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바닷마을 다이어리

따뜻하게 가슴이 데워지며 봤던 영화다. 연말이 되어선지 이 영화가 생각난다. SF 장르를 선호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인간애가 담긴 이런 잔잔한 영화도 좋아진다. 네 여배우의 얼굴만 봐도 미소가 절로 생긴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곱게 자랄 수 있는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는 이야기다.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네 자매를 함께 묶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을 그렸지만 가족애를 뛰어넘는다. 내가 행복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잘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눈에 익다. 가족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잘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남자 캐릭터는 좀 엉뚱하게 나온다. 보살핌이나 배려를 강..

읽고본느낌 2017.12.30

역정

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다. 출생에서부터 기자 생활하던 1963년까지를 기록한 자서전이다. 선생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돼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시골에서 은거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선생의 청년 시절까지만 정리되어 있다. 은 선생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4.19와 5.16 쿠데타를 겪으며 비판적 지성을 키워 나간다. 특히 통역 장교로 근무하며 전장을 누빈 경험은 선생에게 민족과 역사의식을 길러준 귀한 시간이었다. 진실을 찾아 나선 평생의 역정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공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정신은 정의감이다. ..

읽고본느낌 2017.12.25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작가의 산문집이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글 참 잘 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상의 이야기를 이만큼 맛갈스럽게 풀어내는 재주도 드물 것이다. 또한 글의 기저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이 들어 있다. 문체는 솔직하고 명쾌하며 통통 튀지만, 내용은 돌직구처럼 묵직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보내주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는 여자, 존재, 사랑, 일의 네 가지 주제로 되어 있다. 삶의 현장에서 누구나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작가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더구나 예민한 감성이 작은 것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여성의 시각에 대해 남성들은 무지한 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 대해서 배우는 바가 ..

읽고본느낌 2017.12.19

위로받고 싶은 날들

다른 이의 살아온 궤적 흥미롭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산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있고, 내가 걸어온 길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인생의 길이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 가 보지 못한 길이 더 멋있게 보인다. 은 조재호 선생의 자전소설이다.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난 뒤 본인의 일생을 정리한 글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같은 교직에 있었던 분이라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학교와 사회의 범생이였던 나와는 딴판이었다. 파란만장의 불꽃 같은 삶이 책 속에 있었다. 선생은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멋대로 살았을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했을 수도 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는 소위 노는 아이들이 서너 명은 있었다. 그..

읽고본느낌 2017.12.13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제목에 끌려서 읽은 책이다. 교직에 있었을 때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교실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수업 시작 종소리가 저승사자의 호출 소리로 들릴 때가 많았다. 만족한 수업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 수업 붕괴나 학교 폭력은 이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학교가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현장의 최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 교사다. 는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실태를 실사례 중심으로 고발하고 있다. 내가 교직을 힘들어했던 이유는 학교에서 교육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입시 시스템의 한 부속품일 뿐이었다. 선생으로서 열심히 한다는 게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 건지 뻔히 보였다.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노력할수록 역설적으로 반교육적인 행태로 연결되었다..

읽고본느낌 2017.12.08

죽여주는 여자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 늦게서야 보았다. 우리 시대 노인의 성과 가난, 소외 계층의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자극적이거나 웅변조가 아니고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 1인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의 유명도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한 무게감이 있다. 윤여정이 연기한 소영은 파고다공원에서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팔아가며 살아간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으로 통하면서 다른 아줌마의 질시를 받는다.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소영은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죽는 사람보다는 소영의 심적 고통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소영은 일찍 보내주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것..

읽고본느낌 2017.12.01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

화려한 미래 세계를 감상하기에 적당한 영화다. 때는 28세기, 우주 도시인 알파 스테이션에는 3천여 외계 종족이 어울려 살아간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기이한 생김새를 한 생명체를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다. 그러나 종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20세기의 틀을 못 벗어났다. 눈요기에 비해 내용은 별 것 없는 영화다. 특히 진부한 사랑 타령은 영화의 효과를 반감시킨다. 감독은 뤽 베송으로 오래전에 봤던 '제5원소'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두 영화의 배경은 다르지만 주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풀어내는 방식에서는 전작보다 못한 것 같다. 카시안 행성의 빅 마켓, 그리고 우주의 파라다이스라 할 수 있는 뮐러 행성의 풍경은 흥미롭다. 뮐러족은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을 닮았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뮐러족은 그..

읽고본느낌 2017.11.26

지연된 정의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자에게는 너그럽고, 약자에게는 엄격하고 가혹하다. 법원 출입을 해 보면 안다. 힘 있는 사람은 잘도 빠져나가는데, 빽도 돈도 없으면 적진에 떨어진 혈혈단신의 신세가 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절규가 나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 세상 현실이 그렇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의 편에 선 사람이 있다. 전직 기자였던 박상규 씨와 박준영 변호사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또는 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재심을 신청하고 무죄를 이끌어낸다. 는 두 사람이 재심 프로젝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책에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세 사례가 나온다. 앞의 둘은 1999년..

읽고본느낌 2017.11.20

이완용 평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인간에 내재하는 특수한 악마성을 부정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이히만은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 누구라도 악인이 될 수 있다. 반인륜적이거나 반민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매국노로 비난받는 이완용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격적으로 이완용은 술도 마실 줄 모르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다.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기도 했다. 더구나 친일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독립협회 회장을 맡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이라는 글씨도 이완용이 쓴 것이다. 이완용을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매국노라고 비..

읽고본느낌 2017.11.11

아이 캔 스피크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따스하게 그려낸 영화다. 무겁게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인데 유머러스하면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러면서 심금을 울린다. 짜임새도 훌륭해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나문희 배우의 열연이 뒷받침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등장인물 모두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인간미다. 조역으로 나오는 시장 사람이나 공무원 같은 모든 캐릭터가 인간이 품위랄까, 인간다움을 지켜내고 있다.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옥분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시장의 가게 아줌마가 할머니가 위안부로 밝혀진 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거리를 둔다. 그럴 수 있느냐고 찾아가 따질 때 아줌마는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둘이 껴안고 우는 장면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극적..

읽고본느낌 2017.11.06

연대기, 괴물

올해 나온 임철우 작가의 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중,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전쟁의 처절함 대신 현대 문명에서 소외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뭔가 체한 듯한 느낌은 마찬가지다. 이번 소설집인 에는 인생의 가련함이 특히 두드러진다. 첫 작품인 '흔적'은 여객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70대 독거남이 주인공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산속에서 홀로 지내던 당신은 갈 때가 다가왔음을 알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연대기, 괴물'은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60대 노숙자의 이야기다. 전쟁의 상흔이 그를 폐인으로 내몰았다. '세상의 모든 저녁'은 쪽방에서 독거사한 한 노인의 슬픈 이야기다. '간이역'에는 암에 걸린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젊은 부부가 나온다. '이야기 집'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 같다. 단추눈아..

읽고본느낌 2017.10.24

아버지의 땅

임철우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이렇게 묵직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마치 러시아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은 임철우 작가의 단편집이다. '아버지의 땅'을 비롯해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임철우는 주제 의식이 뚜렷한 작가다.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체제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헤친다. 둔중하지만 여운이 긴 울림이 있다. 내용은 어둡지만 문체는 간결하고 짜임새가 치밀하다. 단편소설의 전범을 보는 것 같다. 작품 중에서는 '그들의 새벽'과 '사평역'에 호감이 간다. '그들의 새벽'은 거대 폭력에 굴복하며 보신에만 몰두하는 우리들 소시민을 비유적으로 그린다. 이런 태도는 군화 발자국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에..

읽고본느낌 2017.10.16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1973년에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이 선생은 마흔아홉, 권 선생은 서른일곱이었다. 아동문학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분은 인생의 도반이 되어 사귀었다. 1976년 5월 31일 권 선생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혹시 만나 뵐까 싶어 버스 정류소에서 서성거려 보았습니다." 숨어 살던 권 선생을 세상에 알린 분이 이오덕 선생이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격려하고, 책 출판을 도와주었다. 권정생 선생이 평생을 병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편지를 보니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상상 이상이었다. 아마 편지에서도 이 선생이 염려할까 봐 제대로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썼다는 말이 맞을 것 ..

읽고본느낌 2017.10.10

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

이 책을 읽으며 8년 전 랑탕과 고사인쿤트 트레킹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새겨졌다. 긴 일정이나 5,000m에 달하는 최고 고도가 저자가 체험한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비슷했다. 우리도 추운 1월에 히말라야를 걸었다. 다만 우리는 12명의 단체 트레킹이어서 포터만 데리고 홀로 걸은 저자와는 처한 입장이 달랐다. 는 '2014년 1월 1일, 사직서를 냈다'로 시작한다. 33살의 여자는 그렇게 네팔로 떠났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연이어서 했다. 이 책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에 대한 기록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한 책은 매우 많다. 신선함과 참신성에서 이 책은 뛰어나다. 문장은 통통 튀는 살아 있는 비유와 재치로 넘쳐난다. 마치 현장에서 같이 걷는 듯 생생하다. 경쾌하고 솔..

읽고본느낌 2017.10.02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여행 중에 다시 읽어본 책이다. 릴케가 첫번째 답장을 쓴 1903년은 릴케의 나이 28세일 때로 이미 많은 시를 발표하며 명성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또 몸이 쇠약해서 이탈리아의 휴양도시인 비아레지오에서 쉬고 있었다. 시인이 되기를 지향하는 생면부지의 젊은 청년에게 이토록 친절하고 다정한 충고를 했다는 데서 문학과 사람을 대하는 릴케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편지 교환은 1908년까지 계속된다. 꼭 문학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삶을 대하는 릴케의 진지한 충고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인생의 가치는 외적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 편하고 쉬운 길보다 어렵고 무거운 길을 가야 한다. 자기 내면의 고독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릴케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청년에게 마치 구도자 ..

읽고본느낌 2017.09.27

몽실 언니

초판이 1984년에 나왔으니 30년이 넘었다. 그 뒤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마 '몽실 언니'라는 인지도는 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그 드라마를 꾸준히 본 것 같지는 않고, 까만 치마와 흰 저고리의 몽실이 이미지는 아직 남아 있다. 권정생 선생의 의 감동이 커서 연이어 도 읽어 보았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지만 시대 배경이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다르다. 무엇보다 는 소년소설로 동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체험한 어른들에게 더 공감을 줄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선생이 에서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다. 책의 머리말에도 분명히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은 인간을..

읽고본느낌 2017.09.18

한티재 하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가슴이 멨고 눈물이 흘렀다. 권정생 선생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서럽고 고달팠던 우리네 백성들 삶의 이야기다.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외할머니의 일생 역시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와 다르지 않았다. 청상과부가 된 뒤 새끼와 외손주를 키우느라 어느 곳 하나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전전하며 사셨다. 그나마 배를 곯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은 권정생 선생이 쓰신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북의 안동과 영양 지역이 무대다. 이리저리 짓밟힌 우리 선조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느낌을 전할 수는 없다. 직접 읽어봐야 한다. 그런데 내용이 완결되지 않은..

읽고본느낌 2017.09.10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작가의 글을 읽고 싶어 임의로 골라본 책이다. 전에 읽었던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이 생각났고, 다른 작품은 어떨까, 라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9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미, 준모, 지혜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다. 무대는 역시 강남이다. 세 아이는 모두 하나씩의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이 셋을 단짝으로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강남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아이들의 아픔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이유로 가정이 붕괴된 세미는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지혜는 부모의 불화로 고민이 크다. 준모는 틱 장애로 결국은 학교를 자퇴한다. 아픔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셋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힘든 시기를 헤쳐 나간다. 의식이 건전하고 그 또래에서 생기는 불량기도 없다. 어려운 ..

읽고본느낌 2017.09.04

변신 이야기

고전은 읽었다고 믿고 싶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지 않았을 리 없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꺼내보는 책이다. 내용이나 줄거리는 어느 정도 꿰고 있으니 자기 확신이 생길 만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십중팔구 읽은 적이 없는 책이다. 최근에 읽은 가 그랬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1, 2권이니 고전 중에서도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다. 이윤기 선생이 번역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볼펀치가 정리를 제일 잘 해 놓았지만, 당 시대에 쓴 글을 변형 없이 그대로 보고 싶었다. 디지털 카메라식으로 말하자면 볼펀치가 JPEG라면 는 RAW다. 는 원제가 'Metamorphoses'다. 변형, 변신, 변모라는 뜻으로 사물이 비롯되는 정황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무수한 변신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는 ..

읽고본느낌 2017.08.27

세계의 나무

표지를 펼치면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사진이 시선을 확 끈다. 이 책은 나무를 사랑하는 영국의 토머스 파켄엄이 세계에서 크고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 60그루를 골라 소개한 사진집이다. 나무를 설명하는 글이 현장 분위기와 나무에 대한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어 좋다. 틀에 박힌 식물 해석이 아니다. 나무를 나눌 때 종류가 아니라 '자이언트(Giants)' '난쟁이(Dwarfs)' '므두셀라(Methuselahs)' '꿈(Dreams)' '위기에 처한 나무(Trees in Peril)'로 단원 제목을 정한 것도 특이하다. 지은이는 출판사의 지원으로 4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나무 사진을 찍었다. 자태가 우아하고 개성이 강한 나무들이었다. 지은이의 열정도 그렇지만 마음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지원해..

읽고본느낌 2017.08.19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선생은 EBS의 '노자 강의'를 통해 화면으로 뵌 적이 있다. 전 편을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명료하고 핵심을 찌르는 강의 내용이 노자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열정적인 강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은 그때의 강의를 기반으로 엮은 책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노자 철학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나라 이전까지는 천명의 시대였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가 인간이 주도하는 역사를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면서 덕(德)과 도(道)의 개념이 나타나고, 하늘 대신 인간 중심의 철학이 공자와 노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소명을 받았지만 서로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노자의 눈에 들어온 이 세계는 존재하는 형식이나 운행하는 원칙이 상호의존관계로 ..

읽고본느낌 2017.08.13

기억의 그늘

'디카시'라는 영역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사진에 짧은 글을 붙인 작품은 가끔 봤지만, 디카시로 명명되고 창작의 한 분야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디카시가 새로운 문학 장르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다.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5행 이내의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예술이다. 여기서 '5행 이내'라는 제한이 특이하다. 일본의 하이쿠처럼 간결한 형식에 방점을 두는 것 같다. 디카시를 알고 싶어 강미옥 시인의 를 구입했다. 시인은 블로그를 통해 작품을 접하고 있던 터였다. 아름다운 사진과 그 순간의 느낌을 풀어낸 솜씨가 좋았다. 디카시가 무엇이고, 독..

읽고본느낌 2017.08.07

라이프

화성 탐사에서 가져온 토양을 조사하던 우주정거장의 과학자들이 화성 생명체를 발견한다. 세기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던 생명체는 전기 자극을 받으며 급속하게 성장하여 괴물로 변한다. 그 뒤부터는 우주인과 괴물과의 생사가 걸린 싸움이 시작된다. 우주정거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공포는 극으로 치닫는다. SF 영화에서 우주 생명체는 대부분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라이프' 역시 전형적인 스토리를 따른다. 우주 생명체가 공격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인간 본성의 폭력성과 관계있는 것 같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생명이 진화하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고등생명체의 파멸은 불가피하다. 만약 지능이 높은 우주 생명체가 있다면 ..

읽고본느낌 2017.08.02

글쓰기의 최전선

이 책의 저자인 은유 작가를 안 건 오래되었다. 팔 년쯤 전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이라는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그때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글쓰기 지도에 나서기 전이었다. 블로그에서는 아이들 교육 문제나 일상의 고민을 진솔하게 고백해서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글에는 이 야만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가 있었다. 블로그를 자주 찾게 된 건 작가의 뛰어난 글쓰기 솜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작가는 글쓰기 지도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 뒤로 블로그에는 소홀한 듯하여 아쉬웠다. 은 그동안 작가가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얻은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글쓰기 지도 방식은 독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같이 책을 읽고 생각 나누기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다. 글쓰기의 기교보다..

읽고본느낌 2017.07.26

에이리언 커버넌트

에이리언 시리즈가 다루는 주제는 거창하다. 인류의 시작과 끝이다. 에이리언은 단순한 우주 괴물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와 파괴에 대한 거대한 서사라 할 수 있다. 엄청한 주제를 그런대로 잘 그려내고 있다. 신작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인류의 미래에서 AI의 역할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자의식을 갖게 된 AI는 인류는 파멸시키는 데 앞장 선다. 영화에서는 두 AI가 나온다. 선한 월터와 악한 데이빗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둘은 마치 공모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는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든 창조와 파괴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게 되는지 모른다. 결국은 인류를 멸종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우주를 지배하려 한다. 정확한 결말은 속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A..

읽고본느낌 2017.07.17

무한 묘수

두 권으로 된 강철수의 바둑 만화다. 강철수 하면 발바리가 떠오른다. 발바리는 옛날에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끈 캐릭터다. 그 발바리 스타일이 이 만화에도 등장한다.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백수 김달호는 미미라는 여자애를 만난다. 미미는 다섯 살인데 굉장한 바둑 고수다. 는 이 둘이 합작하여 내기 바둑을 두며 돈을 따먹는 이야기다. 달호가 철딱서니 없는 청년이라면 다섯 살 미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 같다. "멋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자신이 멋있는 사람이 되라!" 이것이 유치원 다닐 아이가 할 소린가 말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두 캐릭터에 강철수의 가벼운 유머가 입혀져 만화는 경쾌하고 흥미롭다. 특히 바둑의 진행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은 긴장감으로 아슬아슬하다. 바둑을 어느 정도 둘 ..

읽고본느낌 2017.07.10

밖에서 본 한국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된 역사는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후대의 올바른 역사 해석은 편향된 거품을 얼마나 잘 걷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역사의 주체를 누구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른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새 정권 들어 국정 역사교과서 사태가 해결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김기협 선생의 는 우리 역사를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려는 시도다. 안에서 쓴 한국사는 민족의 역사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미화하려 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국수주의가 된다. 자신을 똑바로 성찰하지 못하면 정신의 절름발이가 된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

읽고본느낌 2017.07.03

호모 데우스

전작 가 인류가 어떻게 지구를 정복하게 되었는가를 다루었다면, 이 책은 21세기 신기술과 만나게 되는 인류의 미래를 예견한다. 인간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믿는 능력으로 대규모 협력이 가능했고,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을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다. 이 책 에서는 인본주의 혁명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신이 사라진 자리의 빈 구멍을 메워준 것이 인본주의 종교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새로운 교리가 인본주의다. 중세에서는 모든 판단을 종교의 경전이 했다. 진리는 이미 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서 의미와 권위의 최고 원천은 자신의 내면이 되었다. 기아, 질병, 전쟁을 극복한 인류는 자유 인본주의 정신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

읽고본느낌 2017.06.25

나의 산티아고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달할 수 없는 꿈도 있다. 나에게는 산티아고가 아직 그러하다. 그 길에 서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체력적인 이유는 아니다. 지금은 그저 다른 사람의 체험으로 간접 경험을 한다. 이 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독일의 인기 코미디언인 하페가 과로로 병을 얻어 수술을 받고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산티아고를 걸은 이야기다. 42일 동안 800km를 걸었다. 산티아고를 낭만적으로만 볼 수 없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에 20km 넘게 걸어야 하는 건 고행에 가깝다. 인기 연예인에게 산티아고의 숙소나 음식은 견디기 힘든 조건이다. 더구나 각자 다른 사연으로 길을 찾아온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외로움과 정면으로 대..

읽고본느낌 2017.06.19

사피엔스

다섯 달 전에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흥미도 있어 단숨에 독파했다. 인간 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많아 책상 위에 두다가 이번에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이라는 부제대로 동물에서 출발한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는지를 묻고 밝힌다. 지금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한 유기적 생명의 시대에서 지적 설계에 의한 비유기적 생명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사피엔스가 근본적인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한 불장난으로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면 사피엔스는 전혀 새로운 종으로 대체될 것이다. 사피엔스의 종말이 눈앞에 왔다. 아마 우리가 사피엔스의 거의 마지막 세대에 가까워졌다. 저자는 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등장해서 지..

읽고본느낌 2017.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