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56

로망

먼 남의 얘기가 아니다. 당장 내 얘기일 수 있다. 아주 가까이는 아흔 살이 다가오는 양가의 어머니가 계시고, 우리에게 지금 바로 이런 일이 닥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로망'은 함께 치매에 걸린 70대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같이 살던 아들 부부는 부모를 감당하지 못해서 독립해 나갔고, 집에는 부부 둘만 남았다. 동반 치매에 걸린 두 사람의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순재 씨와 정영숙 씨가 부부 역을 맡아서 애틋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로망'이 작품성 있는 영화는 아니다.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공감을 준다. 치매에서 자유로운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제목이..

읽고본느낌 2019.05.29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

시읽는기쁨 2019.05.07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얼마 전에 타계한 키키 키린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인생 후루츠'는 90세의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가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쁘고 맛있게 열매가 영글듯 두 분 노년의 삶이 아름답다. 마냥 부럽기만 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신도시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신도시 개발이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하는 슈이치와는 마찰을 일으킨다. 히데코 할머니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에 할아버지와 철학이 맞는다. 두 분은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그들만의 자연주의 삶을 실천한다. 꽤 ..

읽고본느낌 2019.04.17

고통의 의미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인간을 뺀 다른 동물은 생존과 번식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반면에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더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동물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었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다. 일상사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생존과 번식 본능과 관련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의미만 발견하면 생존과 번식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독신으로 수도 생활에 몰두하는 종교인이 그 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다.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는 그만큼 소중하다. 동물의 생존 전선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통..

참살이의꿈 2018.09.08

손금 보는 밤 / 이영혜

타고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을 한 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양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과 사람, 물줄기가 내 생의 요..

시읽는기쁨 2018.09.04

선택과 과보

한 판의 바둑은 인생과 닮았다. 포석 단계는 청소년기와 비슷하다. 처음 둘 때 정석이 등장하듯, 인생 초반도 정해진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시기다. 중반전이 되면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치열함은 삶의 현장과 닮았다. 후반부에 들어서면 마무리를 잘 해야 하는 건 바둑이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바둑에서 어떤 수를 둘까 선택을 해야 하듯 인생도 그렇다. 바둑이나 인생이나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수를 택하느냐에 따라 바둑은 천변만화한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 라는 사소한 선택에서 결혼 같은 중차대한 선택도 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 어떤 선택은 인생 행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분명한 것은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바둑의 경우에는 잘못된 한..

길위의단상 2018.07.05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 문정희

큰 것을 도둑맞은 것 같다 거친 숨 몰아쉬며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이 다녀간 것일까 아무것도 없다 공허뿐이라고 그냥 가 보는 거라고 말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구구구 모이 몇 알 주워 먹느라 할퀴며 깃털 뽑히며 두 날개 뭉개졌는데 벌써 떠나야 한다고 한다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가랑잎도 아닌데 자꾸 떨어져 내리다가 내일은 어디일까 정말 어디를 흔들어야 다시 푸른 음악일까 -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 문정희 지금 내 심정이다. 산다는 게 이렇게 형편없는 줄 몰랐다. 진흙탕에서 버둥대는 느낌이다. 이러면서 생은 끝나갈 것이다. 뭘 하며 산 거지, 돌아보면 공허다.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라고 물으니 더 나락이다.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는 걸 시인도 모를 리 없다. 밧줄은 썩어가는데..

시읽는기쁨 2018.06.06

후회

세계 정상을 정복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도 후회가 있을까? 어느 신문에서 조치훈 9단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다. 올해로 입단 50주년을 맞은 조치훈 9단에게 감회를 묻자 첫마디가 "후회가 많아요"였다. "술 먹는 시간 줄이고 열심히 공부했다면 더 잘했을 텐데, 하고 후회해요. 더 많은 승리나 타이틀을 놓쳐서만은 아니예요.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바둑만 보고 살아온 인생이잖아요. 게으름 피우지 않고 공부했다면 스스로 만족하는 바둑을 두었을 테고,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무엇보다 자신이 납득하는 인생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후회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아쉬움이라고 해도 좋다. 과거를 돌아보며 슬퍼지는 것은 인생의 매듭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

참살이의꿈 2018.06.02

한동안 그럴 것이다 / 윤제림

1 한 젊은 부부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를 공원에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다. 그네 위에 걸터앉혀 놓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저럴 것이다. 2 저러다가 어느 날,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린 자신들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아이가 자신들의 가슴 속에 푸욱 들어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는 한동안 부모의 가슴에 갇혀 자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는 부모의 가슴에 난 작은 틈을 찾아낸다. 문을 낸다,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 그 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3 또 어느 날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하날 양손에 붙들고 와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 한동안 그럴..

시읽는기쁨 2018.05.18

오늘만 산다

최근에 지인이 당한 비통한 사고 소식을 연이어 들었다. 전화 통화에서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초등학생인 손녀가 죽었단다.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머리를 시멘트벽에 부딪쳐 뇌진탕이 일어났다고 한다. 수술해도 소용이 없었다며 울먹인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엄마는 며칠째 실신하며 응급실에 실려 간다고 한다. 화목하고 믿음이 좋은 집안으로 알려졌는데 불의의 사고를 맞고 말았다. 아빠는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며 정신을 못 찾고 있단다. 손녀를 잃은 본인의 심정도 오죽할 것인가. 사람을 만나기 싫어 두문불출하고 있단다. 너무 안타까워서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또 한 친구의 조카도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의 아들인데 내..

참살이의꿈 2018.03.29

쫄딱 망하기 / 백무산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아니다 소설가 백신애가 1930년대에 쓴 글에 요즘 촌부들은 이악해서 도회지 사람들을 속여도 먹는다, 고 썼다 오랜 세월 빨아먹어도 그래도 아직 시골로 남아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시골로 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반가운 사람들은 도시에서 망하고 왔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벌이지 않고 땅장사를 부업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아이가 시골에 이사 와서 동네방네 졸랑졸랑 자랑을 하고 다닌다 우리 아버지 서울에서 쫄딱 망했어요 망해서 즐거운 것은 아이와 땅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주가 쫄딱 망해서 생긴 것이 땅이다 땅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건 대체로 망한 거다 구름의 발길을 따라갔다면 그건 이미 사전에 망한 거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망하..

시읽는기쁨 2018.03.01

어쩌다 어른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채널 돌릴 때 잠깐 봤을 뿐 제대로 시청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제목이 특이해서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그때마다 왜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를 생각하게 되니 작명 하나는 잘 한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어찌하다 보니 어른이 되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어른'은 육체적인 나이가 의미하는 어른일 것이다. 정신의 성숙도와는 관계없다. 그렇게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인격적으로는 익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미성숙한 어른이 주변에는 수두룩하다. 그걸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한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온통 '어쩌다' 투성이다. 어쩌다 태어나고, 어쩌다 성인이 되고, 어쩌다 자식을 낳아 부모..

참살이의꿈 2017.12.26

잘 지는 법

이기고 지는 것은 기자지상사(棋者之常事)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이기면 한 번 진다. 바둑을 두면서 요사이 깨달은 점은 질 때 잘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것보다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패한 바둑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 바둑이 수세로 몰리면 마음이 흔들린다. "졌습니다" 하고 깔끔하게 돌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도 별 위로가 안 된다. 이럴 때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졌을 때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지더라도 상큼하게 지자고 다짐하며 바둑판 앞에 앉는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습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기고 지는 데서도 벗어나고 싶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 잘 지는 훈..

참살이의꿈 2017.12.09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시골에 내려가 소식 끊고 지내는 동기가 셋이나 된다. 가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복잡한 인간관..

시읽는기쁨 2017.12.05

다만 어리석을 뿐

매일 저녁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든다는 한 지인은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자주 토로한다. 사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 과거에 자신이 잘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 괴롭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야 즐겁게 반추할 수 있지만, 하필 후회스럽고 자책할 일만 생각나니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잠 잘 자는 나도 어쩌다 불면의 새벽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상념이 오가는데 옛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인과 마찬가지로 자랑할 일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로 머리가 꽉 찬다. 어떤 때는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추억으로 산다는 데, 노년에 되씹는 추억이 꼭 감미롭지만은 않다. 그중에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셋째를 낙태시킨 일이다. 딸 둘을 두고 수년이 지나 아..

참살이의꿈 2017.12.04

타고나야 해

은퇴한 야구 선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구의 자질은 타고난다고 한 마디로 단언했다. 연습벌레로 소문난 유명 야구 선수도 자신이 옆에서 봤을 때 타고난 타격의 재질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노력이 더해져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어떤 수준 이상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한 야구 선수들의 천재성과 노력의 비율을 9:1까지 봤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온 에디슨의 말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선한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거짓말이란 걸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생일 때 반에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 기간이 되어 우리가 약을 먹어가며 밤을 새워 책과 끙끙댈..

참살이의꿈 2017.10.30

인생을 향유하는 능력

분당을 지나는 탄천 산책로를 저녁나절에 걸을 때가 있다. 도시를 관통하는 위치 탓인지 늘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다. 넓은 공터에서는 함께 모여 에어로빅을 하는 팀도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힘찬 기합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그 소리만 들어도 절로 기운이 솟는다. 가까이 가서 보면 대부분이 아줌마들이다. 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남자는 가뭄에 콩나물 나듯 서넛 정도 끼어 있을 뿐이다. 마음은 있어도 쑥스러워서 들어서지 못할 것 같다. 반면에 여자들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리듬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흘린다. 무척 적극적이다. 누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남녀 성의 구분이 뚜렷이 나타난다. 노년이 되면 여자들이 훨씬 더 활동적이면서 다양한 관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대신에 남자들은 퇴직하고 나서 움츠러든다..

참살이의꿈 2017.08.20

더 살아봐야 돼

10여 년 전쯤 주변 상황이 무척 힘들 때였다. 벌여놓은 일이 걸림돌이 되어 모든 것이 꼬이기만 했다. 한 친구가 여주로 찾아왔다. 친구가 내 사정을 자세히 알 리는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구는 자기 집의 행복을 자랑했다. 부모님이 이웃에 덕을 베풀며 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복을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친구네 집은 우리보다 훨씬 더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걱정거리가 적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교되는 처지에서는 심사가 편안치 않았다. 덕에 반드시 어떤 보상이 따라온다는 논리는 단순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선행하는 행위와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우리가 덕으로 생각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17.08.14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둘.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주..

시읽는기쁨 2017.08.12

폭풍의 날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별로 일을 만들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가끔 폭풍이 몰아칠 때가 있다.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닥쳐와서는 일상을 휘저어놓는다. 며칠 내에 잠잠해지기도 하지만 여파가 오래 가기도 한다. 인생길 곳곳에 지뢰를 숨겨둔 신은 심술궂다. 10년 전에 끊은 담배 한 갑을 태웠다.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담배 생각이 저절로 났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하는 데 담배의 공이 컸다. 담배와 알코올에 있는 심리적 위안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 일은 돌이켜 보니 내 인과응보인 측면도 있다. 일을 명확히 처리하지 못하는 습성이 한몫을 했다. 마찰이 두려워서 무마한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내부에서 증폭되면..

참살이의꿈 2017.03.21

차창 밖 풍경

나는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이 좋다. 서울을 오갈 때 버스를 이용하는데 늘 창가에 앉아 바깥 경치에 넋을 놓는다. 항상 보는 것이지만 다닐 때마다 새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밖에 별 관심이 없다. 자리에 앉으면 아예 커튼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젊은이는 스마트폰에 빠져든다. 패키지여행을 가면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다. 차 안에서는 대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잔다. 그런데 나는 바깥 경치에 탐닉한다. 버스에 타면 눈이 더 말똥말똥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참 특별하구나, 생각한다. 캄캄한 밤에도 마찬가지다. 드문드문 있는 불빛만이라도 괜찮다. 풍경이 단순해지면 이런저런 상념에 더 잘 빠진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에는 뭔가 신비한 요소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시간의 흐름이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정지한 장..

길위의단상 2016.11.20

세 가지 불행

송나라 때 철학자로 정이(1033~1107)란 분이 있다. 중국 성리학의 기초을 놓은 분이라는데, 후세에 남긴 잘 알려진 글이 있다.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少年登科 席父兄弟之勢 有高才能文章 人生三不幸 소년 시절에 과거급제하고, 부모 형제의 권세가 대단하고, 재주와 문장이 뛰어난 것, 이것이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이다. 삶의 늘그막이 되어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아마 젊은이는 공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금수저로 태어나느냐, 흙수저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거반 결정되어 버리는 요즈음 같은 시대는 더욱 그렇다. 아마 정이가 살았던 송나라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남긴 것이리라. 정이는 왜 이 세 가지를 불행이라고 했을..

참살이의꿈 2016.10.17

사는 맛 / 정일근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 사는 맛 / 정일근 혀에는 미뢰가 있어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매운맛 등을 느낀다고 한다. 인생의 맛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단맛만 밝히면 절름발이가 된다. 독이 든 복어를 먹는 사람처럼 삶의 고수는 짜고, 쓰고, 시고, 매운 인생의 맛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설사 즐기..

시읽는기쁨 2016.06.16

가늘고 길게

굵게 사는 삶은 꿈꿔 보지 않았다. 거창한 꿈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초등학교 학적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장래 희망은 내리 교사가 적혀 있었다. 부모 희망란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그런대로 했으니 의사나 판사를 시켜볼 만도 했건만 아버지는 오로지 교사 되기를 바라셨다. 대학생 때 고시 공부하던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도 나를 잘 파악하고 계셨다. 요사이는 교사 되기가 어렵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교사가 부족해서 단기 양성 과정도 있었다. 남자가 교사를 희망하면 졸장부 취급을 받던 때였다. 어릴 때부터 내 기본 마인드는 적게 먹고 적게 싸자 주의였다. 나는 햄릿형이다. 소심하다. 사상체질로는 소음인에 속한다. 가늘게 살 팔자다. 당연히 굵고 짧게 사는 걸 부러워하지 않는다. ..

참살이의꿈 2016.05.17

본래 그 자리

내 생각이란 게 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선인이 말했듯,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전 세대 사람들이 했던 사유의 잔해에 불과하다. 나만의 생각은 없다. 맹난자 선생의 를 읽다가 든 생각이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생과 사, 영혼, 존재의 의미 등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수도자는 일생을 바쳐 정진한다. 이 질문에 바탕하지 않은 철학이나 예술은 없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는 이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지은이의 지적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는 동서고금의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 종교인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삶과 생각을 보여준다. 백과사전식 나열이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에 따른 흐름이 있어 중..

읽고본느낌 2016.03.16

유스

젊었을 때는 젊다는 걸 잘 모른다. 젊음(Youth)의 의미를 상기시켜 주려는 걸까, 쇠락한 노년의 모습과 발랄한 젊음을 불편할 정도로 집요하게 대비시킨다. 그러면서도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다. 여러 단편적인 장면들이 교직 되며 영화를 이끌어가는데 어떻게 느끼느냐는 관객의 몫이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영화다. 돈 많은 사람들이 요양 겸 휴식을 위해 찾는 풍광 좋은 스위스의 고급 호텔에 80대의 두 친구가 묵고 있다. 한 사람은 유명한 작곡가며 지휘자로 현역에서 은퇴해서 욕심 없이 살고 있다. 다른 사람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으로 바쁘다. 아마 이 둘은 서로 다른 노년의 삶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한쪽은 완전히 ..

읽고본느낌 2016.01.22

즉문즉설

한 달 가까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다. 그동안의 조건이 이런 내용과 가까이하는데 알맞았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에 같이 아파하기도 하고, 스님의 기상천외한 답변에 인식의 전환이 생기는 경험도 했다. 팟캐스트에 저장되어 있는 법문을 600회 정도 들었으니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었던 기간이 준 고마운 선물이었다. 스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행복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어떤 조건이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주어진 과보를 인정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변화시키려 하는 데서 번민이 생긴다. 우선 내가 변해야 한다. 미워했던 상대에 대한 참회에서 치유가 시작..

참살이의꿈 2015.06.08

인생의 주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렴에 걸렸다. 고열에 기침이 계속 이어졌다. 위의 형을 잃은 뒤라 가족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낫지 않자 어머니는 병원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어 치료에 매달렸다.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작은 읍이었다. 병실이 없으니 매일 병원으로 왕래해야 했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도시로 나갈 형편도 못 되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 사는 친척이 소식을 듣고 페니실린을 구해서 내려왔다. 결과적으로 페니실린은 내 목숨을 살린 기적의 약이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페니실린 주사를 맞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고 열이 내렸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이 나에게도 구세주가 된 셈이다. 무슨 ..

참살이의꿈 2015.05.24

마흔 /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아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 마흔 / 최승자 내 서른은 어땠고, 마흔은 어땠을까? 너무 멀리 왔다. 시인의 절망까지는 아니었어도 돌아보니 그저 신기루였을 뿐. 악착같이 매달린 걸 수록 그랬다. 내 앞에 보이는 게 허깨비인 줄 알지만, 그래도 향하여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 갈증을 달래주는 한 줌의 물에 취하여, 믿는 도끼에 발등을..

시읽는기쁨 2015.02.23

국제시장

울고 웃으며 재미있게 보았다. 상당히 잘 만든 영화다.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린 장면도 시대상의 한 단면이다. 너무 이념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처음에는 영화 보길 망설였지만 천만이 넘었다는 호기심 때문에 극장을 찾았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는지 확인하고도 싶었다. '국제시장'은 흥남 철수, 독일 광부 파견, 월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굵직한 현대사의 중심을 살아간 덕수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어버리고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소년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그의 일생을 좌우해 버린다.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그 시대를 살아낸 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 영화는 웃음 코드를 적당히 배치해 놓아..

읽고본느낌 201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