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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김시천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평생을 동무하여 함께 걸어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제 마음 다 퍼내어 서로의 먼지 낀 자리 병든 상처 씻어주고 마른 목 적셔주며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늘 비로소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먼길 앞에 두고 비록, 지금 가난하다 하여도 그러나 그것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히려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만으로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지금 시작한다는 것은 - 길 / 김시천 오솔길, 언덕길, 숲길, 고갯길, 논두렁길, 밭두렁길, 꼬부랑길, 비탈길, 가시밭길, 벼룻길, 외퉁길, 후밋길, 한길, 지름길, 에움길, 거님길, 두멧길, 뒤안길, 발구길, 푸서릿길, 눈석잇길, 돌서덜길, 자..

시읽는기쁨 2022.07.19

내가 사랑하는 길

이웃 동네로 넘어가자면 산자락으로 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내가 제일 아끼며 사랑하는 길이다. 길이가 200m 남짓 정도로 짧지만 여기에 들면 아늑하고 편안해진다. 사람의 통행도 거의 없다. 돌더라도 다들 차를 이용하지 산길을 걸어서 옆 동네로 갈 사람은 없다. 어쩌다 드물게 나 같은 어슬렁족을 만나기도 한다. 곧 여기에 아파트 건설이 예정되어 있어 이 길도 상당 부분이 훼손될 것이다. 이미 길 곳곳에 포클레인이 할퀸 흔적이 보인다. 진즉에 이 길의 사계를 담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나무가 많아 길 한편이 붉게 물들면 여느 이름난 단풍 명소 못지않다. 올 가을 단풍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길을 지나 이웃 동네로 넘어가서 목현천과 경안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

사진속일상 2021.06.23

지금 여기, 산티아고

후배가 지금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다. 지난달 하순에 출국했으니 20일 넘게 걷고 있는 중이다.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연을 보면 하루에 40km 넘게 걷는 날도 있다니 굉장히 강행군을 하는 모양이다. 체력이 좋으니 다른 사람보다 일주일 정도는 빨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것 같다. 내가 산티아고를 안 건 10년 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마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때문에 걷기 열풍이 해외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산티아고는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영적인 순례 여정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지금도 찾는 사람이 이어지고 있다. 퇴직하면 나도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직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5년 차가 되었..

읽고본느낌 2016.04.18

다른 길

그의 프로필에는 혁명가, 시인, 사진작가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진정한 혁명가는 시인이 되어야 하고, 진정한 시인 역시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는 민주 투사이자 저항 시인이었고,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가 되어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묵묵히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노해 사진전에 다녀왔다.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사진전을 찾아온 관람객이 매우 많았던 점이었다. 사람에 걸려서 제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없었다. 대중적이지 않는 내용의 ..

읽고본느낌 2014.03.02

개구리 세 마리

필리핀 민중교육의 역사와 내용을 다룬 이라는 책을 보다가 이 이야기를 만났다. 개구리 세 마리가 나오는 이 우화는 '쌍방향의 상호작용 이야기'로 민중교육자들 사이에 인기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자신의 신념 및 타인과의 관계, 깨달음에 대해서 숙고하게 하는 내용이다. '개구리 세 마리'는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우물 속에 살고 있는 개구리와 같다. 각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게 전부라 믿는다. 누가 옳을까? 세 마리 개구리는 결국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용기로 우물 밖으로 나온다. 그들은 좁은 고정관념을 벗어났다. 민중교육의 역할은 사람들이 자신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볼 수 있도록 하고, 개인 또는 집단의 패러다임 전환을 돕는 일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사람..

참살이의꿈 2013.01.05

제주 올레길 420km

며칠 전에 제주도 올레길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 26개 코스에 총 길이가 420km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길이와 비슷하다. 한 개 코스가 하루에 걷기 적당하게 되어 있으니 전체를 걷는 데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 당연히 걸어보고 싶다. 결심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올레길 몇 개 코스 정도는 걸어 보았다. 나만 아직 올레길에 서지 못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몇 년 전에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유행했다. 퇴직을 한 뒤에 바로 그 길을 걷는 게 목표였었는데 아직도 희망 사항으로만 남아 있다. 거기는 평균거리가 거의 900km가 되니 올레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솔직히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동안 생각도 변했다..

길위의단상 2012.11.27

산길

앞산에서..... 산길은 산을 닮아 있다 산을 닮은 산길은 산을 배반하지 않는다 산이 둥글면 둥글게 길을 열고 산이 각지면 각지게 길을 열고 산의 높이만큼 산의 깊이만큼 오르내리면서 산과 함께 하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안다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나무들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비어 있는 곳으로 다니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본다 사람을 알아보기에 사람을 대할 줄 안다 성질 급한 사람은 급하게 걷다 지치게 만들어 천천히 가게 하고 차분한 사람은 차분하게 걷다 산 깊은 맛을 보게 하고 사람에 맞게 길을 가게 하고 산길은 산을 닮아서 좋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서 좋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봐서 좋고 그래서 산길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 - 산길 / 이대의 뒷산..

사진속일상 2012.09.14

노선을 이탈한 버스 / 김선호

블라디보스톡에서 312번 신설동행 버스를 만났다 서울에서 기다릴 땐 좀처럼 오지 않던 노선 버스가 쓸쓸한 바람이 무차별적으로 불어오는 광장에서 말을 걸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자 노선표도 안 뗀 현대자동차 마크가 선명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중곡동과 신설동을 오고가는 순하디순한 글씨 쇄빙선이 깨어 놓은 얼음길을 따라 먼 바다를 건너오느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날을 세운 바람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는 바람 사태에 바퀴는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당한 할아버지의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하다 생의 북쪽에 이처럼 따뜻한 기다림이 있냐고 신설동과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길이 시작되는 항구 블라디보스톡에서 ..

시읽는기쁨 2012.02.14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65세가 되던 1993년에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프랑스 생장피도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 km에 이르는 길을 31일 동안 혼자 걸은 것이다. 이 길은 가톨릭의 순례길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를 따라 대서양까지 이어진다. 산티아고에 성 야고보의 시신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서기 1000년경부터 서쪽을 향해 순례 여행을 떠났다. 특히 중세 때는 순례 행렬이 대단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호이나키는 일리치의 추천으로 생애의 느지막이 이 길에 섰다. 은 한 달에 걸친 그의 순례 기록이며 신앙 고백이다. 호이나키는 에서 만났던 분이다. 젊었을 때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해서 중남미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일리치와 함께 ..

읽고본느낌 2010.11.05

길 / 원혜빈

아주 오래 전 사람이 그리워 헤매던 나그네 짚신 밑에서 태어났다. 이름 모를 꽃과 풀을 밀어내며 나는 자랐다.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주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밟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몸살을 앓으며 상처를 키웠다. 슬픔은 잡초처럼 자라났고 상처는 굳은살이 되어 박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갔다. 더러는 혼자였고 더러는 여럿이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그들은 웃고 울며 그리워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가끔 지나는 산새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내 어깨에 뿌리내린 소나무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서로 엉켜있는 풀들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곧 많은 사람들..

시읽는기쁨 2009.12.01

물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울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흘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

시읽는기쁨 2009.06.10

길동무 셋

얼마전 중앙일보에 '길동무 셋'이라는 제목으로 길 위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 기사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으리라. 누구에게나 따분한 일상을 훌훌 털고 길 위에 서고 싶은 충동이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일상의 짐이 너무 무겁고 우선은 용기가 없다. 그러자면 현실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길 위에 서기가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실은 하찮고 천박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프다. 삶의 핵심에는 이르지 못하고 실체 없는 그림자를 쫓느라 허둥대다가 해가 저물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상의 정형화된 틀에 매여있는 우리 같..

길위의단상 2008.11.11

경복궁 버즘나무길

5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오가며 이 길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무생물의 사물일지라도 오랫동안 가까이하다 보면 사람처럼 정이 들게 된다. 길도 마찬가지다. 길을 오가며 느꼈던 상념과 추억들이 그 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길에서 느끼는 친근감이 사람보다 덜하다고 할 수 없다. 도리어 사람의 변덕이 없는 은근하고 속 깊은 정을 길에서는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보통 경복궁 돌담길이라고 하는데, 이 길의 돌담을 따라서는 아름드리 버즘나무가 도열해 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는 은행나무도 함께 자라고 있다. 여름인 지금은 버즘나무 잎들로 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어 더욱 시원하고 보기에도 좋다. ..

사진속일상 2008.07.17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15

세상에는 걷기의 고수들이 많다. 나 역시 걷기를 좋아하다보니 그런 사람들이 멋있고 존경스럽다.그런 고수들 중 한 분이 신정일 님이다.'우리 땅 걷기' 카페 회원인 동료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 D 일보에 그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대단한 분이라는 걸 다시금 알게 되었다. 님은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다. 집이 가난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는데, 대신 일을 하면서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걷는 것과 책 읽은 것이 그의 전부였다. 지금도 걷지 않는 날은 책 속에 갇혀 하루에 1~ 3 권을 읽는다.또 지금까지 쓴 책만도 35 권이 넘는다. 25년 넘게 우리나라를 구석구석 걸어다닌 거리가 공식적으로만 16000 km라고 한다. 우리 땅 구석구석 그의 발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하루 평균 40 k..

길위의단상 2008.07.16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 뒤로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다시 떠난다. 인생이란 늘 새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나는 것. 우리는 길 위에 선 나그네들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새로운 길 위에 선다. 다시 떠나기 위해서 집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어찌 망설임이 없으랴. 안온한 항구의 품에 대한 미련이 없으랴. 안개에 덮인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과연 그 무엇이 있는 것이나 하는 ..

시읽는기쁨 2008.06.03

걷고 싶은 길 10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직장도 가정도 훌훌 털고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삶의 족쇄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대비되어 괜히 울적해지고 쓸쓸해진다. 난 언제쯤 그렇게 자유롭게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특별한 인물의 흉내를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본인들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자신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펄쩍 뛸 것이다.누구라도 길을 나설 수 있다고 하지만 허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내가 꿈 꾸는 건 일탈과 자유, 그리고 끝 없는 길 위에 서고 싶은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말 그대로의 그저 꿈일 뿐이다.그래서 꿈을 행동으로 옮긴 그런 사람들의 ..

길위의단상 2008.05.20

철길을 따라 보행로를 만들자

옛날에 철길은 기차와 함께 사람들이 같이 다녔다. 철로 양편으로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어렸을 때 이 길을 따라 학교에도 가고, 엄마를 따라 장에도 갔다. 그때는 기차 속력이 느려서 기차가 지나가도 걷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발 빠른 어른들은 뛰어가다가 기차를 타기도 했다.그런데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로 바뀌고 속력이 빨라지면서 철길은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철로 옆 길은 자갈로 덮이고 폐쇄되었다. 철길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자꾸 없어지고 있다. 도로도 자동차를 위한 길이지 사람을 위한 길은 아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해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시골에서도 도로를 따라 걷기는 쉽지 않다..

길위의단상 2008.02.11

길 / 오세영

어디로 가는 길이냐 돌다리 건너 회나무 숲 지나 위로 오르는 길 산딸기 어우러진 오솔길에선 기어가는 한 마리 뱀을 밟았다 돌아보면 길바닥에 나뒹구는 칡넝쿨 하나 산철쭉 우거진 모퉁이에선 불현듯 네 맑은 목소릴 들었다 돌아보면 푸두득 나는 뻐국새 하나 본 것이 본 것이 아니고 들은 것이 들은 것이 아닌데 보고 들은 것을 마음에 두고 길을 찾아 쉬엄쉬엄 산을 오른다 벼랑을 돌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산정의 무덤에서 끝나는 길 어욱새, 속새, 덥거나무 풀숲에서 사라지는 길 - 길 / 오세영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의 기적도 없다.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보다 더 신비한 일도 없다. 우리는 살아 있고, 그것만이 전부다.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날지..

시읽는기쁨 2007.07.25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 프로스트

이 숲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 그는 내가 여기 멈추어 서서 눈 덮인 자기 숲을 보는지 모를 거야 내 작은 말도 이상한가 봐 숲과 꽁꽁 언 호수 사이 농가 없는 이곳에 멈춰 서다니 그것도 올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마구의 종을 흔들어 그는 뭐 착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묻는 듯 그밖에 다른 소리는 잔잔한 바람소리와 떨어지는 눈송이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어 하지만 난 아직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 로버트 프로스트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

시읽는기쁨 2006.12.28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사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구부러진 길 / 이준관 사람의 발길만으로 만들어진 길은 구불구불하다. 바위를 피해가고 냇물을 돌아가면서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동물의 ..

시읽는기쁨 2006.12.04

가을이 아름다운 경복궁 돌담길

경복궁 돌담길은 이맘 때가 제일 아름답다. 가로수의 주종이 은행나무와 버즘나무인데 노란색 단풍은 지금이 한창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얼마나 청소를 열심히 하는지 보도에는 낙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청소를 잘 하는 길일 것이다. 500m 정도 되는 이 돌담길이 내 출퇴근로로 나는 매일 걷는 행복을 만끽한다. 청와대 앞이라 경비가 삼엄해서인지 길에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가 흔하다. 그래서 쓸쓸한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에 이만큼 호젓한 길도 없을 성 싶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돌담길을 따라 경복궁을 한 바퀴 돌아도 좋다. 느릿느릿 걸어도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매일 이 길을 다니는 나는 경비원들과 낯이 익어 눈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

사진속일상 2006.11.10

집보다는 길에서 / 황동규

집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 집보다는 길에서 / 황동규 인생의 나이가 가을 쯤되면길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지. 살면서 써야 했던 온갖 가면들 벗어놓고, 가벼운 배낭 하나에 몸 맡기며, 어슬어슬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거지. 거기서 무얼 만나고픈 기대도 없이, 돌아갈 기약도 없이, ..

시읽는기쁨 2006.11.06

카미노 데 산티아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곱이 예수의 처형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스페인까지 걸어왔다고 한다. 야곱은 후에 순교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묻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다. 그런데 9세기 초, 어느 기독교 수행자가 외진 골짜기에서 그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을 짓고 성지로 되었다. 그때로부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산티아고로의 성지순례를 시작했고,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기독교 3대 성지로 선포했다. 12세기에 순례는 절정에 달했고,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길 위에 생겨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이 길을 찾았으나 1987년 유럽연합이..

길위의단상 2006.07.07

길의 노래 / 이기철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이 아니면 또 어디겠는가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겠는가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몸은 제 길들여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내고 그곳에 채색된 丹靑 올려서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穴居마저 줄어든다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면 내 어제 분필과 칠판 앞에서만 열렬했던 말들이 가시 되어 일어선다 산골 처녀야, 눈 시린 十字繡 그만두고 여치 메뚜기 날개 접은 들판 콩밭 누렁잎 보아라 길 끝에 무지가 차라리 편안인 산들이 누워 있고 산 끝에 예지도 거추장스러운 피라미들에게 맡겨버린 물이 마음 풀고 흐..

시읽는기쁨 2006.05.24

길은 어둡고 멀다

내 안에 숨어있는 칼날이 날카롭습니다. 그 칼날이 나를 찌릅니다. 많이 아픕니다. 길이 어두울수록 칼은 더욱 시퍼렇게 날을 세웁니다. 제멋대로 내 안을 휘젓고, 밖을 돌아다니며 상채기를 냅니다. 상처에서 나오는 선혈이 낭자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그 길을 찾았다 싶으면 곧허방에 빠집니다. 다시 오리무중입니다.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또 다른 달콤한 환상으로 이어집니다.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나는 늘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바위를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가야 할 길은 어둡고 멉니다.

참살이의꿈 2006.02.27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

어제는 비가 많이 내렸다. 중국으로 들어갔던 태풍 '카눈'이 서해로 빠져나오며 소멸되었으나 남아있던 비구름이 한반도를 지나간 탓이다. 시내에 볼일을 보러 나갔는데 우산을 썼지만 비로 흠뻑 젖었다. 마침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키아로스타미 사진전 를 보았다. 키아로스타니는이번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란의 영화감독인데 예술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를 보고 전시회에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이번 사진전의 주제가 '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량해 보이는 산야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의 흑백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인생을 나타낼 때 '길'만큼 적당한 이미지도 없는 것 같다. 길은 설레임이기도 하고 덧없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꼬불꼬불 구부러지며 끝없..

읽고본느낌 2005.09.14

경복궁 돌담길

길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다운 길이 있다. 광화문에서 영추문(迎秋門)을 지나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경복궁의 서편 돌담길은 내가 사랑하는 길이면서 출퇴근로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직장까지 이 길을 따라 걸어 다닌다. 키 높은 돌담과 아름드리 버즘나무가 도열한 이 길은 청와대 앞이라 경비가 삼엄해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호젓해서 좋다. 대개의 경우 사진처럼 길이 텅 비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아기자기하고 여성적이라면, 경복궁 돌담길은 시원시원하게 뻗어있다. 이 길에 들면 시선이 단순해지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고달팠던 하루의 일상도 이 길에 서면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내면의 존재감이 다시 살아난다. 나에게는 사색과 성찰의 고마운 길이다. 이 길은 걷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가르쳐 준다. 어떤 날은..

사진속일상 2005.02.21

걸어 보지 못한 길 /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

시읽는기쁨 2004.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