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최첨단 물리학 이론인 '루프양자중력'을 설명하며 우주와 만물의 근본을 탐색하는 책이다.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썼다. 부제가 '우리가 보고, 느끼고, 숨 쉬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이다. 물리학의 두 기둥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상대성이론에서 중력파와 블랙홀을 연구하는 우주론이 발전했고, 양자역학에서 원자물리학의 기초가 닦였다. 그런데 둘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상대성이론은 장들이 양자화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역학은 시공이 휘며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따른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양자중력론은 이 둘의 모순을 해결하며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양자 공간과 양자 시간이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읽고본느낌 2019.10.31

반일 종족주의

책 첫머리가 우리나라를 '거짓말의 나라'로 규정하고, 우리를 '거짓말하는 국민'으로 조소한다. 몇 가지 통계를 뽑아와 이런 단정을 하는 자체가 너무 건방지다. 읽어보면 책 전체가 이런 편견과 확증편향으로 일관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정직함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나 사례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자료만 골라 논지를 펼쳐나가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종족주의'의 '종족'은 민족보다 저차원 개념이다. 샤머니즘을 신봉하고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간주한다. 일부 극단적 주장에서 드러나는 종족주의를 조심해야 하지만, 우리의 정신문화 전체를 종족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차라리 혐한 시위를 일삼는 일본 극우 단체가 종족주의의 표본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일본 ..

읽고본느낌 2019.10.26

일본산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고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우리 정부도 맞대응하며 일본과 맺은 지소미아를 폐기했다. 처음 우려한 것과는 달리 우리 산업계에 미치는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부품 국산화 등 탈일본으로 가는 계기가 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지금은 양국 모두 숨 고르기를 하는 것 같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NO JAPAN' 캠페인이다. 일본 제품 불매와 일본 여행 안 하기 운동이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과거 같으면 불이 붙었다가 금방 사그라지는데 이번은 달랐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들의 혐한 소동도 반일 감정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읽고본느낌 2019.10.18

식구

가족(家族)은 나를 기준으로 배우자와 부모, 자식까지를 가리킨다. 가까운 혈연관계로 맺어진 집단이다. 반면에 식구(食口)는 혈연보다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같이 음식을 먹으며 생활한다면 한 식구로 보는 게 보통이다. 가족과 식구를 겸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가족이면서 식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식구를 직역하면 '먹는 입'이니 그다지 아름다운 말은 아니다.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 제목을 '식구'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는 김별아 작가의 체험적 가족 이야기다. 부제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인데, 가족만큼 빛과 그늘의 양면성이 두드러진 집단도 드물다. 위로와 따스함의 원천이면서 상처와 집착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거의 유일한 피난처지만, 어떤 때는 족쇄가 ..

읽고본느낌 2019.10.10

어른의 의무

일본의 만화가인 야마다 레이지가 쓴 책이다. 지은이는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인터뷰하며 존경받는 어른이 되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자신이 찾아낸 내용을 중심으로 노년이 될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지은이는 이를 '어른의 3가지 의무'라 이름 붙였다. 첫째, 불평하지 않는다. 둘째, 잘난 척하지 않는다. 셋째,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멋지게 나이 드는 비결은 간단하다. 이 세 가지만 실천하면 된다. 반대를 생각해 보면 확실해진다. 매사에 불평만 하고, 잘난 척하며, 무엇엔가 화가 나 있는 노인을 상상해 보라. 누구도 옆에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책의 부제가 '어른의 노력이 모든 것을 바꾼다'이다. 주변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

읽고본느낌 2019.10.04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김규항 선생의 아포리즘이다. 선생의 글에서 핵심 되는 부분을 모았기 때문에 선생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선생의 주장에는 동의되는 부분이 많다. 선생의 글은 간결하면서 주장이 선명하다.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이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

읽고본느낌 2019.09.25

해피 엔드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강렬하게 남아 올레TV에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았다. '해피 엔드'는 올여름에 개봉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자막을 보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것 같다. 만든 이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다. '해피 엔드'는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프랑스 상류층의 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속은 병들어 있다. 밝은 화면과는 대조적이다. 이 영화에서 위페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나온다.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보여준 자립적이고 지적인 여성 이미지가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 영화에서는 위페르의 연기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물질의 ..

읽고본느낌 2019.09.19

다가오는 것들

40대 중반쯤 되면 생의 전환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주변 환경도 변한다. 이루고 성취하기보다 잃고 보내는 일이 늘어난다. 삶이 익숙해지는 대신 심드렁하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받으며 일에서도 변방으로 밀린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 더는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재직하며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부다. 성실해 보이는 남편과 십대 후반의 아들, 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다. 학교에서는 급진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갈등을 빚고, 출판사는 수익 문제로 책 출간을 거절한다. 성장한 자식은 나탈리에게서 멀어지고, 늘 딸에게 의지하려던 어머니도 세상을 뜬다. 이런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다가..

읽고본느낌 2019.09.08

권혁재의 핸드폰 사진관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되었다. 어제 집에 들어오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유치원 아이 둘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핸드폰 앞에 선 아이의 포즈가 모델 뺨쳤다. '사진 인류'라는 말이 실감 난다. 이 모두가 핸드폰 카메라 때문이다. 그러나 핸드폰 카메라 기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대개 비슷하다. 고민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누른 결과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핸드폰 카메라로도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권혁재 사진기자의 은 핸드폰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찍는 비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 나온 사진은 LG V30 핸드폰으로 찍었다. 사진만 보면 정말 핸드폰 사진 맞아, 라고 놀라게 된다. DSLR에 못지 않다. 일반인이 찍은 DSLR 사진보..

읽고본느낌 2019.08.29

그냥

멍석 김문태 선생은 '한글꽃 동심화'라는 독특한 분야를 열어 가고 있다. 동심화는 한글을 그래픽적으로 변형 시켜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동양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풍경화가 아니라 한글이 내포하는 의미를 조형적으로 그려낸다. '웃음'이라는 글씨는 마치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고요'라는 글씨는 기도하는 선승의 모습으로 산속의 정적이 그대로 느껴진다. 은 선생의 동심화 모음집이다. 그림만으로도 좋지만 옆에 붙은 글과 감상하면 감동이 두 배로 된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예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자의 한 획이 그냥 나오지 않는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림 역시 정신의 표현이다.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면 천진..

읽고본느낌 2019.08.24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중, 단편소설집이다.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 7편이 실려 있다. '쇼코의 미소'는 작가의 등단작이면서 젊은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최 작가의 글은 몇 년 전 다른 소설집에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단편을 통해 만났다. 잔잔하면서 진한 감동에 젖게 하는 글이었다. 사회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이 작품 가득 묻어났다. 이 작품은 에도 수록되어 있어 두 번째로 읽었다. 좋은 글은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는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가 그랬다. 인간관계에서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감정과 느낌을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잡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문체는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 소설적 기교도 찾아볼 수 없다...

읽고본느낌 2019.08.16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별아 작가의 백두대간 산행기다. 백두대간 종주는 2년에 걸쳐 40차로 진행되었는데, 이 책은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16차례 산행에 대한 전반기 기록이다. 부제가 '김별아 치유의 산행'이듯이 단순한 산행기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보듬고 사랑하게 되어 가는 치유의 과정을 담았다. 산행 이야기와 작가가 살며 경험한 내적 고뇌가 반씩 섞여 있다. 작가는 집 가까이 있는 산도 오르지 않던 전형적인 평지형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실시하는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 하는 백두대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갑자기 종주에 나서게 되었다. 전문 산꾼도 어려워하는 백두대간 종주다. 등산 초보자가 감당하기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한 달에 두 번씩 주말을 이용했고, 하루 평균..

읽고본느낌 2019.08.10

82년생 김지영

재작년에 화제를 모은 책인데 이제야 읽어 본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로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픽션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이 성장하며 겪는 고통과 심리 상태를 남성이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하대, 심하면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태도 같은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여성은 갖고 있는 것 같다. 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과 여론을 환기한 역할이 크다. 내 딸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82년생이다. 딸 둘만 뒀기에 페미니스트라고 할..

읽고본느낌 2019.08.04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싶어 찾은 책이다. 선생이 문단에 나온 초기에 쓴 짧은 소설 모음집으로, 시기로는 1970년대에 해당한다. 일상을 섬세하고 따스하게 그려내는 선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40대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그래선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젊은 작가와는 다르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정겨운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속 작품을 읽으면 70년대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경제 성장과 부동산으로 부자가 생기기 시작하고, 아파트 문화가 시작될 때였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이 어떠했는지 잘 그려져 있다. 선생의 실제 경험이 작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 나는 20대였으니 마치 앨범의 옛 사진을 보는 듯, 이런 시절이었구나 하고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콩트가 어쩌면 작가의 진면목을 제..

읽고본느낌 2019.07.29

한 글자 사전

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김소연 시인은 언어와 사물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사전에 나오는 한 글자로 된 낱말을 시인의 예리한 촉수로 더듬어 본 결과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미소 짓게 하고, 무릎을 치게도 한다. 낱말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이다. 시인을 따라 시늉을 내보지만 이내 벽에 막힌다. 평시에 주변과 내면을 관찰하고 주시한 내공이 쌓이지 않는다면 버거운 작업이다. 책 한 권 분량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작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전편과 비교하자면 은 집중도에서 에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이 부실하다기보다 전편의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한 글자'지만 여러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산만함 때문..

읽고본느낌 2019.07.24

뒷모습

"뒷모습은 정직하다. 눈과 입이 달려 있는 얼굴처럼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 따라 꾸미거나 속이거나 감추지 않는다. 뒷모습은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다. 뒷모습은 단순 소박하다. 복잡한 디테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한 판의 공간, 한 자락의 옷, 하나의 전체일 뿐이다. 뒷모습은 골똘하다. 골똘함을 얼굴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이 등이다. 뒷모습은 너그럽다. 그 든든함과 너그러운 등에 의지하고 기댈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어머니의 등이 있어서 우리는 업혀서 안심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나와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동지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공격하려는 ..

읽고본느낌 2019.07.17

고야의 유령

스페인 여행 중에 가이드가 스페인 역사 이해를 위해 버스에서 틀어준 영화다. 화면이 작고 흔들려서 눈이 아파 그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귀국하고 나서 올레 영화에서 다시 뽑아 보았다. 이 영화가 그리는 스페인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고야의 유령'은 18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스페인이 무대다. 궁정화가인 고야(Goya, 1746~1828)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의 혼란상과 인간의 사악함,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부패와 음모를 잘 그려낸 수작이다.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유령'은 진리를 내세우면서 인간을 억압한 가톨릭이었다. 스페인 가톨릭계는 교리 수호를 위해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를 다시 가동한다. 로렌조 신부의 마수에 이네스가 걸려들고, 저녁 식사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인으로 몰..

읽고본느낌 2019.07.12

기생충

지난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기념이 될 성과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 '기생충'이 최초다. 최근에 우리나라가 문화 예술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잠재력이 깨어나 빛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잔뜩 기대를 갖고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수가 9백만을 돌파하면서 힘이 꺾였는지 넓은 극장에는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처음에는 난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이 흘러서야 나름의 감이 잡힌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선'과 '냄새'다. 둘 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경계..

읽고본느낌 2019.06.20

스페인: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이달 하순에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가는 나라의 개략적인 역사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이 책을 읽었다. 부제가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이다.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서희석 작가와, 역사학을 전공한 스페인 사람인 팔마 씨가 공저자다. 스페인 역사는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 전후의 로마 제국 시대, 5세기 무렵의 서고트 왕국 시대, 8세기부터 13세기경까지 이슬람 점령 시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전성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 쇠락기, 1900년대의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정권의 근현대 등이다. 에서는 1700년대까지의 스페인 역사가 서술된다. 근현대사가 빠진 것이 아쉽다.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는데 전혀 설명이 없다. 대신 왕권 투쟁이나 ..

읽고본느낌 2019.06.13

바림

나무의사 우종명 선생이 쓴 나무에 관한 에세이다. 그러나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묵직하다. 철학, 문학 등 다방면의 지식이 나무 이야기에 섞여 씨줄 날줄로 교차한다. 나무와 평생을 함께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 녹아 있다. 나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선생의 일가견을 글을 통해 접한다. 책은 5부로 되어 있다. 1부는 나무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오랜 시간이 낳은 선물일 것이다. 2부는 나무 예찬이다. 향기로운 나무, 뿌리 깊은 나무, 아름다운 나무, 죽지 않는 나무로 나누어져 있다. 3부는 나무의 본성과 생태적 특징을 다루었다. 생물학적 관찰에서 얻은 결과다. 4부는 나무가 우리에게 베푼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몽상, 걷기, 풍경, 치유로 되어 있다. 5부는..

읽고본느낌 2019.06.07

로망

먼 남의 얘기가 아니다. 당장 내 얘기일 수 있다. 아주 가까이는 아흔 살이 다가오는 양가의 어머니가 계시고, 우리에게 지금 바로 이런 일이 닥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로망'은 함께 치매에 걸린 70대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같이 살던 아들 부부는 부모를 감당하지 못해서 독립해 나갔고, 집에는 부부 둘만 남았다. 동반 치매에 걸린 두 사람의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순재 씨와 정영숙 씨가 부부 역을 맡아서 애틋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로망'이 작품성 있는 영화는 아니다.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공감을 준다. 치매에서 자유로운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제목이..

읽고본느낌 2019.05.29

항거: 유관순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 두 장이 이화역사관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첩에서 발견되었다. 이화 독립운동가들 특별전을 준비하던 중 찾은 것이라고 한다. 열사의 실제 모습을 보니 전에 봤던 영화가 떠오르며 다시 가슴이 찡해진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후 모진 고문으로 숨지기까지 1년 동안의 수형 생활을 보여준다. 후기를 쓰려고 했으나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컴퓨터 앞에도 글을 적을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자책도 응당 따라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울컥해지는 대사가 몇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가 떠오른다. 하나는, 망가진 몸으로 독방에 갇혀 누워 있는 유관순에게 배식 담당하던 노인이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읽고본느낌 2019.05.21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우리 땅에 있는 식물은 19세기 후반부터 서양과 일본 학자들에 의해 채집, 정리되기 시작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식물을 연구할 기회가 없었고, 외국인들 손에 의해 조사된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우리 고유 식물 527종의 학명에 나카이(Nakai)를 비롯한 일본인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327종이나 된다. 무려 62%에 달한다. 슬픈 역사의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식물 이름도 일본 이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많다. 그래서 우리 정서와 동떨이진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면, 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같은 이름은 일본말에 더럽혀진 대표적인 경우다. 식민지 시대의 한계라고 하기에는 너무 슬픈 일이다. 만약 우리 식물학자에 의해 주체적으..

읽고본느낌 2019.05.05

숲속의 은둔자

기이한 은둔자가 있다. 1986년 스무 살이었던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 메인 주로 가다가 돌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27년 동안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27년간 완벽히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노스 폰드의 은둔자'라 불렀다. 나이트가 숨은 곳은 미국 북동부의 메인 주에 있는 '노스 폰드' 호수에 있는 숲이었다. 호수 둘레로 별장만 산재할 뿐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완전히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 그는 바위 사이에 야영지를 만들고 텐트 생활을 27년 동안 했다. 음식을 비롯한 생활 용품은 전부 별장에서 훔쳤다. 별장은 주말에만 사람이 찾아왔고 평일에는 비었다. 나이트는 별장에 사람이 없는 때를 ..

읽고본느낌 2019.04.26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얼마 전에 타계한 키키 키린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인생 후루츠'는 90세의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가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쁘고 맛있게 열매가 영글듯 두 분 노년의 삶이 아름답다. 마냥 부럽기만 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신도시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신도시 개발이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하는 슈이치와는 마찰을 일으킨다. 히데코 할머니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에 할아버지와 철학이 맞는다. 두 분은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그들만의 자연주의 삶을 실천한다. 꽤 ..

읽고본느낌 2019.04.17

고래

긴 겨울밤 시골 사랑방에서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밤새는 줄 모르고 사설에 빠져든다. 낯선 동네와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줄거리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긴장감도 높다.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이 그랬다. 는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2004년에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늦게서야 직접 읽어봤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진 영욕과 성쇠' - 소설에 설명된 구절대로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인생사를 그린 소설이다. 금복과 춘희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읽고본느낌 2019.04.07

탄실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전기소설이다. 김별아 작가가 고발하듯 펴냈다. 김명순의 어릴 때 이름이 탄실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와 시대와의 불화로 지난한 삶을 한 여인이다. 1세대 여성 문인으로서 나혜석과 닮은 점이 많다. 문정희 시인이 쓴 '곡시(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에 그녀의 일생이 잘 그려져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에서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

읽고본느낌 2019.03.27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1979년생. 상하이 자오퉁대학교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상하이 푸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꼬마 깡패'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으로는 소문난 독서광이었으며, 지는 것을 싫어해 공부에서든 놀기 또는 먹기에서든 항상 또래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곤 했다. 환경 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유학을 갔다가, 이른바 '노르웨이 숲'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숲에 미래가 있다'는 비전을 세운 채 중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숲에서 화석 연료를 대체할 에너지를 생산하는 '에너지 숲 프로젝트'를 정부에 제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던 2009년 10월, 갑작스럽게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이륙 준비를 마친 우주선이 카운트다운 직전..

읽고본느낌 2019.03.16

랩 걸

이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Hope Jahren)은 여성 식물학자다. 풀부라이트 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으며, 2016년도에는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책 제목인 에도 나타나 있다. 책 초반부에는 소녀 시절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놀던 추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책은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 설명에 대응하여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일생을 보여준다. 나무가 씨앗에서 떡잎을 내고 성장하고, 시련을 겪으며, 꽃 피고 열매를 맺듯이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자다운 구성이다. 책을 읽으며 제일 놀라운 점은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이다. 과학자가 맞아, 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온다. 작..

읽고본느낌 2019.03.09

레 미제라블(4)

4권의 부제는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그리고 1832년 6월 항쟁을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밝히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이념 대결이 치열했다. 마치 지금 우리의 보수와 진보 갈등을 보는 것 같다. 가족 간에도 이념의 차이로 갈라진다. 마리우스와 마리우스 외할아버스 관계가 대표적이다. 공화파의 과격 계열은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뒤엎으려고 한다.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 혼란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계층은 빈민이다. 소설에서 위고가 제일 연민을 가지는 대상이다. 공평한 분배와 사회..

읽고본느낌 2019.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