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30

허균의 생각

허균(許筠, 1569~1618)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런 반골 기질에 끌린다. 허균은 성리학과 유교적 가치관을 하찮게 여기고 지배 이념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정신은 수많은 조무래기 사이에서 우뚝하다.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적시하고 저항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허균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비록 소수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역사는 빛난다. 이이화 선생이 쓴 은 허균이 쓴 글을 중심으로 정치, 학문, 문학, 세 분야에서 허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힌다. 내용이 건조하긴 하나 대신 객관적이다. 허균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초판이 1980년에 나왔는데 서슬 퍼렇던 당시에는..

읽고본느낌 2015.03.2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개봉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보게 된 영화다. 극장에서 꼭 봐야지 하다가도 놓치게 되는 영화가 많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랬다. 영화의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케 한 영화다. 영화에서 감독의 역량이 얼마만 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절제와 아름다움이다. 스크린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1930년대의 혼란기, 살인 사건에 연관되어 호텔 지배인인 구스타브와 견습생인 제로가 벌이는 모험담이다. 스릴 넘치는 서스펜스로 만들어질 수 있건만 감독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돈을 둘러싼 음모, 살인, 전쟁 등 심각하게 다루어질 요소가 아이들 장난처럼 재치있고 가볍게 취급된다. 세상사 너무 무겁게 대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원색의..

읽고본느낌 2015.03.14

한 글자

먼 옛날, 사람들이 처음 말이란 걸 하기 시작했을 때 사물의 이름은 단음절이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된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한 글자로 된 말에 주목했다. 는 카피라이터 정철 씨가 쓴 단상집이다. 카피라이터답게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곳곳에 보인다. 짧은 글이지만 쉽게 읽히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삶의 경구로 삼을 만한 내용이 많다. 책을 보면서 나는 건성으로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어 자책한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 얼마나 깊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을까. 지은이가 말한 대로 "세상은 넓고, 나는 한없이 좁다." 책에 나오는 262개 글자 중에서 마음 끌리는 대로 몇 개를 골라..

읽고본느낌 2015.03.10

청동정원

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읽고본느낌 2015.03.05

선비가 사랑한 나무

나무 학자인 강판권 선생이 성리학의 기본 개념에 나무를 접목해 설명한 책이다. 성리학 개념에 어울리는 나무를 정하고, 관계되는 성리학자를 골랐다. 나무를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신선한 시도다. 지은이는 16가지 유교 개념에 하나씩의 나무를 배당했다. 나무, 개념, 유학자가 한 묶음을 이룬다. 옛날 중고등 학생 시절 시험 볼 때 서로 관계되는 것끼리 줄을 그어 연결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들을 섞어 놓는다면 과연 얼마나 의미가 통하게 연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나무 자체의 특징보다는 책 제목대로 선비가 사랑한 나무 정도가 맞을 것 같다. 성리학자들은 나무를 개인적인 학문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근사(近思)의 공부 중 하나가 나무였다. 그것은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모양에서 ..

읽고본느낌 2015.02.27

비유의 발견

좋은 책은 한꺼번에 읽지 못하고 조금씩 아껴가며 읽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읽다가는 책을 놓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에는 100개의 비유가 있다. 지은이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 나오고, 지은이의 생각이 3~4페이지 정도로 적혀 있다. 원본의 비유도 좋지만 지은이의 해설에 더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내내 어른거렸다. 지은이 배상문 씨가 궁금해졌다. 책에 적힌 소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10년이 넘도록 해마다 1,000권의 책을 읽으며 다독(多讀)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른바 생체실험(?)을 해 오고 있다.' 일년에 천 권이라, 하루에 세 권을 읽..

읽고본느낌 2015.02.21

생각의 탄생

제목을 봤을 때는 인간 지능의 진화사 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 도구'라는 부제가 말하듯 천재를 천재답게 만드는 비법 13가지를 다룬다. 차라리 원제인 'Sparks of Genius'가 이 책 내용에 가깝다. 이라는 제목은 멋지지만 내용은 기대했던 것에는 미달했다. 이렇게 온갖 자료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면 지루하고 요점 파악도 잘 안 된다. 정형화된 형식은 책이 말하는 천재성과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는 창조를 이끄는 13가지 생각 도구를 이렇게 정리한다. 1. 관찰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 -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2. 형상화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의 ..

읽고본느낌 2015.02.14

낭비 사회를 넘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계획적 진부화'를 다룬 소책자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세르쥬 라투슈(Serge Latouche)가 썼다. 부제가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다. 경제학에서 진부화란 대체로 기술적 진부화를 가리키는 말로 기술 발전에 의해 기계, 설비 등이 구식으로 전락하여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기술적 진부화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이 고의로 조작하는 진부화가 있다. 하나는 심리적 진부화로 주로 광고를 통해 제품을 빠른 시간에 낙후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행의 변화나 사람 심리를 이용하여 휴대폰이나 자동차의 교체 주기를 빠르게 만든다. 두 번째가 이 책에서 다루는 계획적 진부화다.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공산..

읽고본느낌 2015.02.08

양자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학교에 다닐 때는 적성이 맞지 않아 고민했지만 지금은 물리학을 전공한 게 고맙다. 일반인들이라면 과학 이론에 흥미를 느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용이 딱딱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객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물리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근본 질문과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특히 양자론 같은 현대물리학이 그렇다.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그나마 들은풍월이라도 있으니 과학 서적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포드(K. W. Ford)가 쓴 는 원제가 이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쉽지 않다. 아무리 쉽게 써도 양자론은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한다. 양자론 자체가 너무나 기묘하고 이상한 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본느낌 2015.01.30

국제시장

울고 웃으며 재미있게 보았다. 상당히 잘 만든 영화다.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린 장면도 시대상의 한 단면이다. 너무 이념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처음에는 영화 보길 망설였지만 천만이 넘었다는 호기심 때문에 극장을 찾았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는지 확인하고도 싶었다. '국제시장'은 흥남 철수, 독일 광부 파견, 월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굵직한 현대사의 중심을 살아간 덕수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어버리고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소년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그의 일생을 좌우해 버린다.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그 시대를 살아낸 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 영화는 웃음 코드를 적당히 배치해 놓아..

읽고본느낌 2015.01.23

백석 평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안 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백석의 생애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인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백석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백석이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되살린 건 의미 있다. 책이 쉽게 재미있게 읽혀 좋다.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던 백석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되었다. 결벽증이 있는 모던 보이 백석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화기는 남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싸서 잡고, 악수한 뒤에는 비누로 씻을 정도로 깔끔했다. 남이 만진 물건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멋을 부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양..

읽고본느낌 2015.01.18

관촌수필

오래전에 읽다가 만 소설인데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게 완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설 읽기가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이건 때가 무르익어야 자연스레 된다. 에는 고향의 정경과 인정이 토속어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체에서도 고전적인 향취가 난다. 사라져 간 고향과 사람들을 이만큼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도 만나기 어렵다.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히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작품의 맛을 더한다.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어휘를 구사하자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의 집은 한산 이씨의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증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작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읽고본느낌 2015.01.12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개봉한 지 1년 된 영화다.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그저께 TV 영화보기에서 2천 원을 내고 보았다. 영화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실직을 대하는 월터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닥친 실직은 우리에게 인생의 종말 정도의 엄청난 충격파인데 월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당당함의 비결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특별한 한 개인의 일일까? 최근에 논쟁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보통 사람들도 월터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해임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조정관이나 가족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는 자세 말이다. 실직을 해도 기본 생활이 보장된다면 누구나 월터처럼 살 수 있다. 더 나은 미래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인권에 포함될..

읽고본느낌 2015.01.08

닥터 지바고

신정 오후에 TV로 방영된 이 영화를 거실에서 편하게 보았다. 세 번째 보는 '닥터 지바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 본 게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마 학교에서 단체로 갔을 것이다. 그 뒤에 40대 때 다시 한 번 보았다. 같은 영화지만 나이에 따라 느끼는 점이 다르다. 고등학생일 때는 꽤 난해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베리아 설원의 풍경에 감탄한 것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40대 때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내 토냐에 대한 연민도 컸다. 그런데 60대가 되어 보는 '닥터 지바고'는 혁명과 시대의 격류에 휩쓸린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 시선이 갔다. 모든 인물들의 비중이 거의 대등하게 다가왔다. '닥터 지바고'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 묘사가 뛰어난 영화다. 모든..

읽고본느낌 2015.01.02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시리즈로 나오는 작가수업 과정의 1권이다. 작가가 되려는 것과는 관계없고 제목이 멋있어서 읽었는데 지은이의 글맛에 반했다. 글을 어쩌면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강의록에 기초한 구어체여서 더욱 그랬다. 쉽게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것 같다. 더구나 딱딱한 문학론인데 말이다. 지은이 김형수 씨는 3부작으로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1부는 문학관, 2부는 창작관, 3부는 작가관인데 이 책 창작에 필요한 예비지식들과 그 가치관을 다루는 문학관에 속한다. 2부의 제목은 로 정해졌다는데 벌써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작가수업에 한정된 게 아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진정한 예술가는 예술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란 '세상을 다르게 보..

읽고본느낌 2014.12.29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만화가 박광수 씨의 카툰집이다. 그림과 글이 잘 어울려 있다. 만화책 보듯이 넘기면 한 시간이면 다 볼 수 있지만, 짧은 글이 주는 여운이 길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삶에 대한 통찰이 반짝이는 글과 그림이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게 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다. 전에 , 도 재미있게 보았다. 은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간결한 그림과 더해져 작가의 생각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치매 때문에 요양원에 계신 모양이다. 그로 인한 가족의 아픔이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에 잘 그려져 있다. 아내를 요양병원에 보낸 아부..

읽고본느낌 2014.12.21

퇴곡리 반딧불이

유소림 씨 글은 정기구독하고 있는 을 통해 접하고 있다. 읽을 때마다 글을 무척 잘 쓰시는구나, 감탄하게 된다. 여러 해 전에는 퇴곡리에서 농사짓는 얘기였는데 요사이는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는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을 모은 산문집이다. 지은이는 2005년에 부모가 지내던 퇴곡리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책 내용 대부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단순한 전원 찬가가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 깨달음과 통찰을 담고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존중이 체화된 분인 것 같다. 뱀은 누구나 징그럽게 생각하는데 지은이는 마당에 사는 뱀과도 동무가 되는 길을 말한다. 꽃과 새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뱀과 거미도 마찬가지인 경지는 보통이 아니다. 밤골 생활을 할 ..

읽고본느낌 2014.12.15

목숨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 목숨일 것이다. 건강, 돈, 명예, 모두 목숨이 붙어있을 때의 얘기다. 목숨이 끊어진다는 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고, 개인에게는 우주의 종말과 다름없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런 마지막 때와 대면해야 한다. 죽음은 인생에서 단 하나의 확실한 진실이다. 영화 '목숨'은 포천에 있는 모현 호스피스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사십 대 가장, 두 아들의 엄마, 전직 수학 선생님과 쪽방촌 외톨이 할아버지가 그들이다. 암에 걸려서 치유 불가능한 판정을 받고 생의 마지막을 보내려고 호스피스에 들어왔다. 가족의 사랑과 주변의 도움 속에서 이별 의식을 갖는 이들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가슴 아프고 아리고 슬픈 영화다. 산다는 게 뭔지를 묻고 ..

읽고본느낌 2014.12.10

녹두장군 전봉준

올해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자가 지난 120년이 되는 해다. 1894년 1월에 전봉준 장군 주도로 고부 봉기가 일어났고, 4월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곳곳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1월 우금재 전투에서 패배하며 혁명은 좌절되었고, 12월에 전봉준 등 농민군 주도자가 체포되고 이듬해 3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책 은 역사학자 이이화 씨가 쓴 전봉준 전기다. 시대에 반항한 패배자여서인지 전봉준에 대한 사료는 재판 기록 외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는 출생지나 가족 관계도 불분명하며 사후에 그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에 자료가 소멸된 것이다. 이이화 씨는 현장을 답사하며 민중의 입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서 전기를 썼다. 전봉준..

읽고본느낌 2014.12.05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종류의 책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맛있게 요리를 하느냐에 읽는 재미가 결정된다. 지은이의 손맛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에 관한 획기적인 발상이 나오기 어려운 시점에서 발굴된 화석과 자료를 가지고 흥미 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헤닝 엥겔른(Henning Engeln)이 쓴 는 인간의 기원에서 미래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친절한 설명서다. 따라서 책 역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7백만 년 전에 유인원에서 갈라져서 진화하고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인류 발생사의 마지막 장면은 유전학, 언어학, 고고학의 조사 결과로 이젠 분명해졌다...

읽고본느낌 2014.11.29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선생의 글은 강력한 생태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환경 근본주의자로 오해받게 생겼다. 시장과 함께 세금과 국가가 작아져야 하고 궁극에는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 점에서 선생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병폐가 땜질 처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근본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을 해야 한다는 선생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선생의 비판에는 소위 진보라 불리는 사람들도 예외가 없다. 한때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도정치권이나 시민운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사람들 대부분이 선생의 관점에서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다. 이 책 의 제1부 '꼴불견 세상'에서는 구체적으로 김지하, 박원순, 고은, 유홍준, 노무현 등이 거론된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얼마 전에 ..

읽고본느낌 2014.11.17

인터스텔라

상영 시간 3시간의 대작 SF 영화다. 가슴 두근거리며 봤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황당무계하고 폭력적인 SF와는 차원이 다르다. 과학 이론에 기반을 두면서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실감 나게 그리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의 인류는 환경 파괴에 의한 재앙에 시달린다. 모래 폭풍이 지표면을 휩쓸고 옥수수 외에는 어떤 작물도 기를 수 없다. 당연히 외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느 영화의 스토리처럼 외계 행성 찾기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추진된다. 때마침 외계인이 토성 부근에 웜홀을 만들어주었다. 이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탐사대가 파견된다. 우주선이 웜홀로 진입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다. 웜홀을 통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리학에서 밝혀졌다. 최초로 웜홀을 시각적으로 ..

읽고본느낌 2014.11.12

인간적이다

요사이는 짧고 가벼운 글을 주로 읽는다. 길고 무거운 주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를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호흡이 너무 느려서 이런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는 소설가 성석제의 짧은 이야기집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이 서너 장 정도밖에 안 되니 콩트에 가깝다. 굳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용어로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에서 팝콘을 먹듯 즐겁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짧은 글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것 같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소설가의 부엌에서 맛난 음식으로..

읽고본느낌 2014.11.08

안도현의 발견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묶어 펴낸 책이다. 원고지 3.7매의 정해진 분량으로 호흡이 짧은 글이 모여 있다. '발견'이라는 이름은 시인은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데서 따왔다. 시인은 원래 있던 것 중에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안 시인이 근래 발견한 것들을 드러낸 것이다. 시인이 좋아한다고 말한 것처럼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의 이야기다. 안도현 시인의 글은 시나 산문이나 감칠맛이 난다. 입에 착착 감긴다. 시인은 선 가늘고 예민한 여성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을 통해 나도 배우는 게 많았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관습적인 ..

읽고본느낌 2014.11.03

북학의

교과서에서 이름만 배우고 읽어 보지 못한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박제가(朴齊家)가 쓴 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실학을 대표하는 책이라고 고등학생일 때 시험용으로 열심히 암기했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니 학교 공부가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지금의 시각으로 판단하지 말자고 미리 다짐한다. 는 박제가가 1778년에 첫 번째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저술한 책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식자들이 주자학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때 박제가는 폐쇄적 사회와 시스템의 개혁을 외쳤다. 과격하며 어쩌면 불손하기까지 한 사상가였다. 그의 말에 동조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제가의 주장은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떠오르게..

읽고본느낌 2014.10.29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이런 류의 제목에 끌리는데 책을 읽어보니 정작 지은이는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다. 이것저것 오지랖 넓게 기웃거린다고 별명이 오지래퍼(Ozirapper)다. "범인(凡人)은 이해 못 할 시를 쓰고, 정부가 부숴버린 제주 바위 옆에 돈 안 되는 도서관을 짓고, 환쟁이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리고, 영화판에 참견하고, 만화를 향한 연심(戀心)은 책 한 권이 족히 넘는 그는, 공사다망한 중에도 틈틈이 친구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는, 인생이 '작당'인 한량이다. 평생 멋대로 살아왔으나 잘못 살았던 적 없고, 누구도 설득하려 들지 않는 대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 씨의 자기소개다. 역설적인 제목의 은 재주 많은 이 분이 쓴 에세이집이다. 어느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 스님은 태블릿 PC를 ..

읽고본느낌 2014.10.22

졸업

EBS 명화극장에서 방송된 영화 '졸업'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1970년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을 때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개 장면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영화로 남아 있다. '졸업'으로 인해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스카보로 페어'가 흐르는 가운데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밤늦게 시작된 영화지만 옛날 생각에 잠긴 채 재미있게 보았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니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어 보인다. 물질적 풍요를 이룬 미국 중산층의 정신적 공허는 그대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 세대가 요구하는 현실과 삶의 의미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사랑을 찾아가..

읽고본느낌 2014.10.18

품인록

중국에서 고전 대중화의 길을 개척하고 TV 강의를 통해 학술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는 이중톈[易中天] 교수가 쓴 책이다. '중국 역사를 뒤흔든 5인의 독불장군'이라는 부제로 항우, 조조, 무측천, 해서, 옹정제의 인물 품평을 다루었다. 인물 중심이라는 점에서 일반 역사서와는 좀 다르다. 그래서 제목이 '품인록(品人錄)'이다. 중국에서 인물 품평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위진 시대에는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비평가들은 시적 감수성으로 인물을 평했다. "솔 아래 부는 바람처럼 소슬하다", "아침놀이 떠오르는 것처럼 당당하다", "봄날 버들처럼 산뜻하다" 등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인물 비평이나 감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면서, 그것이 이 책을 쓴 동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

읽고본느낌 2014.10.09

감성에 물주기

늙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들라면, 건강한 무릎 연골과 살아 있는 감성이라고 답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자주 꼽는 돈과 친구도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연골과 감성의 뒷순위다. 돈은 생존하기에 적당한 양만 있으면 되고,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도 잘 놀 줄 알면 된다. 중요한 건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인 감성이다. 는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일상기록공작가'로 자처하는 공혜진 님이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 100가지를 보여준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우리 삶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랗게 나선형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제와 같은 패턴을 그리는 듯하지만, 어제 그려진 원과는 결코 만나지 않는 나선형이다. 그래서 오늘 ..

읽고본느낌 201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