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패터슨

뉴저지주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은 버스 기사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근해서 저녁까지 버스를 몰고, 퇴근해 저녁을 한 뒤에는 개를 산책시키며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단조로운 일과의 반복이다. 특이한 점은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쓴다. 시 쓰기가 그의 전부라 해도 좋다. 예술가 기질을 가진 아내도 자신의 취향대로 집을 꾸미며 나름의 삶을 즐긴다. 이 영화 '패터슨'은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패터슨 부부의 일주일 동안의 삶을 그린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현 세태와는 정반대의 생활이다. 이런 삶도 충분히 가능하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내면에 숨어 있는 욕구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면 단조롭고 건조한 일상이지만 똑같지는 않다. 영화는 매일 아침 침대에 같이 누워 ..

읽고본느낌 2019.02.18

레 미제라블(3)

1800년대 초반의 파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한 편의 세밀화를 보는 것 같다. 당시에도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첨예했다. 지금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왕당파와 개혁을 꿈꾸는 자유주의파가 대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권의 주인공은 마리우스다. 마리우스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청년 그룹을 통해 눈을 뜬다. 7, 80년대 우리나라에서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의식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마리우스는 할아버지의 후원을 거절하고, 가난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찾아 나간다. 열정적인 활동 이전에 이런 내적 성숙 과정이 있어야 한다. 여기 등장하는 마리우스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고결한 청년으로 그려지고 있다. 장발장과 팡틴은 자베르의 추적을 피해 조용히 숨어 살고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

읽고본느낌 2019.02.11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에 문외한이니 음악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추천하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느지막이 해서 보게 되었다. 서너 번씩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퀸이라는 록 밴드 이름은 알지만 노래는 거의 모른다. 영화를 보니 'We are the champions' 하나만 귀에 익다. 팝송이라도 컨트리풍이나 발라드 같은 조용한 음악만 골라 들으니 퀸의 음악이 마음에 다가올 수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곡이 있는 줄도 이번에 알았다. 퀸의 네 멤버 중 보컬을 맡은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시간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이라이트는 영화의 마지막 20분을 장식하는 웸블리 구장에서의 공연이다. 퀸의 팬인 사람에게는 가슴 뛰게 할 장면이다. ..

읽고본느낌 2019.02.03

레 미제라블(2)

2권의 소제목은 '코제트'다. 밑바닥 삶을 살다 병으로 죽은 팡틴의 가련한 딸이다. 코제트는 엄마와 헤어져 탐욕스러운 테나르디에 부부 밑에서 학대받으며 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탈주한 장발장이 코제트를 구출해 나온다. 추적하는 자베르 형사를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2권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워털루 전투와 봉쇄수도원을 묘사한 장면이다. 워털루 전투만 100페이지 가까이 서술되어 있다. 1815년 6월 18일의 워털루는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 나폴레옹이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위고는 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나폴레옹은 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결정적인 부분은 대포 소리를 못 들은 그루시와 오앵의 움푹 팬 길이다..

읽고본느낌 2019.01.27

못난이 노자

노자(老子)라고 하면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연상된다. 이름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못난이 노자'는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다. 그것도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그의 짝인 은정이도 비슷한데, 은정이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왔다. 이 두 젊은이가 노자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른다. 그런 역발상이 재미있다. 송기원 소설가가 쓴 는 두 젊은이의 생각과 삶을 통해 을 풀이한다. 그래서 아주 쉽게 쓰였다. 오래전 에 연재될 때 읽었었는데 단행본으로 나왔다. 은 81장으로 되어 있지만, 책에서는 12장만 선별하여 해설한다. "생긴 대로 살자." "못난이가 힘이다." "노자를 알면 천하무적이 된다." 이런 주제가 반복해서 나온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노자의 ..

읽고본느낌 2019.01.20

강신주의 감정수업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특히 다양한 감정 변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욕망에 따른 무수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산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부정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멸시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샘솟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본다. 환희나 영광만 아니라 슬픔, 비애, 절망 등의 감정도 우리에겐 소중하다. 은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인 책이다. '감정의 철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기본으로 깔고, 그 감정이 드러난 문학 작품을 소개한..

읽고본느낌 2019.01.15

레 미제라블(1)

민음사에서 나온 빅토르 위고의 완역본 다섯 권을 사서 1부를 읽었다. 올겨울에 전체를 읽어보려 한다. 총 페이지가 2,500쪽이나 된다. 장발장 이야기는 어릴 때 접하고, 소설도 축약본으로 읽은 적은 있으나 완역본은 처음이다. 전체를 읽어보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렀던 책이다. 첫 권인 1부는 소제목이 '팡틴'이다. '레 미제라블'이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걸맞은 인물이 팡틴이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팡틴은 딸 코제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다. 공장에서 쫓겨나서는 몸 파는 여자로까지 전락한다. 장발장인 마들렌 시장의 도움으로 구출되지만, 결국은 딸을 만나지 못하고 병사하는 불쌍한 여인이다. 가난과 차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영혼은 순수하고 고결했다. 혁명 이..

읽고본느낌 2019.01.05

몸과 인문학

동의보감의 눈으로 본 문명 비평 에세이다. 고미숙 선생이 썼다. 신문에 연재된 칼럼이라 길이가 짧고 쉽게 이해된다. 대신 깊은 내용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글 내용은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다. 여덟 개 목차는 몸과 몸, 몸과 여성, 몸과 사랑, 몸과 가족, 몸과 교육, 몸과 정치사회, 몸과 경제, 몸과 운명으로 되어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니다. 병이 나면 의사와 의료기기의 처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몸을 상품화하는 데도 기꺼이 동참한다. 우리가 겪는 숱한 질병과 번뇌의 원인이 여기서 시작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이 명료하게 읽힌다. 특히 스위트 홈이나 모성 신화를 거침없이 공격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워낙..

읽고본느낌 2018.12.29

중세의 사람들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대부분 왕이나 위인, 전쟁 이야기로 되어 있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료의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나에게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더 궁금한 것은 당시 민중들의 삶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민중의 일상을 알고 싶다. 은 그런 호기심을 일부 채워주는 책이다. 서양 중세시대에 살았던 여섯 사람의 삶을 복원했다.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 수녀원장 에글렌타인, 14세기 파리의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상인 벳슨, 직물업자 페이콕이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를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이다. 픽션이 아니라 사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서양의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배웠다. 종교와 신..

읽고본느낌 2018.12.23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고미숙 선생의 글을 읽다가 꽤 오래전에 본 이 영화가 생각났다. 글 제목이 '스위트 홈은 없다'다. 가족은 '상처의 온상'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화폐, 권력과 함께 스위트 홈에 대한 망상을 우리가 깨뜨려야 할 벽으로 본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 나오는 가족 이야기는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뺨친다. 불륜과 돈, 부모 형제간의 갈등이 아버지 장례식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폭발한다. 메릴 스트립은 약물 중독에 구강암 환자로 나온다. 그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세 딸은 내면에 상처를 갖고 있다. 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선인장 같다. 결국 각자는 뿔뿔이 흩어진다. 서로에게 절망하고 해체된 다음에야 다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볼 여유가 생긴다. 내면의 상처를 극복해야 상처의 대물림도 막을 수 있고, 다시 ..

읽고본느낌 2018.12.17

500일의 썸머

토요일 밤에 EBS에서 우연히 본 영화다. 윗집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서, 어쩔 수 없이 거실에 나가 채널을 돌리니 마침 이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은 웬만한 소음은 잊을 수 있다. '500일의 썸머'는 썸머와 톰의 500일에 걸친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썸머가 활달하고 현실적이라면, 톰은 소심한 반면 순수한 청년이다. 썸머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이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썸머는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반면에 톰은 천생연분으로서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둘은 다른 점이 많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여느 젊은이들처럼 데이트를 즐긴다. 싸울 때도 있지만 곧 화해한다. 그런데 300일쯤 된 때, ..

읽고본느낌 2018.12.11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보다 그의 삶이 더 흥미롭다. 처음 쓴 소설이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 뒤 돌연 시골로 잠적하여 은거에 들어간다. 오직 글쓰기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였다. 인간관계를 끊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버티면서 문학과 마주한다. 그리고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세상과 자신과 당당하게 싸워나간다. 그가 문학을 대하는 자세는 수도승 같다. 반항적이며 아나키스트 기질에 더해진 그의 독특한 생활 철학은 문단의 이단아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최근에 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와 이다. 는 중편소설이고, 는 의기소침한 젊은이들에게 주는 에세이집이다. 전에 작가의 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상을 대하는 견해가 당돌하고 파격적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을 무시하는 태도가 시..

읽고본느낌 2018.12.05

퍼스트 맨

인간이 달에 첫발을 디딘 지 50주년이 되는 해가 내년이다. 아폴로 11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1969년 7월, 인류가 최초로 달에 갔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신문에 난 아폴로 기사를 모두 스크랩하면서 나는 우주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7월 20일,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서는 모습을 TV로 보던 흥분은 잊히지 않는다. 이 영화 '퍼스트 맨(First Man)'은 최초로 달에 첫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과 아폴로 11호 이야기다. 우주 경쟁에서 소련에 뒤진 미국은 국력을 집중하여 달 정복에 나선다.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은 선언한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 이 장면이 영화에도 나오는데, 달에 가는 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

읽고본느낌 2018.11.28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자서전이다,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영화를 만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찍으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을 진솔하게 밝힌다. 실제 영화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고레에다 감독의 성장기나 일대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지 모른다. 에는 오직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온다. 영화를 제작한 시대순으로 각 작품을 설명한다.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찍었는지 알게 되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고레에다 감독의 대표 영화는 다음과 같다. 환상의 빛(1995)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공기인형(2009)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읽고본느낌 2018.11.23

역사의 역사

유시민 작가의 역사 교양서다. 이 책은 역사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History of writing history'다. 수많은 역사서 중에서 대표적인 역사서를 고르고, 그 책을 집필한 역사가와 정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설명한다. 인간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왔는지 개관하는 데 유익하다. 동시에 '역사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응답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볼 수 있다. 에 등장하는 역사서는 다음과 같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 이분 할둔 레오폴트 폰 랑케 카를 마르크스 신채호 박은식 에드워드 H. 카 토인비 슈팽글러 새뮤엘 헌팅턴 제레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라리 이 중에는 읽은 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목만 들어본 정도다. 는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필..

읽고본느낌 2018.11.16

모든 것은 빛난다

경쾌한 제목과 달리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철학서다. 저명한 철학교수인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이 공저자다. 부제가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로, 우리 삶이 다시 빛나기 위해서는 고전 시대의 지혜를 되살려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행복한 다신주의자들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에 만연한 허무주의와는 딴판이었다. 우리는 신을 쫓아냈지만 빈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성스러운 마법의 경험은 사라졌고, 세계의 경이로움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생의 반짝이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아레테(arete)'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삶의 '탁월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감사..

읽고본느낌 2018.11.07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영화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고레에다 감독 작품은 거의 다 보았다. '아무도 모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 '엔딩 노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리어리' '환상의 빛' '태풍이 지나가고' '세 번째 살인' 등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어느 가족'은 유감스럽게도 비켜 지나갔다. 고레에다 감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상을 정감있게 담아낸다. 화려한 기교나 볼거리는 없어도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이나 인물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사소한 데서 삶의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평범 속의 비범이랄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지는데, 서정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

읽고본느낌 2018.10.30

김수영의 연인

올해가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된다. 이 책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여사가 쓴 에세이로 김수영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시인을 처음 만나 결혼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별하기까지 두 분의 삶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여사는 1927년생으로 용인에서 시인의 생전 집필실을 재현해두고 홀로 살고 있다. 이라는 책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두 사람은 부부라기보다는 문학 동지이자 연인으로 살았다. 둘은 보통의 부부관계 이상의 공통된 이상을 갖고 있었다. 시인이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사도 여느 여자와는 다르다. 시인이 '아방가드르'한 여자라고 불렀다는데, 여사도 시인 못지않게 파격적인 면모를 보인다. 여사는 시인을 진명여고 2학년 때 만났다고 한다. 연애 ..

읽고본느낌 2018.10.23

나의 이력서

26년 전의 소동이 생각난다. 마광수 작가가 쓴 이 소설이 외설이라는 이유로 작가는 긴급 체포를 당하고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 교수는 연세대에서 해임되고 연금을 못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여파가 결국은 안타까운 자살로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왕따가 되어 명예를 잃고 생계마저 어려운 상황에서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 는 마광수 작가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기존에 발표한 글에서 과거를 돌아본 내용을 추려 펴냈다. 2013년에 나왔으니 근작에 가까운 편이다. 마광수는 대표적인 천재형 작가다. 시대를 앞서간 반골 기질을 타고났으니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연애나 서클 활동 등의 화려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도 성적은 1등으로 졸..

읽고본느낌 2018.10.18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열고, 외교관 남편을 만나 세계 일주를 다니며 호화롭게 살다가, 파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에 빠져 이혼당하고 몰락한 여자, 겉으로 보는 나혜석의 삶이다. 나혜석의 삶은 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에서는 나혜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그녀는 3.1 독립운동 시위 관련자로 수감되기도 했고, 음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조선 여성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야학을 설립했고, 가부장 문화에 도전한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에는 소설을 비롯한 나혜석의 작품이 실려 있고, 간단한 해설이 붙어 있다. 나혜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정..

읽고본느낌 2018.10.10

바그다드 카페

황량한 모하비 사막 가운데 문제투성이인 '바그다드 카페'가 있다. 여주인인 브렌다의 삶은 고단하고 거칠다. 자식은 천방지축이고, 게으름뱅이 남편과는 매일 싸우는 게 일이다. 총으로 협박당한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과 여행을 하던 독일 여성 야스민은 말다툼 후 트렁크 하나만 들고 길에 남았다. 여관을 겸하고 있는 바그다드 카페를 찾으며 브렌다와 만난다.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때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야스민은 카페를 청소하며 분위기를 바꿔 나간다. 물과 기름 같던 사람들 사이에 웃음이 되살아난다.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야스민의 따스한 인간애가 카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화시킨다. 마치 떠나간 남편에게 화풀이하듯이(?). 그런 야스민이 남편과는 왜 소통이 안 되었는지 살짝 궁금해진다. ..

읽고본느낌 2018.10.05

꼰대 김철수

나이가 들면서 경계하는 일 중 하나가 꼰대 소리를 듣지 않기다. 대부분의 꼰대는 제가 꼰대인 줄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꼰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늙은이나 선생님을 가리켜 청소년이 사용하는 은어'라고 나와 있는데,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으로 주로 쓰인다. 노인 중에 꼰대가 많은 건 당연하다. 꼰대는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다. 자기 경험과 사고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혼자 무엇을 믿든 상관할 바 아니나, 남에게 지적질하고 훈계하니 문제다. 간섭, 지적, 조언, 충고, 호통 등이 꼰대 짓의 모습이다. 여기에 권위가 더해지면 그 폐해가 심각하다. 꼰대는 정신 질병이다. 이 책 는 꼰대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읽으면서 뜨끔한 부분이 많다. 꼰대란 고정관념을 진리로 ..

읽고본느낌 2018.09.27

바보아재

유순하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소설'이라는 부제대로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은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념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단편을 요약하면, 1) 바보아재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연상시킨다. 유치원생 정도의 지능이지만 착하고 순수한 바보아재와의 추억을 통해 영악해진 우리의 삶을 반성한다. 바보아재는 천수를 누리고 누구보다 많은 문상객의 조문을 받으며 세상을 뜬다. 2) 얼굴 하얀 그 사람 데레사 수녀가 세운 인도의 '임종의 집'에서 만난 한 한국인의 죽음을 그렸다. 아무 인적사항이 알려지지 않은 그는 자신이 평생 봉사한 '임종의 집'에서 쓸쓸히..

읽고본느낌 2018.09.15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온 지 14년이 되어선지 최근에 나온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냉소적이면서도 싱싱한 야성의 냄새가 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이하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교양 없이 막돼먹은 사람들이 주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태를 고발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더러운 욕망의 카니발에 그들은 민낯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척 할 뿐이다. 책 제목으로 삼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장과 절을 흉내 낸 형식이 재미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나니'가 1장 1절이다. 최순덕은 열심 신자인 부모 밑에서 오..

읽고본느낌 2018.09.09

여왕 마고

올 초 이탈리아에 여행 갔을 때 가이드가 메디치가를 설명하면서 카트린에 대한 일화를 재미있게 소개해 주었다. 어떤 여인인지 궁금하던 차에 마침 이 영화를 알게 되었다. 주인공은 카트린의 딸인 마고지만, 카트린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카트린이라는 인물과 그 시대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영화다. 카트린은 메디치 가문이 쇠락하던 1519년에 태어나서 프랑스 왕자에게 시집을 간다. 당시에는 이런 정략결혼이 다반사였다. 낯선 외국에서 카트린은 외롭게 살아간다. 남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결혼 후에도 그 관계는 공개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편인 앙리 2세가 죽은 뒤부터 총명한 카트린은 실권을 잡기 시작한다. 그녀는 항상 검은 상복을 입었고, 왕인 아들 뒤에서 섭정으로 프랑스를 이끌었다. 영화는 1..

읽고본느낌 2018.09.03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예수가 언제 어떻게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바트 어만(Bart D. Ehrman) 교수의 저작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 질문과도 연관이 있다. 기독교는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예수가 직접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래아의 가난한 예언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신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저자는 예수를 '묵시론적 예언자'로 이해한다.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묵시론적 열정이 퍼져 있었다. 사악한 시대를 끝낼 메시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예수 역시 악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 하느님이 곧 개입하리라고 가르쳤다. 하..

읽고본느낌 2018.08.29

수인

황석영 작가의 자전 기록이다. 1943년 출생에서부터 1998년 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55년간의 삶을 담았다. 1권은 '경계를 넘다', 2권은 '불꽃 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구성이 특이하다. 감옥 생활 여섯 꼭지를 중심으로 사이사이에 과거 기록이 들어 있다. 순서를 거스른 의도적인 배치가 내용에 포인트를 준다. 시대순으로 재배열하면 이렇다. 유년(1947~1956) 방랑(1956~1966) 파병(1966~1969) 유신(1969~1976) 광주(1976~1985) 출행(1985~1986) 방북(1986~1989) 망명(1989~1993) 감옥(1993~1998) 제목에서 보듯 파란만장한 생애다. 대부분이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바쳐져 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

읽고본느낌 2018.08.23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여름에는 소설 읽기가 제일이다.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계속될 때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소설을 벗하는 게 최고의 피서다. 전기료가 걱정된다지만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힌다. 재미있는 소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는 이기호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는데 이야기가 경쾌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어 좋다. 그러면서 단단한 뼈대를 숨기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탄원의 문장'이 제일 인상 깊었다. 대학교에서 일어난 과실치사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다. 후배들 기강을 잡는다고 선배들이 강압적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훈계를 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읽고본느낌 2018.08.16

영초언니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의 소설이다. 작가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200일 넘게 감옥살이도 했다. 당시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영초 선배 이야기를 이 소설에 담았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실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이 기록이 애틋한 것은 소설 주인공인 천영초는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의식을 되찾고 고국에 돌아와 요양중이라고 한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영초언니만이겠는가, 운동의 앞장을 섰던 많은 이들이 고문의 후유증이나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 그려진..

읽고본느낌 2018.08.11

안락사를 부탁합니다

'오싱'을 쓴 하시다 스가코 작가는 1925년에 태어났으니 금년이 93세다. 지금도 수영을 하고 매년 몇 달간은 크루즈로 세계 여행을 즐기며 글을 쓰고 있다. 아흔이 넘어도 총기를 잃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이 책 는 재작년에 나왔으니 91세에 썼다. 부제가 '후련하게 깨끗이 떠나는 10가지 종활 이야기'다. 종활(終活)이란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어느 시기가 되면 종활이 필요하다. 작가는 원고를 정리하고, 집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고, 사후에 부탁할 일은 '종활 노트'에 적어둔다. 동시에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도 한다. 작가의 마음가짐은 '없도록 애쓴다!'이다. 깨끗하고 후련하게 떠나기 위해서는 미련이 없어야 한다. 쓸데없는 기대도 하지 않는 '없는' 삶을 살아..

읽고본느낌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