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15

쇳밥일지

노동 현장의 실상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우리끼리 만나 얘기할 때는 요즘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힘든 일 하기 싫어하고 편하게만 살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의식이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부족하다 등으로 비판했다. 노력만 하면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는 사회가 아니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봤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약자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며칠 전에 지인이 를 빌려 주었다. 이 책이 2년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지은이인 천현우 씨는 실업고와 전문대를 거쳐 노동 현장에서 10여 년간 계신 분이다. 전기 계통을 공부했지만 중간에 용접을 배운 뒤로 주된 직업은..

읽고본느낌 2024.02.20

다음 소희

소희는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2학기가 되어 어느 통신회사 콜센터에 현장 실습을 나간다. 어린 학생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근무 환경이 꿈 많은 소녀를 절망하게 만든다. 회사는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면서 서로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발버둥을 쳐서 좋은 실적을 올리지만 그나마 실습 학생에게는 보상을 해 주지 않아 마찰이 생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 소희는 결국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다음 소희'는 6년 전에 전주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의 현장 실습은 여러 차례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안타까운 죽음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곤 한다.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현장 실습 나간 학생으로부터 작업 환경이 ..

읽고본느낌 2023.07.24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 송현숙 논설위원 모멸감.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지난달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쫓는 내내 떼어낼 수 없었던 감정은 이 세 글자였다. 어제까지 일하던 직원의 죽음을 한사코 모른 체하려는 그 조직의 모습에, 고인이 생전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달 26일 아침, 남편과 함께 출근했던 59세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퇴근하지 못했다. 막내딸과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은 당시 힘들고 멍한 고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평소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던 그는 관악학생생활관(서울대 925동·기숙사)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사망 열흘 만이었다. 가족..

참살이의꿈 2021.07.25

철도원 삼대

삼대로 이어진 철도원의 삶을 그린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가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이 철도원 삼대이고, 그 아랫대인 굴뚝 농성을 하는 이진오 이야기가 현재 시제로 교차한다. 실제로는 사대에 걸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는 노동소설을 써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황석영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는 이진오의 농성 투쟁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작가의 현란한 글솜씨에 빨려 들어간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특히 주안댁과 신금이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안방에서 듣는 민담 같은 내용이라 정감이 간다. 이 소설..

읽고본느낌 2020.12.11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현장 실습생으로 CJ에서 일하던 특성화고등학교 김동준 학생은 회식 자리에서 선임자한테 뺨을 맞았고, 며칠 후 회사 기숙사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폭행이었지만 그 전에 과도한 업무와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있었다. 2014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에 들어간 김 군은 현장 실습을 나가서는 전혀 엉뚱한 일을 배정받았다.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진천 육가공공장에 배치된 것이다. 학교에만 있다가 갑자기 현장에 나가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모든 실업계고등학생이 겪는 문제지만 사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라는 말이 나온다. 은 은유 작가가 김 군의 주변 사람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김 군 가족..

읽고본느낌 2020.06.14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 셸리

영국의 노동자들아, 무엇 때문에 그대들을 업신여기는 지주들을 위해 밭을 가는가? 그대들의 폭군들이 입을 사치스런 옷을 무엇 때문에 힘들이고 근심하며 짜는가? 무엇 때문에 나서 죽을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지켜 주는가? 그대들의 땀을 짜내려 드는 아니 그대들의 피를 마시려 드는 저 배은망덕한 게으름뱅이들을 영국의 부지런한 자들아, 무엇 때문에 많은 무기와 사슬과 채찍을 만드는가? 고통을 모르는 이 게으름뱅이들은 그것으로 그대들의 강요된 노동의 생산물을 약탈할 텐데 그대들은 여가, 안락함, 평온, 피난처, 음식, 부드러운 연인의 향기를 누리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값비싼 고통과 근심으로 그대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이 뿌린 씨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네 그대들이 찾아낸 재산을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네..

시읽는기쁨 2020.05.14

풍경(41)

아파트 외벽 도색 작업을 하는 사람을 본다.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들거리며 손끝에서 그림이 완성된다. 얼마나 고될까, 안쓰러우면서 식구를 먹여 살리는 노동 앞에서 숙연해진다. 누구나 제 인생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외줄 타기의 긴장은 있다. 밥벌이를 위한 일상의 노동은 장소가 어디든 숭고하다. 때로는 삶이 비루해 보일지라도 땀 흘리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살아내라는 명령은 인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세상에 나와 제 몫을 한다는 것만큼 엄숙한 일도 없다. 육체노동이라고 괄시받아서는 안 된다. 힘든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을 하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직업을 귀천으로 구별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우선이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진속일상 2018.01.23

슐레지엔의 직조공 /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부자인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주기는 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

시읽는기쁨 2016.12.01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서른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한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처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

시읽는기쁨 2016.05.17

부끄러운 손

내 손은 여자처럼 작고 곱다. 신동문이 말한 '야위고 흰 손가락' 그대로다. 스스럼없는 사람은 악수할 때 놀리듯 말한다. "남자 손이 이렇게 곱다니, 쯧쯧" 그래서 악수하는 게 싫다. 남자의 크고 투박한 손에 갇히면 한방에 제압당하는 기분이다. 모임에 나가면 도착하는 순서대로 일제히 악수를 하게 된다. 고역이다. 나는 통로에서 멀찍이 자리 잡고는 손 흔들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때도 가능하면 핑계를 대고 악수를 피한다. 못난 손을 의식하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렸을 때는 작고 흰 손이 자랑스러웠다. 공부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노동과 거리가 먼 손이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채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유약한 백면서생이라는 증거..

참살이의꿈 2015.12.16

남자보다 무거운 잠 / 김해자

꿈이랑가 생시랑가 머시 묵직한 거시 자꼬 눌러싸서 눈 떠본께 글씨, 나, 배, 우에, 올라타 있드랑께 워어메 이거시 먼 일이여, 화들짝 놀라 이눔 새끼를 발로 차버릴라고 했는디 이눔의 나무토막 같은 다리가 말을 안 듣는겨 죙일 서갖꼬 콩콩 프레스를 밟아댄께 참말로 이 다리가 내 다리여 놈의 다리여 이 급살 맞을 놈, 콱 죽여분다 이 신발 밑창 같은 새끼, 겨우 몇 마디 하고 글시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겨버렸나 벼 포옥 한숨 자고 포도시 눈이 떠졌는디 아즉도 꿈이랑가, 워메 그 인사가 아즉도 엎어져 있는겨, 와따 여즉도 안 갔소이, 머시 좋은 거이 있다고 고렇코롬 자빠져 있소, 눈 붙이고 난께 존 말라 타일러집디다이, 낼 일할라믄 질게 자야 쓴께 지발이나 빨리 가랑께요, 근디 이 본드 발른 밑창 같은 작자가..

시읽는기쁨 2014.11.07

신동문 평전

신동문(辛東門, 1927~1993) 시인의 생애와 삶이 궁금해서 찾아 읽은 책이다. 10여 년 전 밤골로 들어갈 때 시인의 '내 노동으로'를 좋아해서 자주 읊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시는 당시의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도시에서의 껍데기 삶을 미련없이 버린 뒤 농촌에서의 육체노동을 나도 꿈꾸고 있었다. 시인과 다른 건 나는 어설프게 제대로 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책에 소개된 시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본명은 건호(建浩)이고 동문은 필명이다. 충북 청원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 청주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결핵을 앓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

읽고본느낌 2014.07.01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쉬는 나라

얼마 전에 OECD 가입국의 연평균 노동시간 통계를 보았다. OECD 평균은 1,768시간인데 우리나라는 2,316시간으로 1등을 차지했다. 주요국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1,392 시간 노르웨이 1,417 시간 독 일 1,433 시간 프 랑 스 1,533 시간 일 본 1,785 시간 미 국 1,794 시간 헝 가 리 1,966 시간 한 국 2,316 시간 한국은 OECD 평균보다 1년에 무려 528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68.5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가장 적게 일하는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거의 1,000시간 가까이 더 일한다. 매일 3시간 정도씩 더 일한다는 얘기다. 이는 하루 평균 수면시간으로도 나타난다. 이 역시 한국의 수면시간이 가장 짧다...

참살이의꿈 2011.12.12

망치질하는 사람

이 사람은 키가 22m, 몸무게는50t이 되는 거인이다.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하루 종일 내리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설치 조형물인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가다 보면 곧 만나게 된다. 작품이 워낙 커서 아무리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잠시 멈춰서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모양과 규칙적인 동작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처음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과연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좀 헷갈렸다. 육체 노동의 소중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은데, 다르게 생각하니 쓸쓸한 노동의 종말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이 다니는 도심의 한복판에 높..

사진속일상 2005.03.09

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그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최근에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고`라는 책을 읽었다. 전희..

시읽는기쁨 200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