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인간적 면모가 진솔하게 드러난 글이 많다. 선생은 글을 쉽게 쓴다. 학자인 체하는 어려운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중학생만 되어도 이 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글을 쓰는 목적은 오직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해서는 누구나 알 수 있게 쉽게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존경하는 노신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의 선생은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고 한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문예인이 아니라, 고난받는 이웃과 함께하려는..

읽고본느낌 2014.03.19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보도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지병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두 딸과 함께 이승을 버렸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읽는기쁨 2014.03.13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극장, TV, CD 등으로 아마 대여섯 번은 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중심인 뮤지컬 영화지만, 나에게는 힘들 때면 꼭 기억나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다. 마리아가 수녀원에서 나오며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독백이다.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는 게 뜻대로 안 되고 답답할 때면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래,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거야. 이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주문과 같은 말이다. 옛말에도 곤궁이통(困窮而通)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니 둘 다 비슷한 의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위기는 기회며, 끝은 곧..

참살이의꿈 2014.03.05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한 구절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시가 있다. 이 시의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도 그렇다. 무언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이 구절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게 인생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슬픔..

시읽는기쁨 2014.02.22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 겨울 사랑 / 박노해 며칠 전에 입춘이 지났고,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끝에 이르렀다. 사계절이 순환하듯 인생에도 주기적인 사이클이 있다. 전에 명리학책을 보다가 10년 주기로 대운(大運)이 찾아온다는 내용을 보고 내 지나온 삶에도 적..

시읽는기쁨 2014.02.07

예천 태평추 / 안도현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 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시읽는기쁨 2013.08.04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 친구들과 통음하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절망한 뒤 밖에 나선 새벽, 깜깜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13.04.16

희망

랍비 아키바가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나귀와 개와 작은 램프를 갖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키바는 헛간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램프를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와 램프가 꺼져 버려 그는 하는 수 없이 잠을 자야만 했다. 그날 밤 여우가 와서 그의 개를 죽여 버렸고, 사자가 와서 당나귀를 죽여 버렸다. 아침이 되자 그는 램프를 갖고 혼자서 터벅터벅 출발했다. 어떤 마을 근처에 다다랐는데,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날 밤 도둑이 습격하여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몰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램프가 바람에 꺼지지 않았더라면 그도 도둑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또 개가 살아 있었더..

참살이의꿈 2013.04.03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새해에는 우리가 모두 선한 마음 짓기를 소망한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마음 중에 제일 아름다운 건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경쟁과 시기, 질투만이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워낙 생존경쟁 시스템에 물들어 있다 보니 한쪽 측면만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복을 짓고 싶다면 우선 마음을 잘 써야 한다. 숨어 있는 선한 본성을 살려내자.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듯 남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지도자나 제도나 법이 좋은 세상을 가져다줄까? 아니다. 사람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 복보다 남의 복을 먼저 빌어준다면 하느님의 나라, 부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 수 있다.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맹자의 사단(四端) 중 사양지심(辭讓之心)에 가까울 것 같다. 현대 ..

참살이의꿈 2013.01.01

토론TV가 있었으면

이번 대통령 선거에 누가 당선되느냐에 관심이 있다 보니 낮에도 TV를 자주 보게 되었다. 지상파 방송은 대선 관련 보도를 거의 안 해서 종편을 주로 봤다. 종편이 여당 편향이라는 걸 알지만, 여와 야를 대변하는 사람들 사이의 토론은 그런대로 봐 줄 만했다. 내가 보기에는 4개의 종편 중에서 그나마 MBN이 가장 나았던 것 같다. 선거 기간 중 종편에 자주 출연했던 사람들이 있다. 정치전문가, 정치평론가라고 부르던데 일부는 정말 자질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 치 혀만 믿고 까불어대는 세객(說客)이라 불러 적당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당파에 너무 편향적이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이번에 박근혜 정권 인수위의 수석대변인으로 뽑힌 윤창중이었다. 이 사람..

길위의단상 2012.12.30

저녁이 있는 삶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한 후보의 구호가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구호로만 치면 단연 대통령 후보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만큼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위무해 줄 말이 있을까 싶다. 회사에 다니는 자식을 보면 이게 사람이 사는 삶인가 싶어진다. 거의 매일 야근에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이다. 부부가 맞벌이하는데 둘 다 사정이 비슷하다. 즐거운 일이라도 밤낮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짜증이 안 생길 리 없다. 얘기를 들어보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평일에 가정생활이 불가능한 건 물론 어떤 때는 주말도 없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일을 시키고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한은 총재가 '야근도 축복'이라는 말을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변명은 했..

참살이의꿈 2012.10.19

제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아세요?

19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투표를 했다. 그러나 투표로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선거란 어쩌면 그들의 지배를 합법적으로 용인해주는 절차인지도 모른다. 서민을 위한다는 권력자를 골라 뽑는다고 서민의 정의가 이루어질까? 그래도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선택하자. 과거의 경험과 현실의 암담함이 투표장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침묵과 무관심은 불의의 세력에 대한 암묵적인 찬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참여가 그나마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고 믿기에.... . . . . . . . . "제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아세요?" "제가..

참살이의꿈 2012.04.11

법륜스님의 희망세상 만들기

바로 이웃 동네인 성남에서 법륜(法輪) 스님의 '희망세상 만들기' 강연회가 열려서 아내와 함께 참가했다. 오전에 열린 강연이었는데 백수인 게 이래서 좋다. 법륜 스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전국을 돌며 강연을 이어오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스님의 강연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즉문즉설(卽問卽說) 형식으로 청중이 질문하면 스님이 즉석에서 대답한다. 그 대답이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고 정곡을 찌른다. 이번에도 넓은 강당의 좌석뿐만 아니라 통로와단상에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위로와 희망과 격려의 목소리를 갈망하고 있음을 느꼈다.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안사회임을 입증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애환을 나누기를 바란다. 그 역할을 스님이 맡고 있는 셈이..

길위의단상 2012.03.15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어부 / 김종삼 새벽에 잠이 깼다. 속이 쓰리다. 날카로워진 감정의 불꽃이 화약고를 건드렸다. 폭발이 일어났다. 제기럴,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는 건가. 너희들에게 보이기 싫어 책상에 엎드려 속울음을 삼켰다. 어린 자식 앞에서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사람과 희망에 대해 믿지 않기로 했다. 항복하지요. 이젠 당신에게 바칠 희생제물도 남아 있지 않아요. 나는 날마다 출렁거린다. 봄 가운데서 북풍한설을 걱정한다. 두렵다. 그리고 미안하다. 견뎌야지. 시간이..

시읽는기쁨 2011.03.30

탐욕의 세계를 바꾸자

G20 서울회의가 다음 주에 열린다. 사람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정부에서만 요란스레 나대는 것 같다. 그런 꼬라지가 꼭 장학사가 찾아온다고 한 날의 옛날 학교 풍경을 연상시킨다. 사실 손님맞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의에서 다루는 의제 내용이다. 세계 흐름을 주도하는 주요국 지도자들 모임이기 때문에 무슨 내용을 의논하는지 당연히 국민에게 자세히 알려야 한다. 홍보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청소하고 쓰레기 줍는데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한 시민이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고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제발 국격(國格)이라는 말이나 안 썼으면 좋겠다. 너무 호들갑을 떨면 국가 열등감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번 서울회의의 의제는 환율, 글로벌 금융 안전망 구축, 국제금융기구 개편, 개도국 성장을 돕기 위한 계획 등..

참살이의꿈 2010.11.06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힘든 일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오늘이 슬프다 해도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것은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옛날 이발소에는 돼지 그림에 이 시의 첫 구절이 적힌 액자가 의례 걸려 있었다. 우리 세대라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시가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글귀가 러시아 시인이 쓴 유명한 시의 한 부분인 줄 전혀 몰랐다. 푸슈킨이라는 이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십대 때는 이 시가 왠지 싫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싼 위로를 준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고뇌하던 시기, 그런 가..

시읽는기쁨 2009.12.05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시읽는기쁨 2009.09.02

인식의 힘 /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힌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 인식의 힘 / 최승호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부제로 달린 짧은 경구 같은 시다. 그러나 시의 느낌이 매우 강렬하다. 날개 돋힌 도마뱀은 중생대의익룡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리가 짧았던 도마뱀은 날쌔고 힘센 공룡에게 쫓기며 대책 없이 무수히 절벽을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런 수천 만 년의 절망이 날개를 돋아나게 했다. 그리고 새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절망이야말로 새로운 도약과 혁명의 출발점이다. 만족한 돼지는 우리 밖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친구여, 절망을 두려워 말자. 절망과 도전이 아니었다면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09.03.23

희망을 팝니다

희망을 팝니다. 싼값에 희망을 팝니다. 소매값1,000 원으로 희망을 사세요. 희망을 찾으러 멀리까지 힘들게 갈 필요가 있나요. 가까운 슈퍼에 들어가시면 무수한 희망들이 진열대 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무 거나 당신의 기호에 맞게 고르세요. 그리고 고귀한 당신을 위해서는 디파트먼트에서 명품 희망과 복도 세일합니다. 연초의 특별세일이죠. 여기에 당신이 원하는 모든 희망과 복이 있습니다. 희망을 사세요. 복을 사세요. 싼값에 희망과 복을 사세요.

길위의단상 2009.01.02

험한 세상을 살아내는 희망

세상이 험해지고 거칠어져가는 것을 아이들의 말에서 느낀다. 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에는 민망해서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들어오면 연신 욕이고 비속어들이다. 주위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여학생들의 입마저 그런 말들로 오염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에서 두 여학생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존나’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너무나 민망했다. 아무리 의미가 변형되었다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면 결코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말이 이러하니 행동 또한 마찬가지다. 이젠 초등학생들까지도 행동이 거칠기 그지없다. 도대체 주위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것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교실이다. 일부 특수학교를 제외하고 대부..

길위의단상 2008.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