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나의 한국현대사

제주도에서 저녁 시간에 틈틈이 읽은 책이다. 유시민 작가가 자신이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까지 55년의 한국 현대사를 본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를 접할 수 있다. 같은 1950년대에 태어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유 작가의 유려한 문장 덕분인 건 물론이다. 책은 다음과 같은 여섯 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제2장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제4장 한국형 민주화: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제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제6장 남북관계 70..

읽고본느낌 2016.01.17

대한민국은 왜?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는 집단은 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 쪽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어두운 면을 부각해 자기부정적 관점을 심어주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독재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리고 진실은 늘 불편한 법이다. 김동춘 선생이 쓴 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을 찾아본 책이다. 집권 세력이 볼 때는 매우 마땅찮아 할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는 강자는 무한대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반면, 약자는 비인적인 삶을 감수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이나 알 권리보다 권력자의 체면이, 국민의 안전보다 기업의 이윤이 중요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고 지은이는 묻는다. 8.1..

읽고본느낌 2016.01.03

투명인간

소설을 읽으며 영화 '국제시장'과 내내 비교되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얘기를 풀어가는 결은 다르다. 영화가 가족을 위해 고생하며 오늘의 풍요를 이룬 세대의 자부심을 그렸다면, 소설 은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의 영화가 제작되어 '국제시장'과 대비시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러 화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인공은 만수다. 부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재산을 다 잃고 화전민이 사는 산골로 숨어든다.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해 글공부는 버리고 억척같이 땅을 일구며 가족을 부양한다. 만수는 육 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외모는 볼품없고 형제들 중 머리도 제일 나쁘지만 심성은 착하기 그지없다.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읽고본느낌 2015.12.30

라면을 끓이며

김훈의 산문집이다. 새로 쓴 글도 있고, 예전에 발표되었던 글도 들어 있다. 밥, 돈, 몸, 길, 글 등 다섯 가지 주제로 글이 묶여 있다. 작가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읽을 수 있으나 잡화점에 들어간 듯 산만한 감도 있다. 글은 역시 김훈 만의 색깔이 드러난다. 문체만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길이 특이하다. 작가의 안테나는 세상살이의 스산함에 주파수가 맞춰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모든 문장에 들어 있다. 작가는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이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김훈의 글에서는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묻어난다. 글 쓰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런 진지함이 느낌의 깊이를 아득하게 한다. 사소해 보이는 존재나 현상에서도 의미를 찾아낸다. ..

읽고본느낌 2015.12.22

여자의 탄생

지난달에 을 읽은 뒤 짝 맞추기로 찾아 읽은 책이다. 여성학자인 나임윤경 선생이 썼다. 두 책 모두 '사회 구성주의'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로 길러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은이의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회 구성주의란 인간이 그들의 신념과 이전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과 현상에 대한 의미를 구성 혹은 만들어간다는 이론적 시각이다. 이를 남자와 여자에 적용하면,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자궁 등 생물학적인 측면을 제외한 특징들은 모두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같은 일정 상황에 있는 남성과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남성은 남성성을, 여성은 여성성을 가지도록 키워진 것이지 선천적으로 고정된 특징은 아니라는 말이다. 타고난 능력이냐, 길러진 능력이냐는 아직도..

읽고본느낌 2015.12.17

선한 분노

강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사립 예술고등학교와 외국 대학에 다녔던 사람이 변했다. 자기계발서를 버렸고 혼자만 잘 산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성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이 어째서 이토록 잘못되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과 희망버스가 계기가 되었다. 는 박성미 씨가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에 대해 쓴 책이다. 책은 사랑, 돈, 혁명의 3개 단원으로 되어 있다. 제일 긴 '돈'에서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의자놀이 게임과 폰지 사기와 같은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자놀이 게임으로 끝없는 노동을 강요하고, 폰지 사기 게임으로 풍요롭다는 착각을 심는다. 사람들은 탐욕스런 경제 동..

읽고본느낌 2015.12.12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는 미국의 생태 시인이다. 선입견 탓인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만큼 물질적이고 세속화된 나라를 대표하는 게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은 올리버의 산문집이다. 산문 역시 시만큼이나 아름답다. 책에는 시도 몇 편 등장하고, 그런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도 있다. 올리버의 생각과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올리버는 자신이 셸리, 파브르, 워즈워스, 바바라 워드, 블레이크, 바쇼, 마테를링크, 에머슨, 카슨, 알도 레오폴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분들과 사상적으로 같은 계보에 속한다. 여기에 소로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다. 산문을 읽으면서 올리버는 여자 소로우라 불러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초절주의 전통을 잇는 시인이다. 여든이 넘은..

읽고본느낌 2015.12.06

이터널 선샤인

재미있게 만든 영화다.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발상이 독특하다. 그러나 삭제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좋아했음을 확인하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인력에 끌려 들어간다. 둘은 다시 만나서 헤어진 비밀을 알게 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진정한 연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영화는 난해하다. 시간이 역순으로 진행되고 어느 것이 기억 속 환상이고 어느 것이 실제인지 헷갈린다. 영화가 주는 의미도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끝나고 나면 이렇게 단순한 것이야, 하고 조금은 허전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 영화로는 특이한 소재를 고른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기억을 아무리 지워도 사랑은 남는다. 모든 사랑은 운명적 만남이라고 해야 ..

읽고본느낌 2015.12.01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글은 묵직하다. 짧은 문장이라도 둔중한 펀치를 맞은 듯 울림이 있다. 하나를 오래 붙잡고 천착하기도 한다. 그동안은 짧은 경구나 몇 편의 시로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읽을 수 있었다. 예언자는 그 시대에 불편한 외침이 되어야 한다.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위기가 닥치기 전에 경고음을 보내야 한다. 이 둘 모두에 해당하는 브레히트는 예언자라 불러 마땅하다. 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집에서 발췌한 글 모음집이다. 사랑, 정치, 예술, 자본, 삶의 지혜, 혁명 등 여섯 주제로 나누어 묶어져 있다. 부담 없이 읽으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골라보다. 사랑 사랑이란 게 뭡..

읽고본느낌 2015.11.28

베트남전쟁

우리 세대는 베트남보다 월남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월남 전쟁이 한창일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극장에 가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월남 소식이 꼭 나왔다. 한국군의 전투 장면과 베트콩 몇 명을 사살했다는 승전 소식, 그리고 대민 봉사활동이 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면사무소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월남 화보집을 재미있게 보았다. 매끄러운 종이에 선명한 칼러 사진이 실린 책이 아주 고급스러웠다. 월남의 아름다운 풍광도 그때 접했다. 씩씩한 군가와 함께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파월장병 환송식도 기억에 새겨 있다. 그러나 월남전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질 나이는 아니었다. 1975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으니 올해가 종전 4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32만..

읽고본느낌 2015.11.22

독고다이

소설가 이기호 씨의 산문집이다. 신문에 연재한 칼럼이라 글 하나의 분량이 짧다. 200자 원고지 3장 정도로 한 페이지에 다 들어간다. '한 뼘 에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호흡이 짧은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책을 읽으며 단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워낙 재미있어선지 하나만 더 읽어보자 하다가 몇 시간이나 붙잡혀 있었다. 사소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대단했다. 글은 전체적으로 경쾌하며 재치가 넘친다. 책 제목인 '독고다이'는 '獨 GO DIE'라 쓰여 있다. 다른 작가의 책 제목을 차용하자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정도의 의미로 읽힌다. 원래 독고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어 발음이다. 글에는 아내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데 무척 지혜로운 여성인 것 같다. 글 중에서 하나를..

읽고본느낌 2015.11.16

남자의 탄생

한 개인의 성장사를 통해 한국 남자의 의식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지은이의 유소년기 개인적 체험을 중심으로 한 인성 형성 과정이 펼쳐진다. 부제가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이다. 요사이 젊은 남자는 그렇지 않지만 전통적 한국 남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똑같이 닮으면서 그 과정이 반복된다. 아들을 편애하는 어머니의 역할도 더해져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된다. 지은이는 한국 남자의 특징을 '동굴 속 황제'라 부른다. 한국의 가정에는 아버지 공간과 어머니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상과 하의 위계질서로 구분된 공간은 아이의 무의식에 지속해서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어머니의 배타적인 사랑..

읽고본느낌 2015.11.11

서민적 글쓰기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그다음으로는 글 잘 쓰는 사람이다. 절대 음치라 노래는 잘 부를 가능성이 거의 제로다. 그러나 글쓰기는 좀 다르다. 그나마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남의 책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주눅이 들 때가 다반사다. 는 서민 선생 본인의 글쓰기 경험담이다. 서른에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서 마흔에 완성했다고 하는 치열한 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글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10년 넘게 블로그에 하루 두 편씩의 글을 올렸고, 책도 많이 읽었다. 노트와 볼펜을 가지고 다니며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선생의 글 색깔이 만들어졌다. 선생의 글 특징은 솔..

읽고본느낌 2015.11.05

덴마크 사람들처럼

전 세계에는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다. 정치 체제나 경제 수준이 각양각색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공자의 '대동사회'는 꿈이었을 뿐 한 번도 실현된 경우는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살기 좋은 나라의 모델이 될 만한 국가는 없을까?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가 우선 떠오른다. 여기엔 덴마크도 포함된다. 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 덴마크를 소개하는 책이다. 행복의 비결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은이가 말해준다. 병원비가 공짜인 나라 대학 등록금도 공짜인 나라 대학생에게 매달 생활비 120만 원을 주는 나라 실직자에게 2년 동안 월급 90%를 주는 나라.... 우리는 복지라는 말을 꺼내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난리를 친다. 그러..

읽고본느낌 2015.11.01

마션

큰 기대를 하고 봤는데 조금은 아쉬웠던 영화다. '그래비티'의 여운이 너무 강한 탓인지 모른다. 화성이라는 무대는 지구 궤도 이상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 텐데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다. CG를 화려하게 써서라도 화성의 다이나믹한 풍경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미련이 남는다. 과장되어 보이는 모래 폭풍도 그다지 잘 그려낸 건 아니다.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는 자신이 가진 과학 지식을 활용해 생존의 방법을 찾아낸다. 거주 모듈 안에 밭을 만들고 감자도 키운다. 흙에 파묻힌 옛 탐사 차량을 꺼내 지구와의 통신에도 성공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1년 이상 홀로 화성에서 버틴 이야기 때문에 내용 전개의 긴장도가 떨어지는 게 흠이다. 요사이 나오는 우주 영화는 허황된 내용이 아니라 과학적 사..

읽고본느낌 2015.10.25

식물의 인문학

지은이인 박중환 씨의 경력을 보면 50세까지 언론계에서 일하다 늦게야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IMF로 직장을 잃은 게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식물을 공부하며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은 그런 지은이가 들려주는 식물 이야기다. 책은 꽃, 잎, 열매, 뿌리의 네 단원으로 되어 있다. 물론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고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여럿 알게 되었다. 계절이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가 꽃을 피운다는 설명은 재미있다. '스트레스 개화 이론'이다. 고사 위기에 있는 소나무일수록 작은 솔방울이 많이 맺히는 걸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식물이 지구의 산소 공..

읽고본느낌 2015.10.21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가슴 따스해지는 산문 모음집이다. 시인, 소설가에서부터 농민까지 서른아홉 분의 주옥같은 글이 실려 있다. 어릴 적 추억, 고향과 가족, 생활 현장, 불의에 대한 저항 등 다양한 소재로 편집되어 있다. 삶의 향기가 나는 훈훈한 글들이다. 책에는 가슴 아린 내용도 많지만 결국은 흐뭇한 미소가 일게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정(精)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가치가 새삼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김선주 씨가 쓴 '자장면과 삼판주'다. 다른 글보다 뛰어나다기보다 작가가 그리는 노년의 꿈이 나의 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허영인지 모르지만 - 외롭고, 쓸쓸히, 고상하게 -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읽고본느낌 2015.10.11

시골 똥 서울 똥

두 달 전 일본 야쿠시마에 갔을 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그곳 산에서는 똥을 누면 비닐에 담아서 내려와야 했다. 화장실은 소변만 볼 수 있었다. 오염이 된다는 게 이유였지만 너무 깔끔을 떠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는데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나라의 잿간 같은 방식을 활용하면 굳이 똥주머니를 배낭에 담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일하고 계시는 안철환 선생이 쓴 순환 농업에 관한 책이다. 선생은 쓰레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순환 농업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찾는다. 똥과 음식물 찌꺼기, 잡초와 농사 부산물 등으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사람은 거기서 소출된 것을 먹고 살며, 나머지는 다시 경작지로 돌아간다. 근대적 농법 이전에 수천, 수만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해..

읽고본느낌 2015.10.06

시골은 그런 곳이 아니다

여주행을 결단하기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사람의 말은 무시했지만 책은 달랐을까? 그래도 번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때는 이미 콩깍지가 끼어서 무엇으로도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자들은 퇴직 즈음이 되면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살아보기를 꿈꾼다. '인생 2막'이니 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도록 부추김도 받는다. 대중매체에는 전원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넘쳐난다. 그런 전원생활 예찬론 속에서 는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찬물을 끼얹는다. 시골의 겉과 속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은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다. 본인도 시골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니 체험적 충고인 셈이다. 너무 한쪽 면으로만 쏠리는 데 대한 경고 메시지다. 균형적 시각을 가지는 데 분명 도움..

읽고본느낌 2015.09.29

세월의 쓸모

학교 동기를 만나면 의레 옛날이야기가 나온다. 공유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진해진다. 동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50년대와 60년대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같은 추억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각자가 경험한 공간은 다르지만 시기의 겹침이 정서적 유대감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추억은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준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세월의 쓸모'도 아마 그런 뜻이리라. 지은이인 신동호 시인은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소는 달라도 시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낡은 것,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살아난다. 시인의 말처럼 과거를 추억하다 보면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불..

읽고본느낌 2015.09.22

대국

한국의 현대 바둑사에서 가장 기억될 대국이라면 조훈현 9단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 맞붙은 1989년의 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5국일 것이다. 전까지는 일본이 세계 바둑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녜웨이핑이라는 천재가 등장하면서 중국 바둑이 크게 융성하자 중국 출신의 대만 재벌인 잉창치씨가 전 세계의 바둑 고수 16명을 초대해 실력대결을 벌여보기로 한 것이 응씨배였다. 우승 상금이 40만 달러로 당시 윔블던 테니스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런 거액을 제시한 데는 중국이 반드시 우승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이때 조훈현 9단만이 초대됐다. 조훈현 9단은 미완의 강자로 여겨졌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16강전에서 왕밍완, 8강전에서 고바야..

읽고본느낌 2015.09.16

1Q84

1, 2권은 전에 읽었는데 한참 사이를 두고 이번에 3권을 마저 읽었다. 1권을 읽을 때의 긴장감은 덜했지만 하루키의 필력에는 여전히 감탄했다. 하루키는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물리교사' 같은 표현에는 무릎을 쳤다. 워낙 문장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보여선지 내용이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체 분량이 2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데도 지루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 읽고 났는데도 선명하게 남는 건 없다. 이건 뭐지, 라는 어리둥절한 느낌이다. 작가의 속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렇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1Q84 세계를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새로운 눈이 떠지고 이후의 세계는 전과는 완전히 ..

읽고본느낌 2015.09.07

중국, 당시의 나라

이 책은 고대 중문과 교수인 김준연 선생이 당시(唐詩)의 흔적을 답사한 중국 기행기다. 선생은 옛날 당나라 지도를 들고 13개 성에 산재한 유적을 찾아다니며 당시 200여 수의 내력을 훑었다. 책에는 다섯 차례에 걸쳐 서쪽 돈황에서 동쪽 태산, 남쪽 계림에서 북쪽 승덕까지 발로 누빈 기록이 마치 내가 현지에 있는 듯 생생하다. 중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는 당시를 만나면 더욱 반갑다. 그중의 하나가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에서 밤에 정박하다(楓橋夜泊)'이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달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가 하늘에 가득 강가 단풍 고깃배 등불과 마주하여 근심 속에 잠들 때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에 들려온다 이 시가 유명..

읽고본느낌 2015.08.30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 관계 일을 하시는 분에게서 몇 달 전에 추천받은 책이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서점을 찾았다가 구입하게 되었다. 그분이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럴 만한 책이란 걸 몇 장 넘기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는 나무를 통한 삶의 지혜와 통찰이 반짝이는 책이다. 저자인 신준환 선생은 국립수목원장을 지낸 분이다. 전문가시니 나무에 대한 박식함이야 논외로 쳐도 나무만이 아니라 생명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깊이가 대단하시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바탕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단순히 나무에 관한 책이 아니라 깨달음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지은이 생각의 중심은 1부인 '나무의 인생학'이다. 그중 한 부분은 이렇다. 큰 나무일수록 많이 흔들린다. 그리고 나무..

읽고본느낌 2015.08.19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어느 분야나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비범한 무엇이 있다. 한 길을 깊이 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다. 외길을 걸어가는 벽(癖)이 있는 자만의 특성이다. 바둑의 고수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조훈현 씨가 이라는 책을 냈다. 고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인생을 사는지 궁금했다. 결국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사 조훈현에게 제일 쓰라린 경험은 자신이 직접 기른 제자 이창호에게 정상을 빼앗기고 무관으로 전락한 때였을 것이다. 책에서도 고백하듯이 이창호가 그렇게 빨리 성장하리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바닥에서 조훈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담담해졌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바둑판이 싸움판이 아니라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오..

읽고본느낌 2015.08.14

쓴맛이 사는 맛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노인이 되면 대체로 고집불통의 꼰대가 된다. 노년의 문화라 부르는 것도 즉물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만족하는 수준이다. 시대를 고뇌하며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노인은 드물다. 작년 신문 보도를 통해 채현국 선생을 처음 알았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라는 제목의 젊은이에게 주는 일갈이 시원했다. 선생의 삶과 생각을 소개하는 이 책 을 읽으며 선생의 진면목을 다시 대하게 되었다. 참 독특한 분이라는 느낌이 신선했다. 선생을 수식하는 말들을 보면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거인, 기인, 거리의 철학자,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째 안에 들었던 거부, 탄광 사고가 난 뒤 사업을 정리해서 나누어준 사업가,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

읽고본느낌 2015.07.29

토리노의 말

외딴곳에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다. 밖은 거센 바람이 불고 건조하다. 종말적 상황이다. 둘은 집안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쪽 팔을 못 쓰는 아버지의 옷을 입혀 주고, 감자 한 알을 먹고, 남는 시간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한 마디 대화도 없다. 관성적인 절망의 몸짓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인류 종말에 관한 보고서라 생각하며 보았다. 핵전쟁이든 기상이변이든 종말의 때가 닥쳤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물의 물마저 말라 버리자 짐을 싣고 다른 데로 옮기려 하지만 폭풍으로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철저히 고립되었다. 나중에는 램프도 켜지지 않는다. 기름이 있는데 불이 붙지 않는 건 산소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핵겨울이 닥치기 전 지표면..

읽고본느낌 2015.07.24

와일드

아버지의 음주와 폭행, 가난 속에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셰릴에게 삶의 버팀목이었던 엄마마저 암으로 죽자 절망한 나머지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다. 급기야는 남편과도 이혼하고 인생을 포기할 즈음에 셰릴은 마지막 구원처로 고독한 걷기를 선택한다. 미국 서부의 산악지대를 따라 난 PCT 걷기에 나선 것이다. 영화는 셰릴이 94일 동안 이 길을 걷는 모습을 과거의 상처와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3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위험한 야생의 숲과 사막을 걷는 길은 한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죽음을 각오한 실존적 결단이 아니면 감히 발을 내디딜 수 없다. 셰릴은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감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여정의 종착지에서 결국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누구에게나 실패와 좌절이..

읽고본느낌 2015.07.18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박이문 선생의 글은 가슴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노년에도 식지 않는 진리를 향한 열정도 부럽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내 소년과 청춘 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 시절만큼은 선생의 경험과 고민에서 공유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한다. 선생은 평생을 진리 탐구의 길로 나갔지만 나는 반짝하고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은 선생의 자전적인 글을 모은 책이다. 진리가 무엇이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을 연구해 온 선생의 결론은 무엇일까. 선생은 말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만이 아니라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당신을 허무주의자로 부르는 것 같다. 동시에 선생은 시와 철학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

읽고본느낌 2015.07.11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이 영화가 개봉될 때는 병상에 있었고, 그 뒤에는 메르스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삼갔기에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영화도 때를 잘못 만났는지 예상보다 일찍 간판을 내려서 최근에 작은 화면으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핵전쟁으로 지구는 종말을 맞고 표면은 사막으로 변했다. 군데군데 소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물과 기름을 차지하려고 끝없이 싸운다. 독재자 임모탄이 지배하는 왕국에서 여전사 퓨리오사가 탈출하면서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전이 벌어진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스릴 넘치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액션 장면만으로도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칭찬받을 만하다. 겉은 부수고 죽이고 하는 마초적인 영화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데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주인공은 맥스..

읽고본느낌 201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