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51

되는 대로 살거라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너희는 별일 없냐?"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온다. 요즘은 그 뒤에 꼬리가 하나 더 붙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되는 대로 살아라.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다." 어머니는 되는 대로 살라고 하실 분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분이시다. 또 이런 말도 하신다. "살아보니 돈도 다 필요 없더라. 건강만 하면 아무것도 문제 안 된다." 되는 대로 산다는 게 인생에 대해 무책임한 것 같지만 어머니 삶의 지혜에서 나온 충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들려고 하는 데서 갈등과 다툼이 생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대로 받아들이고, 되는 건 되는 대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일이 ..

길위의단상 2014.06.04

아흔 즈음에

백 세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아흔 살, 백 살을 사는 기분은 어떨까? 이 책은 인문학자인 김열규 선생이 아흔 가까이 된 인생의 끝자락에서 쓰신 귀한 글 모음이다. 나이 든다는 것과 죽음에 대하여, 옛 시절의 회상, 이웃과 자연에 대한 단상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노년에 찾아오는 지루한 시간과 외로움을 선생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이백사십 시간 같다고, 아예 가지고 오지고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결같은 시간, 옴짝달싹 않는 시간의 웅덩이에 빠져들고 만 것 같다고 한다.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늙을수록 자주자주 외로움에 젖는다. 마음이 풀기 가신 갈잎 꼴로 버석대는 걸 바라본다. 나이가 드는 것과 고독을 타는 것은 정비례한다. 늙을수록 도시에서 친구들이 많은 데서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

읽고본느낌 2014.05.21

우주력

인간 100년이 우주 시간으로는 1초다, 누군가의 글에서 보았다. 과학 전공을 한 탓인지 이런 수치를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계산해서 맞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인간의 한평생이 우주 시간으로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 줄 알지만, 그래도 정확해야 마음이 놓이는 건 이과생의 한계다. 칼 세이건이 쓴 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늙었고 인류는 너무나도 어리다." 그리고 우주력이 나온다. 우주 나이 약 150억 년을 1년으로 압축한 달력이다. 그럴 경우 10억 년은 우주년의 24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주년에서의 1초는 475년이다. 이를 환산하면 인생 100년은 우주 시간으로 0.21초다. 이 달력에 따르면 9월이 되어서야 지구가 태어났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어서야 공..

참살이의꿈 2014.05.05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한 갑자가 돌아가도록 살아보니 세상일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겠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는 젊은 시절의 호기였을 뿐이었다. 긍정보다는 체념의 철학이 세상살이에는 더 어울린다. 단추 하나 채우거나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데 인생살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잘못 채운 단..

시읽는기쁨 2014.04.04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극장, TV, CD 등으로 아마 대여섯 번은 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중심인 뮤지컬 영화지만, 나에게는 힘들 때면 꼭 기억나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다. 마리아가 수녀원에서 나오며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독백이다.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는 게 뜻대로 안 되고 답답할 때면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래,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거야. 이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주문과 같은 말이다. 옛말에도 곤궁이통(困窮而通)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니 둘 다 비슷한 의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위기는 기회며, 끝은 곧..

참살이의꿈 2014.03.05

식탁의 눈물

내일로 잡혀 있던 제주도행을 취소했다. 예약했던 숙소와 렌터카, 비행기표도 전부 해약했다. 이번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살 집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걱정하던 일이 앞당겨 일어났고, 이곳을 비울 수 없게 되었다. 사는 게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듯,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인생인가 보다. 하긴 인생이 내 뜻대로만 굴러가길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중에서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장애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이며 충동적이다. 모든 것이 남 탓이고 상대 입장을 헤아릴 줄 모른다. 성장 과정에서 정상적인 인격 발달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교실에는 이런 아이가 ..

길위의단상 2014.01.05

경안천 걷기

겨울이 되니 활동량이 확 줄어들었다. 대신에 늘어난 건 잠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도 겨울잠을 잔다면 세상이 훨씬 조용해졌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겨울이라 산에는 가지 않고 가끔 경안천에 나가 걷는다. 오늘은 집에서부터 목현천을 따라 경안천에 들어서 양벌대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6km 정도를 걷는데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추위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공기는 싸늘했다. 새들 역시 천 가운데에 모여서 미동도 하지 않고 이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속에 가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가시는 숨어있다가 불현듯 나타나 가슴을 콕콕 찔러댄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이 가시로 박혀 있다. 건강이, 돈이 가시인 사람도 있다. 지금 당신의 '..

사진속일상 2013.12.29

마지막 4중주

푸가 현악4중주단 네 단원의 인생 이야기가 음악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영화다. 가장 연장자인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숨겨졌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네 명은 서로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옛 연인 등으로 긴밀한 인간적 유대를 맺으며 25년간 4중주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 사이의 갈등, 사춘기 자녀와의 마찰, 친구 딸과의 사랑, 건조한 부부관계, 외도, 외로움 등 보편적인 인간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다. 요란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잔잔하게 인생의 모습을 풀어 보여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어차피 인생이란 삐걱거리고,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튜닝이 안 되어 있다고 연주를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협화음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읽고본느낌 2013.09.27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

시읽는기쁨 2013.08.16

일장춘몽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 성화는 부려서 무엇하나 / 인생 일장춘몽인데...." 어렸을 때 집에 유성기가 있었다. 저녁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 찾아들고 나는 태엽을 돌리며 유성기를 틀었다. 할머니들은 손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 노래도 그중의 하나다. 이제는 그 하얗던 할머니들도, 유성기도, 마당의 감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요사이 내 입에서도 무심결에 이 노래가 중얼거려진다. 그러면 옛날의 그 호롱불이 희미하던 방 풍경이 떠오른다. 본 노래보다는 잡음이 더 많았던, 북한 사람의 음성처럼 간드러지던 유성기 소리도 들린다. 인생 일장춘몽인데, 애면글면 헛된 마음을 쓰면서 힘들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에 있나 싶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 아니던가. 에라, 이기려 하지 말고 져 주자..

참살이의꿈 2013.06.11

사는 기쁨 / 황동규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는 없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뒤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

시읽는기쁨 2013.05.24

돌고도는 인생

인생은 반환점을 찍고 오는 마라토너처럼 결국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성공을 꿈꾸고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하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게 인생이다. 독일의 히르슈하우젠이 이런 재미있는 말을 했다. ㅎㅎ... "인생은 돌고 돕니다. 한 살짜리 아기의 성공은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고, 25세에는 성행위, 50세에는 돈이 성공이며, 75세에는 여전히 성행위를 하는 것이, 그리고 90세에는 다시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성공입니다."

길위의단상 2013.05.07

한 갑자가 지나다

한 갑자가 돌았다. 60년 전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났는데 다시 계사년이 찾아왔다. 12와 60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과 관계된 숫자다. 해를 나타내는 12개의 지(支)가 있고, 일 년은 12달로 나눈다. 밤낮도 12시간으로 되어 있다. 또, 시간이나 분은 60등분을 한다. 이런 것이 순환 구조를 이루면서 60년이라는 큰 수레바퀴를 만든다. 60년 인생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건 사실이다. 축하 인사도 없고 회갑 잔치도 사라졌다. 수명이 늘다 보니 예전 60이 지금은 80 언저리쯤 될 것 같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도 옛말이 되었다. 이젠 대부분이 고희(古稀)를 넘기고, 100세 넘은 분을 만나는 것도 드물지 않다. 회갑을 언급하는 자체가 쑥스럽다. 그래도 60은 인생의 한 매듭으로 충분히 의미..

길위의단상 2013.02.12

논어[14]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때 목표가 섰고, 마흔에 어리둥절하지 않았고,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예순에는 듣는 대로 훤했고, 일흔이 되어서는 하고픈 대로 해도 엇나가는 일이 없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爲政 4 공자의 자기평가서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끝에서 이만한 자부심을 가질 인물이 다른 누가 있을까 싶다. 오래전부터 공자의 이 고백을 접할 때마다 같은 인간으로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의 발 끄트머리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차라리 '~ 되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었다면 열등감이 덜 했을지 모른다. 나를 돌아보면, 40은 불혹(不惑)이 아니라 혹(惑)의 시..

삶의나침반 2013.01.25

위기십결

바둑은 선택이다. 바둑 한 판 두자면 백 개가 넘는 돌을 놓아야 하는데 그만큼의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는 말과 같다. 오직 이 한 수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러 개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이 상대의 수와 어울려 한 판의 바둑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바둑은 선택과 조화다. 바둑을 둬보면 우리네 인생살이와 닮았다는 걸 느낀다. 인생길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에 선다.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한 길을 선택한다. 한참 지나서 보면 다른 길이 훨씬 나았음을 알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선택하고 후회와 자책을 거듭하며 종착지에 이른다.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 지침으로 삼는 게 위기십결(圍棋十訣)이다. 바둑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다...

길위의단상 2013.01.15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사랑했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로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마음이 보이는 거울이 있다면 어떨까?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마음이 보이..

시읽는기쁨 2012.12.10

공갈빵 /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

시읽는기쁨 2012.09.21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여도 바람이 멈추지 않고

공자가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곡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매우 슬펐다. 공자가 하인에게 말했다. "이 곡소리는 슬프기는 하지만 누군가 죽어 상을 당한 슬픔은 아닌 것 같다." 좀 더 나아가니 어떤 사람이 낫과 새끼줄을 들고 있었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다가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제 이름은 구오자(丘吾子)입니다." "당신은 지금 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슬프게 곡을 하고 있소?" 공자의 질문에 구오자가 대답했다. "제게는 살아감에 있어 세 가지의 실책이 있었습니다. 이를 오늘에야 뒤늦게 깨달았으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때문에 이를 슬퍼하여 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다시 곡을 시작하는 구오자를 향해 물었다. "세 가지의 실책이라니요. 내게 숨김없이 말해주시기..

참살이의꿈 2012.08.30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일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진보 정당이 시끄럽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요사이가 꼭 그 꼴이다. '통합'의 간판을 내건 지 몇 달도 안 되었다. 너무 잘 난 사람이 많아서인가, 자신의 길만이 옳다는 독단에서 벗..

시읽는기쁨 2012.05.18

지금 여기 / 심보선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

시읽는기쁨 2012.05.11

바둑과 인생

한 달에 한두 번은 바둑을 두러 종로에 있는 기원에 나간다. 회원이 다섯 명인데 오전에 한 판을 두고, 점심 먹고, 오후에 세 판을 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둑만 둔다. 방내기라고 해서 지는 사람은 집 차이에 따라 돈을 내야 한다. 최하 3천 원에서 1만2천 원까지 나온다. 3만 원 정도면 두 끼 식사를 포함해서 하루를 잘 놀 수 있다. 다섯 명 중에서는 내 실력이 제일 처진다. 2승2패만 해도 준수한 성적이다. 오기가 생겨서 요즈음은 바둑 TV를 보며 공부를 하지만 진보는 거의 없다. 묘한 건 욕심을 부릴수록 바둑은 더 엉망이 된다는 점이다. 지난 번에는 과하게 공격하다가 도리어 내 돌이 잡히며 만방으로 지기도 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번째가 부득탐승(不得貪勝)인데..

길위의단상 2012.04.03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2월의 덕소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은 걸. 입 닥치고 강 가운에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피정에 다녀온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옆에 있던 한 분이 2박3일 내내 울기만 하더란다. 나중에 들은 사연은 이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고사였다. 지난 10월의 일이었다. 아들은 고3 수험생으로 수능을 앞두고 있어 누나의 죽음을 알리지도 못했다. 대학..

시읽는기쁨 2012.03.14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두려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시인의 말처럼 젊었을 때는 마흔이 되고, 쉰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재미로 살까 싶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마흔과 쉰이야말로 인생의 절정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뒷날이 되어 오늘..

시읽는기쁨 2011.10.06

꽃 심는 즐거움 / 이규보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네 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지 못해라 - 꽃 심는 즐거움 / 이규보 種花愁未發 花發又愁落 開落摠愁人 未識種花樂 - 種花 / 李奎報 인생사 자질구레한 일들 탈도 많다. 뜻대로 되기보다는 일마다 어그러지기 일쑤다. 주룩주룩 비 오는 날에는 놀러갈 약속 생기고, 개었을 때는 대부분 할 일 없이 지낸다. 배불러 상 물리면 맛있는 고기 생기고, 목 헐어 못 마실 땐 술자리 벌어진다.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 오랜 병 낫고 나니 이웃에 의원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는 다른 시에서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이렇게 한탄했다. 그의 시는 엄살기가 있다 하나 허세를 부리거나 현학적이지 않아서 좋다. 늑대를 피해서 도망간 것이 ..

시읽는기쁨 2011.04.25

인생의 선용

인생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만큼 오래 살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잘 살기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는 존재도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러보크(J. Lubbock)의 ‘인생의 선용(善用)’은 범우사에서 나온 같은 제목을 가진 작은 문고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전 직장에서 선물로 받았던 것인데 서랍 속에 있던 걸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글에는 노숙한 인생의 스승이 전하는 당부와 지혜의 말이 가득하다. 그러나 180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탓인지 고리타분한 느낌도 있다. 서양의 공자 왈 맹자 왈, 을 듣는 기분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내면의 소리이기 때..

읽고본느낌 2010.11.30

삶의 이야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조각 작품 전시장이 있다. 대공원 산책로에 있어 자주 지나간다. 그중에서 유영교의 ‘삶의 이야기’라는 돌조각 작품이 늘 눈길을 끈다. 가족상으로 보인다. 부모는 서 있고, 아이들은 누워있거나 앉아 있다. 그러나 바라보는 시선이 전부 다르고 표정도 어둡다. 각자가 자신의 일에 갇혀 고뇌하고 있다.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 시선이 아프다. 인생은 어차피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걸까?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과연 얼마였을까? 이 작품 앞에 서면 슬퍼진다.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두 시였다. 삶이 쓸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잘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쳤지만 남은 건 빈 바람소리뿐이다.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사진속일상 2010.11.10

배추는 다섯 번 죽는다

김장철이 다가왔다. 올해는 배추 파동을 겪은 뒤라 김장을 하는 느낌이 여느 해와는 다를 것 같다. 배추 한 포기에 15,000원이나 한 적도 있었으니 그때는 김장을 못하는 줄 알고 걱정한 사람도 많았다. 할인을 해도 1만원이 넘는 배추였는데 어느 가게 앞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지나치게 야단법석을 떨기도 있지만 한국 사람에게 김치는 쌀 만큼이나 소중한 그 무엇임을 그때에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니까 나는 농작물 가격에 둔감한 편이다. 쌀을 비롯해서 여러 작물을 가져다 먹고 있으니 시장가격은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농산물 가격이 올라서 농민들 형편이 나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가격 문제는 유통구조 등 복잡한 요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부의 정책이 농민을..

참살이의꿈 2010.11.02

팔죽시(八竹詩) / 부설거사(浮雪居士)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粥粥飯飯生此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 八竹詩 / 浮雪居士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내 7 세기 신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있었다. 그는 서라벌에서 출생해서 20세 때 출가를 했다. 수도를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던 중 김제에서 묘화(妙花)라는 아가씨를 만나 환속했다. 그리고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부설거사는 뒤에 내변산 쌍선봉 중턱에 월명암(月明庵)을 짓고 수도..

시읽는기쁨 2010.09.0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속을 외경으로 가득 채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군분투 싸우던 시절이었다. 칸트의 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심각한 척 폼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책을 독파했다. 당시에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은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을 읽었을 때 - 이 책은 부피도 얇고 읽기도 쉬웠다 - 뒷부분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이 두 가지가 결국 내가 찾는 ..

참살이의꿈 2010.06.07

[펌] 오늘이 인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만 들어오면 “내가 선생질이나 하며 썩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따위 한탄이나 늘어놓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교사였지만 동시에 학생들에게서 가장 경멸받는 교사였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계집애 만나러 다니고 고고장 가고 하는 건 대학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못해서 안달하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지.” 사람 같아야 상대를 하지, 다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잠자코 있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한 녀석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하는 거하고 지금 하는 거하고 같습니까?” 수업은 중단되고 녀석은 교무실로 끌려가 종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녀석의 말은 내게 남았다. 한국 부모들은 대개 아이의 인생을 준비기와 본격기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길위의단상 2010.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