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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등꽃

차로 3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에 등꽃 명소가 있다.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러다가 등꽃이 지면 아쉬워할 게다. 다른 인생사와 마찬가지다. 집 가까이서도 등꽃을 볼 수 있다. 동네 산책 중에 만나지만 볼 때마다 감탄한다. 여기는 야생 상태로 자라는 등나무다. 이 나무 앞에 서면 봄은 보라색이다. 그런데 올해는 색깔이 좀 시무룩하다. 등나무는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르는 덩굴식물이다. 등나무가 얼마나 힘이 세고 질긴지 잘못 등나무와 인연을 맺으면 자리를 내준 나무는 죽을 지경이 된다. 사람 세상에서도 이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식물 세계든 인간 세계든 마음 편하게 살자면 우선 이웃을 잘 만나야 하는 법이다. 세상살이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등꽃을 ..

꽃들의향기 2023.05.05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

시읽는기쁨 2023.05.04

마르코복음[78]

정오가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번역하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곁에 있던 이 가운데 몇이 듣고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 해면을 식초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서 예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면서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봅시다" 하였다. 예수께서 큰소리를 지르며 숨지셨다. 이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주 서 있던 백부장이 예수께서 외치며 숨지시는 것을 보고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자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막달라 여자..

삶의나침반 2023.05.03

맑고 바람 좋은 날

노동절 연휴의 끝, 맑고 바람 좋은 5월의 첫날이었다. 오랜만에 뒷산에 오르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금은 신록(新綠)을 지나 성록(盛綠)의 계절을 앞두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여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날은 내 마음도 하늘 높이 올라가는 풍선이 된다. 하늘 높은 데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그저 아름답기만 한 지구별이 아닐까.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며 끝없이 끝없이 올라가보고 싶다. 꽃들은 서로 화내지 않겠지 향기로 말하니까 꽃들은 서로 싸우지 않겠지 예쁘게 말하니까 꽃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겠지 사랑만 하니까 비가 오면 함께 젖고 바람 불면 함께 흔들리며 어울려 피는 기쁨으로 웃기만 하네 다불어 사는 행복으로 즐겁기만 하네 꽃을 보고도 못 보는 사람이여 한철 피었다 지는 꽃들도 그렇..

사진속일상 2023.05.02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2021년에 나온 마종기 시인의 산문집이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바람의 말' '우화의 강' '갈대' 같은 시를 좋아한다. 시인의 부친이 마해송 작가이신데 어렸을 때 작가의 동화를 읽으며 자랐다. 커서는 아들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마종기 시인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수련의 시절을 거쳐 전문의가 되었다. 평생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했으며 은퇴 뒤에는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왜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 사연이 자세히 나온다. 의사와 시인으로서 성공한 삶을 사신 유복한 분이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글 곳곳에 묻어 있다. 시의 바탕도 이런 향수나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대표시인 '바람의 말'을 쓰게 된 배경 설명도 ..

읽고본느낌 2023.05.01

봄비 내린 뒤 탄천

봄비는 언제나 반갑다. 멀리는 산속 울창한 수목들에 산불 위험이 사라져 좋고, 가까이는 텃밭에서 올라오는 새싹들이 생기를 띄게 되어 좋다. 또한 비는 백내장을 앓는 눈처럼 희뿌연한 대기를 말끔히 청소해 준다. 아침에는 우산을 들고 나갔지만, 오후가 되니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S와 만나 당구놀이를 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마침 비가 그쳐 탄천을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습기 가득한 풋풋한 내음이 상쾌했다. 저절로 깊은 심호흡이 되었다.

사진속일상 2023.04.30

18세와 81세

고등학교 동창 카페방에 누군가 재미있는 글 하나를 올렸다. 제목이 '18세와 81세'인데 읽다 보니 웃음이 나면서 씁쓰레하다. 나도 81세가 눈앞에 와 있다.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다리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이 안 멈추는 18세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철 모르는 18세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 찾아 나서는 81세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81세다. 그렇다면 한국 남성은 81세가 되면 반 정도만 생존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같이 희희낙락하는 친구들이지만 곧 반..

길위의단상 2023.04.29

두원리 느릅나무

강원도에는 오래된 느릅나무가 많다. 횡성군 둔내면 두원리에 있는 이 느릅나무도 연륜에서 상위권에 드는 나무다. 수령이 400년 정도이고, 나무 높이는 23m, 줄기 둘레는 5.4m에 이른다. 이 나무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한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느릅나무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같은 거목이 되었다 한다. 어느 해인가 느릅나무가 잎이 피지 않고 시들해져 갔다. 경북 풍기에서 한 소년이 병으로 죽으면서 어머니께 말하기를, 제가 죽으면 강원도 두원리에 있는 느릅나무를 찾아가 보라고 한 후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이 느릅나무를 찾아오자 잎이 다시 피어나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서낭신을 모시고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지성을 드린다고 한다.

천년의나무 2023.04.28

약수리 느릅나무(2023)

10년 만에 다시 만난 평창 약수리 느릅나무다. 이번에 옆을 지나갈 때는 구면인 줄 몰랐다. 뭔가 눈에 익은 구석이 있어 자료를 찾아봤더니 꼭 10년 전에 대면했던 나무였다. 어찌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나 책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다. 한참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인연이 있었음을 알아챈다. 나무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다만 도로와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너무 옹색하게 느껴진다.

천년의나무 2023.04.28

평창 생태마을에 다녀오다

평창에 있는 생태마을에 아내와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정식 명칭은 '성필립보 생태마을'이다.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환경 생태 농원으로 황창연 신부님이 담당하고 계신다.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서 신자들을 위한 피정 시설도 있다. 아내가 생태마을 회원이어서 신청한 후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생태마을은 예상했던 대로 규모가 상당했다. 생태마을의 주 생산품은 우리 콩으로 만드는 간장, 된장, 청국장 가루다. 참나무 장작으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황토방에서 발효시킨다. 생태마을에는 300개의 장독이 있다. 생태마을 옆으로 평창강이 흐른다. 생태마을을 조성하기까지 애쓴 여러 분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휴식과 힐링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방은 두 명씩 사용한다. 이번에는 여덟 명이 참가했..

사진속일상 2023.04.27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날마다 먹고 먹히는 강한 자가 지배하지도 약한 자가 지배당하지도 않는 초원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잡아먹을 것 없으니 잡아먹힐 두려움이 없다 먹이를 쫓을 일도 부리나케 몸을 숨길 일도 없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허덕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제 페이스는 제가 알아서 꿰매며 간다 공연히 몸에 열을 올려 명을 재촉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물려받은 달음박질 기술로 한 번쯤 모래바람을 가를 수도 있지만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 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면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니체는 인간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이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읽는기쁨 2023.04.25

어금니 깨물기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이다. 시인의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이 떠오른다. 시인의 사전에서 단어들이 영롱하게 꽃 피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봤었다. 그 뒤로 을 읽어봤으니 정작 시보다 산문을 더 많이 접한 셈이었다. 시인의 예민한 감성의 촉수가 내 무딘 마음을 간지리는 책들이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어금니 깨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 같다. 회복을 갈망해 온 울퉁불퉁한 시간들의 기록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책에는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타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씨가 요란하지 않으면서 따스하게 그려져 있는 글들이다. 책 표지에는 시인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시인. 수없이 반복해서 지겹기도 했던 일들을 새로운 ..

읽고본느낌 2023.04.24

새싹은 힘이 세다

텃밭에 심은 콩이 새싹을 내밀고 있다. 비교적 손쉽게 흙을 뚫고 나온 아이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커다란 흙덩이에 짓눌려 고군분투 애쓰는 모양이 안타깝다. 이 아이는 고개가 꺾인 채 제 몸무게의 수천 배나 될 법한 흙덩이와 씨름하고 있다. 연약해 보이는 새싹이지만 생명의 의지는 더없이 강하다. 마음 같아서는 흙덩이를 치워주고 싶지만 자연 속 생명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한다.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아이는 언젠가는 장애물을 이겨내고 꿋꿋이 제 힘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월하게 자란 아이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우뚝 서지 않겠는가. 나는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며 쪼그려 앉아 한참을 바라본다. 힘내라, 새싹!

사진속일상 2023.04.23

근린공원 철쭉

진달래, 벚꽃이 지고 철쭉의 계절이 찾아왔다. 어딜 가나 화려한 색깔의 철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개인적으로는 철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요란하게 화장을 한 여인네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나는 작고 소박해서 눈에 뜨일락말락한 꽃에 끌린다. 동네 근린공원에도 경사면에 심어진 철쭉밭이 있다. 조성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가까이서 철쭉 군락을 볼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다. 철쭉은 이렇듯 무리지어 피어있어야 볼 만하다. 멀리서 보면 꽃주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철쭉과 연산홍을 구분하는 것에 아직 자신이 없다. 내가 소싯적에 동네 산에서 만난 철쭉은 - 당시는 철쭉이라 하지 않고 진달래라 불렀고, 진달래는 참꽃이라 했다 - 아래 사진처럼 연분홍 색깔이었다. 워낙 뇌리에 강하게 남..

꽃들의향기 2023.04.22

화성 한 달 살기

어젯밤 10시 33분에 있었던 스타십 시험 발사를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았다. 미국 현지시간으로는 아침 8시 33분이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30여 초를 남기고 중단되어 또 연기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몇 분 뒤 재개되었다. 스타십(Starship)은 화성으로 가기 위해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야심차게 시도하는 프로젝트다. 추진체인 부스터와 우주선인 스타십의 2단으로 구성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높이가 120m에 달하며 추진력이 7,500t에 달하는 이제까지 인류가 만든 로켓 중 가장 크고 강하다. 우리나라의 누리호 추력이 300t이니 스타십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다. 스타십에는 승객 100명과 화물 100t 이상을 실을 수 있다. 머스크는 스타십을 이용하여 2050년까지 화성에 10..

길위의단상 2023.04.21

마르코복음[77]

군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인 궁전 뜰 안으로 끌고가서 온 부대를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더니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며 굽실거렸다. 또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무릎 꿇어 절했다. 그렇게 놀리고 나서 자색 옷을 벗기고 겉옷을 입힌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러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지나가던 한 사람을 붙잡아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와 루포의 아버지인데 마침 들에서 오던 길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골고타'라는, 번역하면 '해골터'라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몰약 탄 포도주를 드렸으나 그분을 받으시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각자 차지할 몫을 놓고 주사위를 던졌다. 이윽고 그들이..

삶의나침반 2023.04.20

동네 봄꽃 산책

어제 비 내린 뒤 대기가 깨끗해지면서 화창한 봄날이 열렸다. 그간 궂은 날씨가 이어지다가 오랜만에 환한 햇살이 반짝이는 날씨다. 아침 식사를 하고 동네 봄꽃 산책을 나선다. 동네 뒤편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복사꽃이 화사하다. 어느 집 정원에 핀 겹벚꽃이 눈길을 끈다. 마침 집 현관을 나오는 주인에게 양해를 얻고 들어가 나무 가까이에서 꽃을 감상하다. 눈부시게 고운 색깔이다. 정확한 이름은 왕겹벚꽃이라고 알려준다. 옆에 진홍색 꽃이 있어 물어보니 복숭아와 벚나무를 접 붙인 나무라고 한다. 사실인지 의아할 정도로 둘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꽃이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만첩홍도(꽃복숭아)인 것 같다. 이건 꽃사과겠지. 꽃잔디 색깔도 화려하고, 향기에 이끌려 가 보니 수수꽃다리가 ..

사진속일상 2023.04.19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화장실 세면대 옆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9년 전에 친구가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며 기념으로 준 수건이다. 아랫단에 친구 이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어렵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현재에만 충실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 일이 발목을 잡아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간다. 반면에 동물은 단순하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매여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리 두 마리가 연못 위에서 직각을 이루는 물길을 따라오다가 충돌했다. 이내 꽥꽥 소리와 푸드덕 날갯짓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두 오리는 서로 떨어져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네가..

참살이의꿈 2023.04.18

노인 / 이화은

평생 조연으로 살더니 드디어 주인공이 되었다 집안에서도 모임에서도 아무 데를 가도 최고령이다 최고라는 말이다 주인공이 죽는 걸로 결말이 나는 연극을 보듯 관객들이 모두 주시한다 건강은 어떠세요 기색을 살핀다 언제쯤 죽어 연극이 끝이 나려나 뻔한 결말이지만 그래도 반짝 이 호황을 누려야 한다 이것도 잠깐이다 - 노인 / 이화은 "이제 길어야 10년 남았다." 동년배들 모임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것도 과대평가해 줘서 그렇다.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대략 75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5년도 채 안 남았다는 게 된다. 인생 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해진다. 황혼이 지면서 언덕 너머로 종착역이 보인다. 미련이 남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시간차만 있을 뿐 누구나 노년이 닥치고 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

시읽는기쁨 2023.04.17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동물의 왕국'류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연계에서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착각하기 쉽다. 아프리카 야생의 자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생존경쟁의 장으로 보인다. 다윈의 '적자생존'이라는 개념도 잘못 받아들이면 자연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주변을 제압하고 최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 책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해서 신선하다. '적자(適者)'란 강한 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라는 것이다. 손 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역시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종들 가운데 가장 다정하고 협력적인 종이다. 온갖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면 인간만큼 잔인한 종도 없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라는 것이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 같다가도 워낙 선입견이 강해선지 고개가 갸웃해진다. 지은이는 '자기가축화..

읽고본느낌 2023.04.16

추억의 서달산

15년 전 서울 생활 마지막에 살았던 동네는 동작동이었다. 아파트가 서달산 옆에 붙어 있어서 시간이 나면 오르곤 했다. 뒷산이었던 셈이다. 여기 살 때 교직에서도 은퇴한 터여서 기억에 많이 남는 장소다. 경떠모에서 서달산 트레킹이 있었다. 서달산은 국립현충원을 둘러싸고 있어서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길은 그때와 여전하고, 이렇게저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발걸음을 자꾸 느리게 만들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이동한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산길에서 당시 살았던 아파트가 보였다. 울면서 들어가서 요란했던 4년을 보내고 떠난 곳이었다. 아내가 뇌수술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회복 기간에 아내와 함께 현충원 산책을 자주 나왔다. 유난히 이곳에서 살았던 때에 애틋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

사진속일상 2023.04.15

사인암과 청련암, 소나무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잠시 들린 단양 사인암(舍人巖)이다. 우뚝 솟은 50m 높이의 수직암벽이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옆으로는 남조천이 흐른다. 단양팔경 중에서도 도담삼봉과 함께 으뜸이다. '사인(舍人)'은 고려 시대 벼슬 명칭인데 이곳 출신인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이 사인으로 재직할 때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선생이 쓴 '탄로가(嘆老歌)'가 유명하다. 한 손에 막대 집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사인암 앞 평평한 바위에 암각 바둑판이 있다고 해서 보려고 갔는데 막상 사인암에 가서는 깜빡했다. 나이가 들면 자주 이렇게 된다. 다음에 다시 와야 할 이유 하나 남겨둔 셈이다...

사진속일상 2023.04.14

제비가 돌아온 날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다녀왔다. 내려가는 길에 단양 사인암에 들렀다가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타고 죽령을 넘었다. 봄 색깔로 물든 산야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군데군데 차를 멈추었다. 우리 지방에서는 벚꽃이 이미 졌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벚꽃이 일부 남아 있어 신기했다. 올해 날씨는 꽃이 피는 순서도 그렇고 뭔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며칠 더 일찍 왔다면 어머니와 벚꽃 나들이도 가능했을 것 같았다. 다음 날은 어머니와 밭에 나가 고사리를 꺾고 산소를 정리했다. 작년 같았으면 밭 전체에 농사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을 터인데 올해는 힘이 부치시다면서 일부만 손을 보셨다. "딴 소리 말거라, 일 하고 싶어도 못 할 때가 온다"라고 늘상 말씀하셨는데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산소에 난 잡초를..

사진속일상 2023.04.13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기후변화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기후변화의 현실과 심각성을 확신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룹부터 기후변화의 위기가 과장되었으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그룹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이런 사람들 태도는 여섯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경각심, 우려, 신중, 무관심, 회의, 거부 등이다. 기후변화 메시지에 왜 이처럼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인간 활동으로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무리 쏟아져도, 세계 곳곳에서 재난이 벌어져도 많은 사람들은 기후 문제에 무관심하다. 기존의 기후 과학은 사람들을 설득해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논리적인 이 접근법은 설득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자주..

읽고본느낌 2023.04.10

마르코복음[76]

바로 그 새벽에 대제관들이 원로들과 율사들과 함께, 곧 온 최고회의가 결의를 하여, 예수를 묶어 데려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인 왕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대제관들이 여러 가지로 그분을 고발했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얼마나 여러 가지로들 고발하고 있는지!" 그러나 예수께서 더는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니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청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폭동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빠라는 자가 구속되어 있었는데 군중이 올라가서 관례대로 해 주기를 청하자 빌라도는 "유대인 왕을 풀어주라고요?" 하고 대꾸했다. 사실 그는 대제관들이 예수를 ..

삶의나침반 2023.04.09

동네에서 만난 새

일본 사람이 쓴 탐조 안내서다. 일본은 이웃 나라여서 살아가는 새들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도감을 봐도 서식지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지은이인 이치니치 잇슈는 필명으로 '하루 한 종(一日一種)'이라는 뜻이 재미있다. 는 일상에서 새를 보며 느끼게 되는 궁금증을 풀어준다. 깔끔한 그림과 함께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적당하다. 새를 보는 이유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새들의 동작이나 습성을 관찰하다 보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동네를 거닐다 만나는 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새들의 노랫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새들의 지저귐은 구애의 목적 외에도 영역 선언이나 적의 접근을 알리는 경고음도 다양하다. 새소리는 번식기의 지저귐과 평소에 내는 울음소리로 나눈다. 번식..

읽고본느낌 2023.04.07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입학식이 따로 없고 자기 생일 아침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덟 살짜리와 열두 살 짜기가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돌려달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할머니와 직장인과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 등록금을 나라에서 다 대주는 나라 달리기 시합 때 아이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골인하는 나라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나라 연간 입국 관광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나라 군대 없는 나라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키우지도 않고 수입하지도 않는 나라 에너지를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 식량 자급을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존중하는 나라 새..

시읽는기쁨 2023.04.06

반가운 봄비 속 벚꽃 드라이브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해 밤새 낙수물소리를 내더니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만하면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농사나 산불 예방에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집에서 가까운 남종면의 팔당호 벚꽃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곳 벚꽃은 인근 지역에 비해 일주일 정도 늦게 핀다. 예년 같으면 이제 봉오리가 맺히면서 피려고 할 때다. 그런데 이미 만개 상태를 지나서 지고 있다. 도로는 떨어진 꽃잎으로 덮여 있다. 여기가 이럴진대 다른 곳은 벌써 벚꽃 엔딩일 것이다. 올해는 꽃 개화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오래전부터 이런 추세가 계속되고 있어서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꽃을 보면서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다. 날씨가 맑았다면 차로 가득 찰 도로인데..

사진속일상 2023.04.05

인간의 세 가지 편향

인간이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 두뇌는 불완전하고 허점 투성이다. 군중 심리에 쉽게 매몰되고 형편없는 신념을 금과옥조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면 근거의 박약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다. 인간은 '털 없는 원숭이'에 더 가깝다. 앞으로 AI 시대가 되면 인간의 설 자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진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너무 건방진 말이 아닐까.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고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싶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들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이 제시하는 인간이 범하는 세 가지 편향 오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첫 번..

참살이의꿈 2023.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