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56

삶의 이야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조각 작품 전시장이 있다. 대공원 산책로에 있어 자주 지나간다. 그중에서 유영교의 ‘삶의 이야기’라는 돌조각 작품이 늘 눈길을 끈다. 가족상으로 보인다. 부모는 서 있고, 아이들은 누워있거나 앉아 있다. 그러나 바라보는 시선이 전부 다르고 표정도 어둡다. 각자가 자신의 일에 갇혀 고뇌하고 있다.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 시선이 아프다. 인생은 어차피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걸까?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과연 얼마였을까? 이 작품 앞에 서면 슬퍼진다.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두 시였다. 삶이 쓸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잘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쳤지만 남은 건 빈 바람소리뿐이다.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사진속일상 2010.11.10

배추는 다섯 번 죽는다

김장철이 다가왔다. 올해는 배추 파동을 겪은 뒤라 김장을 하는 느낌이 여느 해와는 다를 것 같다. 배추 한 포기에 15,000원이나 한 적도 있었으니 그때는 김장을 못하는 줄 알고 걱정한 사람도 많았다. 할인을 해도 1만원이 넘는 배추였는데 어느 가게 앞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지나치게 야단법석을 떨기도 있지만 한국 사람에게 김치는 쌀 만큼이나 소중한 그 무엇임을 그때에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니까 나는 농작물 가격에 둔감한 편이다. 쌀을 비롯해서 여러 작물을 가져다 먹고 있으니 시장가격은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농산물 가격이 올라서 농민들 형편이 나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가격 문제는 유통구조 등 복잡한 요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부의 정책이 농민을..

참살이의꿈 2010.11.02

팔죽시(八竹詩) / 부설거사(浮雪居士)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粥粥飯飯生此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 八竹詩 / 浮雪居士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내 7 세기 신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있었다. 그는 서라벌에서 출생해서 20세 때 출가를 했다. 수도를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던 중 김제에서 묘화(妙花)라는 아가씨를 만나 환속했다. 그리고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부설거사는 뒤에 내변산 쌍선봉 중턱에 월명암(月明庵)을 짓고 수도..

시읽는기쁨 2010.09.0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속을 외경으로 가득 채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군분투 싸우던 시절이었다. 칸트의 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심각한 척 폼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책을 독파했다. 당시에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은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을 읽었을 때 - 이 책은 부피도 얇고 읽기도 쉬웠다 - 뒷부분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이 두 가지가 결국 내가 찾는 ..

참살이의꿈 2010.06.07

[펌] 오늘이 인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업만 들어오면 “내가 선생질이나 하며 썩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따위 한탄이나 늘어놓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교사였지만 동시에 학생들에게서 가장 경멸받는 교사였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계집애 만나러 다니고 고고장 가고 하는 건 대학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못해서 안달하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지.” 사람 같아야 상대를 하지, 다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잠자코 있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한 녀석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하는 거하고 지금 하는 거하고 같습니까?” 수업은 중단되고 녀석은 교무실로 끌려가 종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녀석의 말은 내게 남았다. 한국 부모들은 대개 아이의 인생을 준비기와 본격기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길위의단상 2010.05.07

야누스의 나무들 / 이경임

몸의 반쪽은 봄을 살고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산다 꿈의 반쪽은 하늘에 걸어두고 꿈의 반쪽은 땅속에 묻어둔다 마음의 반쪽은 광장이고 마음의 반쪽은 밀실이다 생각의 반쪽은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반쪽은 잎새들을 지운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 - 야누스의 나무들 / 이경임 인생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겉의 얼굴만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이 그러하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봄이 찾아오고, 피어나는 꽃들은 잎새들을 지우는 약속을 한다. 행복은 불행을 잉태하고, 슬픔은 기쁨의 자식을 키운다. 복(福) 속에는 화(禍)가 숨어 있고, 화는 복을 부른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둠이 있어야 별은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인생이란 정말 그런 것이다. 이만큼 나이가 드니까 이젠 그걸 몸..

시읽는기쁨 2010.04.13

말 삼가기

지셴린 선생이 쓴 이란 책에는 ‘노년에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만, 특히 늙어서 조심해야 할 것으로 선생이 골라 놓은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말을 삼가자. 2. 나이로 유세 떨지 말자. 3. 사고가 경직되는 것을 막자. 4. 세월에 불복하자. 5. 할 일 없음을 걱정하자. 6. 무용담으로 허송세월하지 말자. 7. 세상과 벽을 쌓지 말자. 8. 늙음과 가난을 탄식하지 말자. 9. 죽음에 연연하지 말자. 10. 세상을 증오하지 말자. 선생의 아흔 인생 경험에서 나온 충고들인데 이 중에서 ‘말을 삼가자’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말을 삼가야 하는 것에 노소의 구별이 있으랴마는 특히 노인의 수다스러움은 누구에게나 참기 어려운..

길위의단상 2010.04.06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

시읽는기쁨 2010.03.30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은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시읽는기쁨 2009.09.15

등짐 / 임보

꿈에서는 그 꿈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아마 그런갑다 꿈에서 얽힌 일들 깨고 나면 다 풀리듯 이 세상 근심 걱정도 깨고 나면 다 풀릴 걸 등짐만 공연히 지고 등이 휘게 가는 갑다 - 등짐 / 임보 살아 생전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던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 가장 편안한 얼굴을 보이셨다. 등짐을 내려놓으니 그리 마음 편하셨나 보다. 삶이 버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모두들 무거운 등짐 하나씩 지고 사막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스스로 자청해서 진 등짐이고, 근심 걱정 또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인생이다. 죽어서야 벗어놓을 수 있는 등짐 하나씩 지고 우리는 살아간다.그 안에는 등이 휘어질 듯 무거운 돌맹이가 들어있다. 다들 돌맹이를 황금..

시읽는기쁨 2009.09.10

발자국 / 김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 발자국 / 김명수 발자국 남기는 건 유정한 인간의 일, 그 흔적 지우는 건 무심한 파도의 일.... 사람아, 그 흔적에 연연해 말아라. 때 되면 바다의 아늑한 품으로 돌아가리니, 그제야 타향살이 끝내고 본향에서 안식하리니...

시읽는기쁨 2009.08.06

영목에서 / 윤중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시읽는기쁨 2009.06.25

물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울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흘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

시읽는기쁨 2009.06.10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왕이면 한 번 뿐인 인생을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인생은 짓궂은 장난꾸러기여서 날 그냥 평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저런 근심 걱정거리가 끊임없이 몰려온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은 기묘한 곳에다 장애물을 숨겨두고는 마치 내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기다리는 듯하다. 돈으로, 건강으로, 직장 일로, 또는 사람들과의 불화로 인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다. 삶이란 내 의지대로 되기보다는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많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일생을 살면서 겪는 수고는 대개가 비슷하다. 유난히 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복을 타고났는지 평생을 무위도식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상대..

참살이의꿈 2009.04.07

그때 이랬다면

세상사는 뒤엉킨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는 온 우주가 관계한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우연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필연이라고 한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 지구별에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게 된 것도 기적 같은 사건들이 겹쳐서였다. 그중 하나만 없었어도 우리 존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마치 벽돌 하나가 빠지면 전체 건물이 붕괴되는 경우와 같다. 우리는 인과의 그물망이라는 시공간에서 존재하고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그런 장면이 있다. 한 남자가 늦잠을 잔다. 그가 급히 택시를 타는 바람에 한 여자가 택시를 놓치고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다음 택시를 탄다. 길을 가던 택시가 화물차에 막혀 신호를 기다리고, 이때 연습실에서 나온 데이시의 신발끈이 풀린다..

읽고본느낌 2009.04.03

웃음 90 초, 근심 3 시간

모 기업에서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재미있는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루 평균 10 회를 웃는데, 한번에 평균 9 초를 웃는다고 한다. 대신에 걱정하고 근심하는 시간은 하루에 3 시간 6 분으로 나왔다. 즐거워하는 시간보다 근심에 잠긴 시간이 124 배나 되는 것이다. 일생을 80 년이라 가정하면 사람은 평생에 30 일을 웃는 반면, 10 년여는 근심 걱정에 싸여 살아간다는 얘기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실감 난다. 잠자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많은 시간을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뭐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조사이지만 세상을 사는 일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녹녹치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심 걱정의 양이 아니라 거기에 매몰되는 삶이 ..

참살이의꿈 2008.10.24

인생

최근에 중국 소설 세 권을 읽었다. 다이호우잉의 , 그리고 위화(余華)의 와 이었다. 다이호이잉이 문화대혁명이 지식인에게 준 상처를 그렸다면, 위화는 역사에 짓밟힌 민중의 아픔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을 읽는 동안 여러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은 푸구이라는 노인이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들려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가 된다. 고난의 삶은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모두 앗아간다. 착하기만 한 아내 자전과 두 자녀 유칭과 펑샤, 사위인 얼시와 손자 쿠건이 각자 기막힌 사연들로 차례로 죽고 노인은 혼자 남는다. 푸구이의 삶은 국공내전과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며 거친 역사의 물..

읽고본느낌 2008.10.21

내 인생의 나이테

사람에게도 지나온 흔적이 눈으로 보이게 남는다면 나무와 같은 나이테가 있을 것 같다. 나무의 나이테는 기온에 따라 세포의 성장 속도가 다르므로 세포 크기에 차이가 생겨 생긴다는데, 사람에게도 분명 그런 변화가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여일하게 평탄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짧은 한평생을 살면서 누구나 시련과 고통을 겪는다. 시기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그런 인생의 매듭이 한 인간의 나이테로 나타날 것 같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굵고 두꺼운 검은 줄이 많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이테의 줄이 희미하게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느끼는 인생 짐의 무게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겉으로 보는 그 사람의 모습과 실제 나이테의 모양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

참살이의꿈 2008.01.27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 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

시읽는기쁨 2007.12.03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시읽는기쁨 2007.11.21

깨우치다 / 이성부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 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

시읽는기쁨 2007.11.12

위심(違心) / 이규보(李奎報)

人間細事亦參差 動輒違心莫適宜 盛世家貧妻常侮 殘年祿厚妓將追 雨읍多是出遊日 天霽皆吾閑坐時 腹飽輟飡逢美肉 喉瘡忌飮遇深모 儲珍賤末市高價 宿疾方광隣有醫 碎小不諧猶類此 揚州駕鶴況堪期 - 違心 / 李奎報 인간사 자질구레한 일 탈도 많아서 일마다 어그러져 뜻대로 되는 게 없어라 젊었을 땐 집 가난해 아내 늘 구박하고 말년에 봉급 많으니 기생들만 따르려 한다 주룩주룩 비 오는 날 놀러 갈 약속 있고 개었을 땐 대부분 할 일 없어 앉아 있다 배불러 상 물리면 맛있는 고기 생기고 목 헐어 못 마실 때 술자리 벌어지네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 오랜 병 낫고 나니 이웃에 의원 있네 자질구레한 일 맞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양주에서 학 타는 신선 노릇 어찌 바랄까 인생사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도리어 사는 게 재미..

시읽는기쁨 2007.10.02

골목 안 / 조은

실종된 아들의 시신을 한강에서 찾아냈다는 어머니가 가져다준 김치와 가지무침으로 밥을 먹는다 내 친구는 불행한 사람이 만든 반찬으로는 밥을 먹지 않겠단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더구나 자식을 잃어보지 않아서 그 아픔의 근처에도 가볼 수가 없다 웃을 줄 모르는 그녀의 가족들이 날마다 깜깜한 그림자를 끌고 우리집 앞을 지나간다 그들은 골목 막다른 곳에 산다 나는 대문을 잘 열어두기 때문에 그녀는 가끔 우리집에 와 울다가 간다 오늘처럼 친구가 와 있을 때도 있지만 얼마 전 가족을 둘이나 잃은 독신인 친구에게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멀고 낯설어 보인다 고통에 몸을 담고 가쁜 숨을 쉬며 살아온 줄 알았던 나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소멸한 슬픔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 골목..

시읽는기쁨 2007.06.26

그대 순례 / 고은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 그대 순례 / 고은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순례를 생각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단순성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몇 달씩 생계를 놓아도 그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난과 자유로움이 도리어 부러울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나는 한 번도 나를 찾는 순례에 나서본 적이 없다. 일상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육신을 먹여살릴 개나리봇짐 하나 메고 길 떠나본 적이 없다.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

시읽는기쁨 2007.04.13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William Henry Davies(1871-1940)는 영국의 '걸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시읽는기쁨 2007.02.23

인생 / 이선영

내 인생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생각됐던 때의,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 그러나 내 인생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윽고 그 남다르지 않은 인생들이 남다르지 않게 어우러져 가는 큰길에 줄지어 서서 이 늘비함을 따라 가야 할 뿐 슬며시 도망 나갈 외딴길이 없다는 낭패감 - 인생 / 이선영 인생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홀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우리는 늘 갈증을 느낀다.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에 큰길로 들어서면, 이제는 도망 나갈 외딴길을 찾지 못해 다시 낭패감에 빠진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헤매기만 하다가 이 생을 마칠 것 같다. 그런 과정이 인생인가 보다.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보다.

시읽는기쁨 2006.07.11

길은 어둡고 멀다

내 안에 숨어있는 칼날이 날카롭습니다. 그 칼날이 나를 찌릅니다. 많이 아픕니다. 길이 어두울수록 칼은 더욱 시퍼렇게 날을 세웁니다. 제멋대로 내 안을 휘젓고, 밖을 돌아다니며 상채기를 냅니다. 상처에서 나오는 선혈이 낭자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그 길을 찾았다 싶으면 곧허방에 빠집니다. 다시 오리무중입니다.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또 다른 달콤한 환상으로 이어집니다.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나는 늘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끝없이 추락하는 바위를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가야 할 길은 어둡고 멉니다.

참살이의꿈 2006.02.27

백점 인생의 조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100점 인생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먼저 영어 알파벳에 차례로 점수를 부여합니다. A에 1점, B에 2점, C에 3점. D에는 4점, 이런 식으로 해서 Z에 26점까지 붙여주면 됩니다. 그런 다음 영어 단어를 점수로 환산해 봅니다. 돈이 많으면 될까요? MONEY는 72점이군요. 건강은 어떨까요? HEALTH는 54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LOVE도 54점이네요. 세상 사는 것은 사랑 만으로는 되지 않나 봅니다. 행운이면 어떨까요? LUCK은 겨우 47점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KNOWLEDGE는 96점까지 되는군요. 열심히 일하면 될까요? HARD WORK은 98점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그럼 100점짜리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참살이의꿈 2005.03.19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

길위의단상 200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