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28

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무릎 수술한 사이에버스가 많이 컸네.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겠네.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눈감아드릴 테니께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성장판 수술했다면서유. 등 뒤에 바짝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다 짝 찾는 일이쥬.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그짝이 지난치게 연상 아녀?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 팔순 / 이정록  할머니와 버스 기사 사이의 농담따먹기가 흥겹다.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서 검버섯은 여드름이 되고 무릎 수술은 ..

시읽는기쁨 2024.10.09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길위의단상 2024.04.08

사랑방 /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시읽는기쁨 2023.06.24

18세와 81세

고등학교 동창 카페방에 누군가 재미있는 글 하나를 올렸다. 제목이 '18세와 81세'인데 읽다 보니 웃음이 나면서 씁쓰레하다. 나도 81세가 눈앞에 와 있다.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다리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이 안 멈추는 18세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철 모르는 18세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 찾아 나서는 81세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81세다. 그렇다면 한국 남성은 81세가 되면 반 정도만 생존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같이 희희낙락하는 친구들이지만 곧 반..

길위의단상 2023.04.29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

손주가 오면 집안에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핀다. 보통 때는 웃을 일이 거의 없다.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내는 날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파안대소를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늙어갈수록 웃음이 사라지고 얼굴 표정은 굳어진다. 어른과 어린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깔깔거리며 재미있어한다. 호기심이 가득하니 뭐든지 재미있는 거리를 만들어낸다. 노인이 되면 매사에 심드렁해진다. 마치 딱딱하게 말라가는 고목 등걸 같다. 그래도 자주 웃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내는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는다. 예능 프로인 것 같은데 뭐 그런 걸 보느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내는 웃을 일이 없는데 이런 거라도 보면서 웃어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맨날 책을 본들..

길위의단상 2023.03.11

버릇 / 박성우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 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버릇 / 박성우 위층에 사는 올빼미 덕분에 깜짝 놀라며 잠이 깼다. 자정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잠잠해지는 2시까지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라디오를 틀었더니 진행자가 이 시를 소개해 주었다. 그래, 이런 재미있는 시를 만났으니 오늘밤은 올빼미도 용서해주마. 궁금한 건 첼로 아가씨..

시읽는기쁨 2022.03.31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난봉꾼 타고난 끼로 숱한 아녀자를 농락했다. 성난 주민들 관아에 고발, 심판 받게 된 것이다. 원님 가로되 "저놈이 다시는 나뿐 짓 못하게 거시기를 잘라 버리도록 해라!" 그러자 그 아비가 일어서서 간청했다. "나리. 저 녀석이 우리 집안 4대 독자입니다. 대를 이어가야 하므로 저 아이 대신 제 거시기를 자르십시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불쑥 원님 앞에 나섰다. "사또, 법대로 하옵소서." 그러자 큰일 났다 싶은 며느리가 손사래, 손사래 치며 "어머님. 남정네 하는 일에 여자들은 빠집시다." -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만 해도 벅찬데 이번에는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이 터졌다. 권력과 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힘이 생기면 어디에든 과시해 보고 싶은 걸까. 성 욕망에는..

시읽는기쁨 2021.01.27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

시읽는기쁨 2020.03.11

걱정 마, 안 죽는다 / 유안진

겁먹은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 엄마에게 고했다 글쎄 예가 동전을 삼켰대요 얼마짜리를요? 엄마는 태연하게 물었다 친구의 100원짜리를 빼앗아 놀다가, 뺏긴 친구가 뺐으려 하자, 입에 넣고 삼켜 버렸대요 엄마, 나 죽어, 하며 아이는 울어댔지만, 엄마는 더 태연했다 남의 돈 수천씩 먹고도 안 죽는 사람 많더라 설마, 그깟 것 먹고 죽을까잉, 걱정 마 기가 막힌 선생님은 돌아갔고, 아이는 그래도 걱정되어 기도했다 하느님, 앞으로는 절대로 남의 돈 안 먹을 테니 살려주세요 다다음날 아침, 앉은 변기에서 똑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대변에 하얀 동전이 섞여 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엉덩이를 깐 채로 감사기도부터 했다 - 걱정 마, 안 죽는다 / 유안진 이 엄마는 계모인가, 라고 물을 만하다. 아이를 키..

시읽는기쁨 2018.11.05

저만 모른다

고등학교 동기 밴드에 쓴웃음을 짓게 하는 유머 글이 하나 올라왔다. 동네 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던 중 의사의 치과대학 졸업장을 봤다. 의사의 이름은 반세기 전 고등학교 시절의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과 같았다. 그는 키도 크고 멋진 친구였는데 혹시 이 사람이 그 당시 나와 친했던 그 친구인가, 하고 있는데 의사를 본 순간 그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머리에다 몇 낱 안 남은 흰 머리카락, 그리고 주름살이 깊게 파인 얼굴이 내 동급생이기엔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00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까?" "네, 다녔습니다. 그때 좀 우쭐댔었지요"라고 말하며 치과의사는 활짝 웃었다. "언제 졸업했습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1967년입..

길위의단상 2018.08.22

맑은 웃음 /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맑은 웃음 / 공광규 인간만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치명적인 자뻑이다.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들 우리는 그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면 ..

시읽는기쁨 2017.12.23

실언 / 고증식

고향에서 이발로 먹고 사는 깎새 형이 들려준 우스개 한 토막 바야흐로 설 단대목에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쁜데 엊그제 새로 들인 머리나 감기는 시다 녀석 하나가 세상 둘도 없는 뺀질이더라고 그 녀석 그날따라 별나게 더 뺀질거려 보다 못한 깎새 형 버럭 한소리 질렀다는데 - 야 이놈 자식아, 그만 좀 뺀질거리고 얼릉 여 와 손님 대가리나 감겨! 순간, 길게 목 빼고 엎드렸던 그 손님 문제의 대가리 번쩍 치켜들고 한참이나 뻥하게 쳐다보더라고 - 실언 / 고증식 당황했을 깎새 형과 손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다 녀석은 얼마나 킬킬거렸을 것인가. 악의가 아닌 줄 알기에 실소 뒤에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아마 유머 있는 손님이라면 "야, 대가리 좀 잘 감겨봐." 정도의 대꾸는 있지 않..

시읽는기쁨 2015.09.05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라오스나 네팔에 가서 한 달 정도 빈둥거리다 올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을까 봐 제일 걱정이다. 경험 있는 사람은 두려워 말고 그냥 떠나라고 한다. 몸짓 발짓으로도 다 통할 수 있다고......

시읽는기쁨 2012.10.20

가을의 전설 / 안도현

완주군 경천면 대아리 저수지 물가에 빈 배 한 척 한가로이 매여 있기에 그 배 빌려 타고 단풍놀이나 즐겨볼까 싶어서 주인네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주인은 낮술에 취해 허리띠 풀어놓고 마루 위에 붉은 고추 멍석으로 누워 잠들었고 주인 아낙께서 고추를 매만지다 하시는 말씀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그 말씀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내 아내는 뒷걸음치다가 저만치서 막 불이 붙어서 그만 단풍나무 한 그루로 타올랐습니다 - 가을의 전설 / 안도현 '가을의 전설'이라고 하면 야구 팬은 한국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삼성과 두산의 포스트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4차전까지 늘 1점차로 승부가 갈려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영화 애호가라면 같은 제목의 영화를 연상할지 모..

시읽는기쁨 2010.10.13

[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식품공학 코끼리를 도축한다. 도축한 코끼리를 통조림으로 만든 뒤 냉장고 안에 넣는다. 기계공학 큰 냉장고를 만들어 코끼리를 넣는다. 유전공학 암 수 코끼리를 하나씩 구하여 짝짓기를 시킨다. 그때 수정란을 추출하여 냉장고에 넣는다. 전자공학 ‘코끼리’를 low pass filter에 통과시킨다. 그러면 ‘고기리’가 나온다. ‘고기리’에 circular right shift 연산을 한다. 그러면 ‘리고기’가 된다. ‘리고기’와 ‘오XXX’를 logical or 게이트에 통과시킨다. 그러면 ‘오리고기’가 된다. 이제 오리고기를 냉장고에 넣는다. 마이크로공학 냉장고 안으로 삽입할 코끼리의 모든 정보를 작성하여 마이크로 칩으로 전송한다. 코끼리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는 마이크로 칩을 냉장고 안으로 집어넣는다. 컴퓨..

길위의단상 2010.09.16

어떤 비대칭 장단 / 권순진

어느 보험회사 직원들의 멀리 소풍 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방향이 같은 김 과장과 이 여사가 카풀로 동승했고 박 여사도 이웃인 강 대리의 승용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둑하게 서쪽 하늘이 물들 듯 피곤이 내려와 앉았다 김 과장은 깍듯하고도 나긋하게 '좀 쉬었다 갈까요?' 옆자리의 이 여사에게 쿡 말을 건넨다 이 여사는 잠시 뜸을 들이나 했는데 상큼하고 쿨하게 대꾸한다 '그러죠 뭐' 힘을 받은 차는 가야 할 길이 분명하다는 태도와 순간의 가속으로 '늘봄모텔'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차 어서 돌려요' 비슷한 시간 강 대리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박 여사에게 공손한 제의를 했다 하지만 젊은 호흡으로 단호히 '잠시 쉬..

시읽는기쁨 2010.07.03

폭설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

시읽는기쁨 2010.01.17

개사돈 / 김형수

눈 펑펑 오는 날 겨울 눈 많이 오면 여름 가뭄 든다고 동네 주막에서 술 마시고 떠들다가 늙은이들간에 쌈질이 났습니다 작년 홍수 때 방천 막다 다툰 아랫말 나주 양반하고 윗말 광주 양반하고 둘이 술 먹고 술상 엎어가며 애들처럼 새삼 웃통 벗고 싸우는데 고샅 앞길에서 온 동네 보란 듯이 나주 양반네 수캐 거멍이하고 광주 양반네 암캐 누렁이하고 그 통에 그만 흘레를 붙고 말았습니다 막걸리 잔 세 개에 도가지까지 깨뜨려 뒤꼭지 내몰이에 성질 채운 주모 왈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 개사돈 / 김형수 요사이 느닷없는 개논쟁이 붙었다. A 씨가 신문에 신임 총리를 두둔하며 야권을 비난하는 글을 올리자, B 씨가 노욕과 변절이 불쌍하다는 글을 썼다. 그러자 C 씨가나서서는 B 씨를 향해 '개소..

시읽는기쁨 2009.10.01

당신의 사랑은 안녕하신가요?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거짓말의 순위를 매긴 것을 보았다. 15 위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간호사) 14 위 "전원 취업 보장! 전국 최고의 합격률!" (학원 광고) 13 위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예요!" (스캔들 난 연예인) 12 위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친구) 11 위 "지하철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아파트 분양 광고) 10 위 "옷이 너무 잘 어울려요!" (옷가게 점원) 9 위 "딱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 (음주운전자) 8 위 "내가 너만할 때는 안 그랬다!" (부모님) 7 위 "이 문제 꼭 시험에 나온다!" (선생님) 6 위 "이번이 마지막 구입 기회입니다!" (TV홈쇼핑 광고) 5 위 "내가 빨리 죽어야지!" (어르신) 4 위 "이거 팔아도 남는 거 하나 없어요!" ..

길위의단상 2009.04.27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 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

시읽는기쁨 2009.02.18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一身이 사쟈 한이 물것 계워 못 견딀쐬. 皮ㅅ겨 가튼 갈랑니 보리알 가튼 슈통니 줄인니 갓 깐니 잔 벼록 굴근 벼록 강벼록 倭벼록 긔는 놈 뛰는 놈에 琵琶 가튼 빈대 삭기 使令 가튼 등에 아비 갌다귀 샴의약이 셴 박희 눌은 박희 바금이 거절이 불이 뾰죡한 목의 달리 기다한 목의 야왼 목의 살진 목의 글임애 뾰록이 晝夜로 뷘 때 업시 물건이 쏘건이 빨건이 뜻건이 甚한 唐빌리예셔 얼여왜라. 그 中에 참아 못 견딜손 六月 伏더위예 쉬파린가 하노라. -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인데, 요사이 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 내 한 몸 살아가자 하니 물것이 많아 못 견디겠네.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

시읽는기쁨 2008.11.07

가가 가가가

경상도 안동 출신의 한 총각이 서울 사는 아리따운 처녀와 혼인을 하기로 했다. 처녀는 시골에 계신 총각의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총각과 함께 안동으로 내려갔다. 마을로 들어서자 고향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총각을 보고 물었다. “가가 가가가?” “예, 가가 가갑니더.” 어르신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도 처녀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총각의 고향집으로 가서 처녀는 시부모가 될 분들께 큰절을 올렸다. “오냐. 니가 가가라?” 처녀는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총각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말했다. “예, 야가 가갑니더.” 처녀는 낯설고 이상한 나라의 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문을 유달리 따지는 안동 지방에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본관과 성을 먼저 말..

길위의단상 2008.11.07

사르코지의 익살

오늘 아침 신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국빈방문하는 환영식에서 부인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니까 브루니의 얼굴이 빨개지며 겸연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장면이다. 대통령의 익살스런 표정도 재미있고, 그에 반응하는 브루니의 표정도 귀엽다.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은 동양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엄숙한 환영식장에서 저런 파격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르코지에 대해서는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친미적인 정강 정책으로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사람 자체는 무척 진솔해 보인다. 적어도 위선이나 가식이 느껴지지 않아 좋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부인과 이혼하고 열세 살 아래의 모델 출신 미녀와 결혼해서 화제가 되었다. 만약 한국에서 그랬다면 ..

길위의단상 2008.06.24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 해라! -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재춘이 엄마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늘이 내려준 자식 사랑의 모성애를 누가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모진 현실은..

시읽는기쁨 2007.05.08

부처 예수도 조중동 앞에선 말조심을

대통령의 말에 대한 조중동의 비아냥과 조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젠 그러려니 하지만 어떤 때는 짜증이나 화보다도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긴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말에서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만....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보았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왠지 씁쓸하다. 조중동 애독자 분들! 우리가 뽑았던 대통령, 이젠 좀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 대통령이 석가라면 ⇒ 해탈을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 석가 조중동 ⇒ "석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혼자 살 길 찾아나서" 예수라면 ⇒ "죄없는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조중동 ⇒ “예수, 매춘부 옹호발언 파장” 조중동 ⇒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던지라고 ..

길위의단상 2007.01.11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가끔은 이런 명랑시를 읽으며 빙긋 웃고 싶다. 성(性)과 성(聖)은 원래 한 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초에는 그 어떤 구별도없었으리라.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성(性)은 부끄럽고 은밀한 것으로 변했다. 이제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는지 성(性)은 개방되고 상품화되어 여기저기서 흘러 넘친다. 너무 많은 정보와 과도한 드러냄의 문제점은 성(性)..

시읽는기쁨 2006.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