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25

제라늄의 미소

벌써 10년째, 사시사철 고운 미소를 잃지 않는 네가 경이롭다. 그렇다고 정성으로 돌보는 것도 아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가끔 물 주고, 분갈이 안 한 지는 까마득해서 언제였는지도 모른다. 강산이 바뀔 세월이 흘렀는데도 너는 변함없이 밝은 미소를 띠고 있구나. 너에게야말로 '반려'라는 말을 붙여주고 싶다. 제라늄이 여러해살이 식물이라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자라는지 궁금하다. 줄기 아랫 부분은 이미 딱딱한 목질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곧 널 만나고 어느덧 10년, 그 긴 기간 동안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추운 겨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결같은 네 미소 앞에서 어찌 우울할 수 있으랴. 비 내리는 쓸쓸한 초겨울이지만, 네가 있어 행복한 오늘이다.

꽃들의향기 2021.11.30

비바리움

인간의 삶을 시니컬하면서 재미나게 그린 영화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생을 한 꺼풀 벗겨낸 실상은 어쩌면 이 영화와 같은 악몽인지 모른다. '비바리움'은 은유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는데 큰 수고를 요하지는 않는다. 톰과 젬마는 결혼 후 살 집을 알아보러 부동산 회사에 들린다. 마틴이라는 직원을 따라 주택 단지에 들어가 한 집을 소개받지만 단지 밖으로 나갈 길을 잃어버린다. 똑같은 집들이 사방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세트장이다. 탈출할 온갖 방도를 써 보지만 실패한다. 난데없이 박스로 아이가 배달되면서 영화는 우리의 결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초반에 탁란으로 크는 뻐꾸기가 나오는데 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근..

읽고본느낌 2021.11.29

100명산 중간 점검

10년 전에 퇴직을 한 뒤 우리나라의 100명산을 오르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때까지 오른 산을 제외하니 남은 산은 68개였다. 한 해에 예닐곱 산을 오른다면 일흔 살이 될 때까지는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도전해 보니 일 년에 서너 개 산이 고작이었다. 그것마저 발이 고장나는 바람에 몇 년을 쉬게 되었다. 이제 일흔이 되어 점검해 보니 그동안 13 산을 더한 게 고작이었다. 남은 산은 55인데 이미 날은 저물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는 글렀다. 수도권 15[완료 15] O - 감악산, 관악산, 도봉산, 마니산, 명성산, 명지산, 백운산, 북한산, 소요산, 용문산, 운악산, 유명산, 천마산, 축령산, 화악산 강원권 22[완료 11] O - 가리산, 두타산, 백덕산, 백운산, 설악산, 오대산, 오봉산,..

길위의단상 2021.11.28

양재 나가는 길

서울 양재에 나갈 때는 경강선과 신분당선 두 노선의 전철을 이용한다. 삼동역에서 타는 경강선은 손님이 적은지 20분에 한 대씩 운행해서 시간이 맞지 않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때는 구내에서 대기하기보다 역 바깥으로 나가 짧은 산책을 한다. 산책 코스는 언덕의 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10여 분 정도 둘러보고 나면 전철 시간에 맞는다. 지금은 가을걷이가 끝나서 휑하지만 여름에는 온갖 푸성귀의 초록 물결로 넘실댄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농막에는 이불과 취사도구가 있어 노인들이 여기서 하루를 소일하며 보낸다. 신분당선으로 갈아탄 뒤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목적지에서 한 정거장 전인 양재시민의숲역에서 내려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양재시민의숲은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도로를 경계로 나누어진 ..

사진속일상 2021.11.27

밤이 얼마나 되었나 / 김시습

밤이 얼마나 되었나,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숱한 별 찬란하여 빛발을 쏟누나 깊은 산 깊고 깊어 가물가물 어두운데 아아 그대는 어찌 이런 산골에 머무는가 앞에는 범과 표범 뒤에는 승냥이와 이리 게다가 올빼미 날아와 곁에 앉는 곳 인생살이란 뜻 맞음이 귀한 법 그대는 어이해서 홀로 허둥대는가 나 그대 위하여 오래된 거문고를 타려 하나 거문고 소리 산만하여 슬픔이 밀려오고 나 그대 위하여 긴 칼로 검무를 추려 하나 칼 노래 강개하여 애간장을 끊으리 아아 슬프다 선생이여, 무엇으로 위로하랴 삼동 이 긴긴 밤을 어이 한단 말인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燦爛生光芒 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鄕 前有虎豹後豺狼 況乃鵬鳥飛止傍 人生百歲貴適意 君胡爲乎獨遑遑 我欲爲君彈古琴 古琴疏越多悲傷 我欲爲君舞長劍 劍歌慷慨令斷腸 嗟嗟先生何以慰 ..

시읽는기쁨 2021.11.23

마르코복음[30]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 지역으로 가셨는데, 어떤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묵으려 하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 없었다. 그런데 어린 딸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 부인이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 발치에 엎드렸다. 그리스 사람으로 시로페니키아 출신인 그 부인이 딸한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십사고 간청하니 예수께서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지, 자녀들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셨다. 그러자 부인이 "예, 주님. 그렇지만 상 아래 강아지들도 아이들이 먹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시오. 바로 그 말로 말미암아 딸한테서 귀신이 떠났습니다." 부인은 집으로 가서,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귀신이 떠난 것을 알았다...

삶의나침반 2021.11.22

광교산을 걷다

광교산 밑으로 이사한 둘째네 집에 간 길에 산길을 걸었다. 멋모르고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까지 욕심냈으나 오후 2시에 출발해서는 무리였다. 왕복 14km나 되어서 예닐곱 시간은 잡아야 하는 긴 길이었다. 오늘은 수지성당에서 소말구리고개까지 다녀오는 7km 정도의 길을 세 시간 정도 걷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코스는 긴 능선길인 만큼 큰 오르내리막이 없는 최적의 길이었다. 휴일이지만 미세먼지가 자욱해서 산을 찾은 사람이 적어 길은 한적했다. 오롯이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알맞았다. 광교산에는 갈래길이 엄청 많다. 이리저리 오솔길이 무수히 나 있다. 사방이 인간의 거주구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헷갈려 마주오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리로 가면 광교산이 나오나요?" "여기가 ..

사진속일상 2021.11.21

작별 일기

노약한 부모를 실버타운에 모신 뒤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2016~2018)의 기록이다.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가 부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면서 구술생애사 작가면서 딸인 최현숙씨가 썼다. 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이며/특수한 과정이 애틋하면서 또한 담담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작가를 포함한 남매들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 집 남매들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정성은 각별하다. 지은이는 2008년부터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맡아왔다. 그 경험이 본인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

읽고본느낌 2021.11.19

개의치 않으련다

늙어가면서 신체와 정신에 변화가 생긴다. 둘을 비교한다면 정신보다는 신체의 변화가 더 빠르고 큰 것 같다.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하듯이, 노년이 되면 육체가 정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물론 정신이 먼저 문제가 생기는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이 크게 엇박자를 내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나란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진입한 나를 관찰해 보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변화가 느껴진다. 전에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을 썼다. 내 언행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먼저 살폈다. 그래서 늘 조심했고, 동시에 실수를 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이것은 내 오래된 습(習)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

참살이의꿈 2021.11.18

바깥 잠과 수면제

어제저녁에는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8시였다. 10시간 정도 잠을 잔 것이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다. 보통 저녁 10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난다. 나는 하루에 아홉 시간 정도 잠자는 '롱 슬리퍼(long sleeper)'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는데 나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아홉 시간 동안 내내 자지만, 어쩌다 오줌이 마려워 한 번쯤 깰 정도다. 이만하면 잠 복은 타고난 것 같다. 넌 심간이 편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하지만 나라고 세상 살아가는 염려나 스트레스가 덜한 건 아니다. 타고난 체질일 뿐이다. 그런데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밖에 나가서 잘 때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달라진 잠자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선 베개 높이가 달..

길위의단상 2021.11.17

마리 퀴리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그것도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각각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남편인 피에르 퀴리도 노벨상을 받았고, 그녀의 딸인 이렌과 사위들도 노벨상을 받았다. 2대에 걸쳐 무려 다섯 명의, 여섯 개의 메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결과다. '마리 퀴리'(원제는 Radioactive)는 위대한 과학자면서 선구적인 여성이었던 마리 퀴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1934년에 퀴리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퀴리는 남성 중심의 당시 과학계에서 아웃사이더였다. 그녀는 과학 연구만이 아니라 여성을 무시하고 진입을 막는 장벽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읽고본느낌 2021.11.16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

시읽는기쁨 2021.11.15

베틀바위와 울산바위

어쩌다 베틀바위를 가게 되었다. 자리 하나가 있다길래 좋은 기회라 여겨 꼽사리를 끼게 된 것이다. 베틀바위와 울산바위를 보러 가는 1박2일의 일정인데, 두 곳 다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선뜻 승낙했다. 둘째가 동해에 살 때 두타산은 여러 차례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베틀바위 코스는 그때보다 한참 뒤인 작년에 개방이 되었다. 워낙 유명세를 타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한 번쯤 다녀왔을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게 아니라 베틀바위는 충분히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도 멀리 제주도에서 단체로 온 탐방객이 있었다. 두타산 550m에 위치한 베틀바위를 중심으로 다섯 구간의 산성길이 있다. 우리는 오후에 도착한 관계로 전체 구간을 돌지는 못하고 A, B, E 구간을 거쳐 D구간 계곡길..

사진속일상 2021.11.14

만일암 느티나무

전남 해남군 두륜산 중턱의 만일암(挽日菴) 터에 있는 느티나무다. 안내문에는 수령이 1,200년에서 1,500년 사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명 '천년수(千年樹)라고 부른다. 이 천년수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다. "옛날 옥황상제가 나는 천상에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느 날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는 벌을 받았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루 만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둘은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만일암 앞 천년수 나무에다 끈으로 해를 매달아 놓고, 천녀는 북미륵암 바위에 앉은 모양의 불상을, 천동은 남미륵암 바위에 서 있는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천녀가 먼저 ..

천년의나무 2021.11.11

가을 여행(3) - 두륜산

사흘째 날, 일행은 관매도 섬 트레킹을 하지만 나는 두륜산에 오르기로 한다. 등산 후에는 바로 귀가할 예정이다.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친구도 있다. 아침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친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백 호 가까이 되는 큰 동네였다는데, 지금은 40호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중부 지방은 빈 밭으로 변했는데, 여기 배추는 아직 싱싱하다. 해남으로 가는 길에 진도타워 전망대에 잠깐 들린다. 울돌목을 지나는 명량해상케이블카는 올 9월에 개통했다. 주차장에서 대흥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단풍을 만끽한다. 대흥사와 두륜산은 30년 전 쯤에 직장 동료들과 찾은 적이 있다. 전날 여관에서 밤새 술 마시고 화투 치며 노느라 두륜산을 오르다가 포기했다. 이번에는 어떻게라도 올라보고 싶었다. 두륜산(..

사진속일상 2021.11.11

녹우당 은행나무와 해송

전남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살던 집이다. 고산은 82세 되던 1668년 수원에 있던 집을 뱃길로 옮겨와 다시 복원하여 지었다고 한다. 녹우당에 오래된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수령이 500년인 은행나무는 해남 윤씨 증시조인 윤효정 아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나무 높이는 23m이고 줄기 둘레는 5.9m로 수세가 왕성한 나무다. 더 뒤로 들어가면 300년 된 해송이 있다. 이 나무도 생육 상태가 양호하다. 나무 높이는 24m이고 줄기 둘레는 3.4m다. 녹우당 뒤에 비자나무 숲이 있는데 아마 비슷한 시기에 같이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천년의나무 2021.11.10

가을 여행(2) - 진도

친구 집에서 차려준 아침을 먹고 둘째 날 일정을 시작한다. 어젯밤에 나는 오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친구들은 읍내에 나가 당구를 치고 돌아와서는 또 카드 게임인 마이티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마이티는 그 시절 대학생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던 추억의 놀이다. 나는 아예 배우지를 않았으니 그 자리에 끼지도 못했다. 각자의 개성이나 지향점에 따라 어울리는 그룹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때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노는 걸 별로 마땅치 않게 여겼다. 우리가 묵은 친구 집, 마당의 야자수가 남도 지방임을 말해준다. 아침에 잠시 고구마 캐는 작업을 거들다. 먼저 찾은 곳은 용장성(龍藏城)이다. 여기는 고려 삼별초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원종 11년(1270)부터 14년(1273)..

사진속일상 2021.11.10

첫눈이 내리다(2021/11/10)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예고도 없이 닥친 첫눈이었다. 약 30분 정도 '백설(白雪)이 난분분(亂紛紛)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제법 흩날렸다. 그러나 영상의 기온 탓에 땅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았다. 작년 첫눈이 12월 13일이었으니 한 달 이상 빠른 셈이다. 예년의 통계보다도 열흘 정도 이르다고 한다. 아내는 연신 텃밭의 무 걱정을 한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햇살이 쨍, 하고 다시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사진속일상 2021.11.10

가을 여행(1) - 신안

올해가 대학 입학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열아홉 살의 풋풋했던 그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갔다. 돌아보면 아득하고 멀다. 50주년을 축하할 겸 동기들 아홉 명이 추억의 가을 여행을 떠났다. 이나마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마스크를 덮어쓰고 살아야 될 줄 그때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친구의 진도에 있는 고향집을 숙소로 삼고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4박5일 동안의 일정이다. 첫째 날 - 신안 천사대교, 퍼플교 둘째 날 - 진도 용장성, 벽파정, 운림산방, 민속공연, 세방낙조 셋째 날 - 관매도 숙박 넷째 날 - 조도 트레킹 다섯째 날 - 울돌목 해상케이블카 개인적으로 진도는 세 번째 가는 길이다. 나는 2박만 함께 하고 셋째 날에는 두륜산을 오르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동기들 중에 등산을..

사진속일상 2021.11.09

마르코복음[29]

바리사이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율사 몇이 예수께 몰려왔는데, 그분 제자들이 더러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그들이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와 모든 유대인은 조상 전통을 지켜, 한 웅큼 물로라도 손을 씻지 않고는 먹지 않는다.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몸을 씻지 않고는 먹지 않는다. 그밖에도 지켜야 할 전통이 많이 있으니, 잔이나 옹자배기, 놋그릇이나 침대 따위도 노상 씻는다. 그래서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어째서 당신 제자들은 조상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가 위선자인 당신들을 두고 잘도 예언했으니,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섬기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도다. 헛되이 나를 떠받드나니 사람의 계명을 가르..

삶의나침반 2021.11.04

반짝이는 가을빛에 이끌려

반짝이는 가을빛에 이끌려 점심을 먹고 뒷산에 올랐다. 그냥 집에 있기에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였다. 오랜만에 올라본 뒷산은 이미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뒷산에는 단풍나무가 없다. 8할 이상이 참나무 종류다. 그래서 가을 단풍은 황색이 주종을 이룬다. 같은 황색 계열이더라도 나무에 따라, 단풍 드는 시기에 따라 색깔이 무척 다양하다. 일 년 중 숲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단장을 할 때다. 뒷산은 가볍게 오른다. 배낭도 없이 맨몸으로 오르니 다이어트를 한 뒤 마냥 가뿐하다. 그동안 등산으로 몸을 길들여놓은 원인도 클 것이다. 산 속은 온통 가을의 한복판이다. 이런 때 시 몇 편 꺼내 읽어보는 건 또 어떠리.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

사진속일상 2021.11.03

다읽(13) - 의식 혁명

20여 년 전에 화제를 모았던 책이다. 인간의 개인과 집단 의식의 중요성을 과학적 근거를 들며 갈파한다. 이 책에서 특이한 사항이 운동역학적 근육 테스트다. 수평으로 내민 팔에 힘을 가할 때 근육이 저항하는 정도로 인간계의 모든 현상에 대한 진위 구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데이비드 호킨스가 쓴 이 책의 원제는 다. 'Force'는 지각할 수 있는 외적인 힘이고, 'Power'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력이다. 인간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힘 덕분에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잠재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엄청날 정도로 강력한 끌개의 에너지 패턴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개개인의..

읽고본느낌 2021.11.02

똑똑한 풍선초

봄에 이웃에서 준 풍선초 씨를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심었다. 곧 싹이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덩굴이 위로 뻗어올랐다. 천정 빨래건조대에 줄 여러 개를 연결해 줬더니 초록 잎이 병풍처럼 자라서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풍선초는 이파리, 줄기, 꽃, 열매의 조형미가 뛰어나서 보기에 좋다. 식물 자체도 깔끔하다. 풍선초는 끝이 없을 듯 성장하며 키가 커 갔다. 천정까지는 줄을 연결할 수 없어 건조대를 넘어가는 줄기는 이발하듯 가위로 잘라줬다. 여름 내내 주기적으로 다듬어주는 게 내 일이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했더니 어느 때부터는 풍선초가 위로 자라는 걸 포기하는 것이었다. 제 몸을 비비 꼬며 건조대 아래서만 놀지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식물도 제 몸에 위해가 가해지는 걸 감지하고 그에 대응하는..

꽃들의향기 202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