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51

이제 행복할 시간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불행과 행복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숱한 불행과 드문 행복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믿었던 친구의 배신, 타인에 대한 집착, 서로에 대한 오해 등 관계에서 오는 불행. 아픈 몸, 경제적 어려움, 불규칙한 생활, 밥벌이의 고단함, 일상의 권태 등 상황이 주는 불행. 걱정, 불안, 질투, 증오, 두려움, 죄책감, 자기 연민 등 온갖 감정이 일으키는 불행. 하다못해 날씨가 더워도, 길이 막혀도, 주위가 시끄러워도 삶은 괴롭다. 불행할 조건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서 인생의 기본값이 불행일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불행 때문일까? 불행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참살이의꿈 2022.05.04

다읽(14) - 회상

얼마 전에 영화 '사일런스'를 5년 만에 다시 감명 깊게 봤다. 이 영화와 함께 원작 소설인 엔도 슈사쿠의 도 종교 분야에서는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본질 및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토록 심도 있게 그린 작품도 드물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새롭게 느꼈다. 어쩌면 곁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첫째는 일본인의 잔혹성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과 '사일런스'는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이야기다. 붙잡힌 천주교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방법이 너무 악랄하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일본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서양인 신부는 죽이는 게 아니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줘서 끝내 배교하게 만든다. 후미에를 한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는 실존 인물이다. 우리나라..

읽고본느낌 2022.02.06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傳記)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데 음양으로 헌신했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아니라 도리어 우울하고 음습한 그늘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이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 둘은 1903년에 결혼했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뒤에 고백했다. 실제로 수학 분야에서는 아인슈타인보다 밀레바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밀레바는 훌륭한 품성에다 지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었..

읽고본느낌 2022.01.10

에브리맨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줄이다. 작가가 인간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병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 여기는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 의료가 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은 미국 작가인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브리맨(Everyman)은 '모든 사람', 또는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 주인공은 이름 대신 '그'라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라는 한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 이야기다. 중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삽입되지만 그것 또한 병이나 죽음과 연관..

읽고본느낌 2021.12.26

그러려니

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이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 사전을 찾아보니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 그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덧'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상태를 그럭저럭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그럭저럭'보다 좀 더 진화한 말이 '그러려니'가 아닐까 싶다. '그러려니'에는 세상살이를 흘러가는 대로 관조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그럭저럭'보다 내 의지가 더 탈색된 느낌으로, 체념에 가까운 태도다. [체념(諦念)은 '살필 체(諦)'에 '생각할 념(念)'으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본뜻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일흔이 되니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21.12.21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어린 손주를 보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나를 위해 있고, 친구나 장난감도 마찬가지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걸 헤아릴 능력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듯 동화 나라에서 살아간다. 어른 눈에는 그런 행동마저 마냥 귀엽게 보인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배웠다. 배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구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배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꼭 신체만이겠는가. 인간의 정신도 인류 여명기의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차례대로 답습하며 성장해 나가는 건 아닐까. 5백 년 전까지도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거치며 사람들에게 지동..

참살이의꿈 2021.12.07

비바리움

인간의 삶을 시니컬하면서 재미나게 그린 영화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생을 한 꺼풀 벗겨낸 실상은 어쩌면 이 영화와 같은 악몽인지 모른다. '비바리움'은 은유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는데 큰 수고를 요하지는 않는다. 톰과 젬마는 결혼 후 살 집을 알아보러 부동산 회사에 들린다. 마틴이라는 직원을 따라 주택 단지에 들어가 한 집을 소개받지만 단지 밖으로 나갈 길을 잃어버린다. 똑같은 집들이 사방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세트장이다. 탈출할 온갖 방도를 써 보지만 실패한다. 난데없이 박스로 아이가 배달되면서 영화는 우리의 결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초반에 탁란으로 크는 뻐꾸기가 나오는데 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근..

읽고본느낌 2021.11.29

독고다이 기질

독고다이 : 스스로 결정하여 홀로 일을 처리하거나 그런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독고다이의 뜻이다. 일본말이지만 엄연히 우리말 사전에 실려 있다. '특공대(特攻隊)'의 일본 발음이 독고다이다. 조직적인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서 홀로 임무를 수행하는 단독자가 독고다이다. 군대나 건달 세계를 떠나 범위를 넓히면 사회의 아웃사이더도 독고다이의 기질과 통한다고 하겠다. 어느 분의 글에서 독고다이를 재해석한 걸 보았다. 그분은 독고다이를 한자로 '獨固多異'라 옮겼다. '혼자만을 고집하면서 많은 이와는 다르다' 라는 뜻이다. 독고다이의 원뜻을 살린 재미있는 조어다. 아니면 독고를 '獨孤'라 써도 좋을 것 같다. 독고다이라는 어감에는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상식과 다르게 자기만의..

길위의단상 2021.10.28

인생은 고(孤), 고(苦), 고(Go)

아침에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면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의 낮은 기온 탓으로 생기는 복사안개다. 창밖을 보고 있으면 나도 짙은 안갯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안갯속에서는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던 동무도 자취를 감췄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 꼭 인생길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습관처럼 "곧 죽는다"를 나직히 읊조린다. 안갯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를 본다. 안 그래도 울적하던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안개가 사라지자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일어난다. 시계는 8시를 너머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하루가 시작된다.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친구가 옆에 있어서 위안이 된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오래 살게 되면 어차피 친구도 다 떠나간..

참살이의꿈 2021.10.27

30%

당구 모임이 있는 날 저녁에는 편의점 야외 탁자에서 캔맥주로 입가심을 한다. 술집보다 경제적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밀폐된 실내보다 안전해서 좋다. 출입구 옆이라 옹색하긴 하나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유럽의 야외 카페가 부럽지 않다. 그렇게 동기들끼리 만나면 옛날 학창 시절의 추억담이나 앞으로 살아갈 노년의 삶 따위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건강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등산 모임이 하나둘씩 없어진다. 등산 공고를 하면 전에는 북적댔는데 이제는 서넛밖에 나오지 않으니 산 대신 둘레길 같은 수월한 걷기로 대체된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제는 한 친구가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인구 통계로 볼 때 남자 80세가 되면 생존율이 30% 정도라는 것이다. 이미..

길위의단상 2021.10.16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비망록 / 문정희 비망록이란 그래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게다. 젊은 시절의 비망록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한 생애를 허둥거린들 어떠리. 아프고 흔들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새긴 별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시읽는기쁨 2021.03.27

힘 빼는 데 3년

"힘을 빼라" "부드럽게 밀어라", 당구를 칠 때 옆의 고수한테서 자주 듣는 말이다. 수 년째 똑같은 지적을 받고 있으나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힘을 빼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아마 10년 정도 지나서야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한다. 전문 선수들이 그럴진대 일반 아마추어는 오죽하겠는가. 운동에서 힘 빼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이기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힘주어 친다고 공이 세게 나가는 게 아니다. 근육이 경직되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니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갈 뿐이다. 멘털 스포츠인 바둑도 마찬가지다. 힘이 들어간 수는 ..

참살이의꿈 2021.02.02

재미와 의미

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

참살이의꿈 2020.12.07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

시읽는기쁨 2020.11.12

걱정 많은 한국인

지난 9월에 한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에서 세계 주요 14개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9개 항목(기후변화, 감염병, 테러리즘, 사이버 공격, 핵무기 확산, 경제 불안, 세계 빈곤, 국가 간 갈등, 난민)이 국가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조사했다. 이중 5개 항목에서 한국의 걱정 정도가 1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한국은 감염병 걱정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다. 감염병 확산이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한국은 89%나 되었다. 반면에 독일 55%를 비롯해 서구 각국의 평균은 60%대였다.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도 한국이 제일 높았다. 세계 경제 현황이 국가에 위협이라고 답한 비율이 한국은 83%로 1위였다. 2위가 스페인으로 76%이고, 전체 평균은 50%대였다. 핵무기 확산을..

참살이의꿈 2020.11.06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단풍이 참 곱다. 사라지는 것들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창 밖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끝도 이렇게 물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도 그를 닮기를, 잠깐 꾸는 꿈같이....

시읽는기쁨 2020.11.02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여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

시읽는기쁨 2020.06.17

바느질 /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 바느질 / 박경리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한 게 군대에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군대 생활을 하자면 실과 바늘이 필수였다. 그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바늘귀에 실을 꿰 드리는 게 내 담당이었다. 지금은 아내한테서도 바느질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꿰매야 할 정도로 해진 옷을 입지도 않거니와, 어지간하면 세탁소에 맡기기 때문이다. 어쩌다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하는 아내 모..

시읽는기쁨 2020.05.05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행복이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까지 말한다. 인생의 제일 목표가 행복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행복을 좇는 일이 오히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삶에는 행복 말고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이 책 는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삶의 의미를 더 강조한다. 지은이인 스미스(E. E. Smith) 박사는 긍정심리학자로 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한다. 의미야말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행복한 삶과 의미 있는 삶은 같지 않다. 행복에는 의미 없는 행복도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데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어야 깊이 있고 충만..

읽고본느낌 2020.03.07

산다는 건 힘들어

가끔 아내와 막걸릿잔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눈다. 신변에서 일어난 일부터 이웃과 자식 등 사람에 관한 얘기가 주된 화제다. 그러다가 공통으로 맺어지는 결론이 있다. "산다는 건 힘들어!" 모르는 사람은 날 보고 팔자 편하게 산다고 할지 모른다. 자식은 모두 출가시켰고, 연금을 받으니 돈 벌 걱정 없고, 무슨 염려 있겠느냐는 것이다. 블로그만 보면 신선 같이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양태는 비슷하다.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 등 근심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층간소음은 요사이 내 일상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 이웃을 미워하는 내 모습이 두렵다. 어제 아내는 위층을 다시 방문했다. 그쪽에서는..

참살이의꿈 2020.02.12

얼떨결에 /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는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 얼떨결에 / 고증식 올 한 해도 꼬리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일 년이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

시읽는기쁨 2019.12.23

진경 / 손세실리아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 진경(珍景) / 손세실리아 시집 를 폈을 때 맨 처음에 만난 이 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이 시에 묘사된 노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엇엔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칼에 베인 것 갈기도 한 통증이 생겼다. 백화사 굽잇길의 노파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직역하면 '살아내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고단한 인생길일지라도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을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 꽃이 되고 진경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애잔한 생명붙..

시읽는기쁨 2019.11.22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지난 추석 연휴 중 SBS TV에서 '요한, 씨돌, 용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요한과 씨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김용현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젊은 시절의 요한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의 만남을 계기로 요한은 독재 타도의 시위 현장에서 앞장을 섰다. 그의 활동 중 하나가 1987년에 군 복무 중 의문사한 사병의 억울한 죽음을 고발한 일이다. 군에서는 훈련을 받다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 후보에게 표를 행사했다고 구타를 당해 숨진 것이다. 요한은 사병의 가족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에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요한이 주장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요한은 사라졌..

참살이의꿈 2019.09.21

다가오는 것들

40대 중반쯤 되면 생의 전환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주변 환경도 변한다. 이루고 성취하기보다 잃고 보내는 일이 늘어난다. 삶이 익숙해지는 대신 심드렁하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받으며 일에서도 변방으로 밀린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 더는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재직하며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부다. 성실해 보이는 남편과 십대 후반의 아들, 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다. 학교에서는 급진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갈등을 빚고, 출판사는 수익 문제로 책 출간을 거절한다. 성장한 자식은 나탈리에게서 멀어지고, 늘 딸에게 의지하려던 어머니도 세상을 뜬다. 이런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다가..

읽고본느낌 2019.09.08

나 홀로 웃노라 / 정약용

有栗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倡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 獨笑 / 丁若鏞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허구한 날 끼니 걱정 벼슬 높은 사람은 으례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펼 길이 없다오 복 많아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라도 무너지기 마련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꼭 바보라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심술 부려 세상만사 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모르리라 나 홀로 웃는 까닭 이만큼이라도 살아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도모하는 일은 자주 어긋나게 마련이고, 열에 아홉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읽는기쁨 2019.08.02

로망

먼 남의 얘기가 아니다. 당장 내 얘기일 수 있다. 아주 가까이는 아흔 살이 다가오는 양가의 어머니가 계시고, 우리에게 지금 바로 이런 일이 닥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로망'은 함께 치매에 걸린 70대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같이 살던 아들 부부는 부모를 감당하지 못해서 독립해 나갔고, 집에는 부부 둘만 남았다. 동반 치매에 걸린 두 사람의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순재 씨와 정영숙 씨가 부부 역을 맡아서 애틋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로망'이 작품성 있는 영화는 아니다.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공감을 준다. 치매에서 자유로운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제목이..

읽고본느낌 2019.05.29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

시읽는기쁨 2019.05.07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얼마 전에 타계한 키키 키린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인생 후루츠'는 90세의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가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쁘고 맛있게 열매가 영글듯 두 분 노년의 삶이 아름답다. 마냥 부럽기만 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신도시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신도시 개발이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하는 슈이치와는 마찰을 일으킨다. 히데코 할머니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에 할아버지와 철학이 맞는다. 두 분은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그들만의 자연주의 삶을 실천한다. 꽤 ..

읽고본느낌 2019.04.17

고통의 의미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인간을 뺀 다른 동물은 생존과 번식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반면에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더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동물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었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다. 일상사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생존과 번식 본능과 관련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의미만 발견하면 생존과 번식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독신으로 수도 생활에 몰두하는 종교인이 그 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다.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는 그만큼 소중하다. 동물의 생존 전선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통..

참살이의꿈 2018.09.08

손금 보는 밤 / 이영혜

타고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을 한 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양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과 사람, 물줄기가 내 생의 요..

시읽는기쁨 201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