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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밍한 걷기

하루의 감정 상태는 일기(日氣)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다. 요 며칠 동안 잔뜩 흐린 채 간간이 비가 뿌리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왕 내리는 비라면 시원하게 뿌렸으면 좋으련만 전립선 걸린 중년 남자의 오줌발처럼 찔끔거린다. 경안천으로 걷기에 나서보지만 우중충한 하늘 아래서 마음만 개이길 바랄 수 있겠는가. 밍밍하면서 기계적인 걷기다. 이런 마음이라면 발 옆에 핀 꽃에도 눈길을 주지 못한다. 맹물에 식은 밥을 말아먹는 맛이다. 된장에 매콤한 고추라도 마련되어 있다면 좋으련만. 안팎이 다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우울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공원의 약 올리듯 선명한 초록 잔디를 보며 중얼거린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밍밍한 맛도 때론 별미가 될 수 있..

사진속일상 2023.08.25

인생의 의의와 가치

아주 오래전, 20대 때 본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권이 있다. 대부분 내용은 잊었는데 책의 모양과 제목만은 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책을 샀던 서점과 서가의 풍경까지 떠오른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다. 이 책을 가방 속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맛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어두운 색의 하드 커버 표지에 두께는 얇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1966년에 신조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지은이는 오이켄이라는 독일 철학자였고, 제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제목과 외형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논지를 펼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

참살이의꿈 2023.08.23

인류의 여정

인류의 여정이라고 하면 대략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해서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간 뒤 현재의 문명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이 거대한 여정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책 은 오데드 갤로어(Oded Galor)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류의 여정을 풀이한다. 다루는 주요 주제는 부와 불평등의 기원이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급격한 전기를 맞았다. 지은이는 산업혁명을 인류의 여정의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본다. 지은이가 그래프로 보여주는 건강이나 부, 교육 면에서의 변화는 이 시기에 와서 너무나 폭발적이다. 마치 빅뱅이 일어난 것 같다. 그전까지 인류의 삶은 질적인 면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대동소이했다. 기술 혁신이 있었더라도 생활수준이 향상되..

읽고본느낌 2023.08.22

공짜 / 박호현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 공짜 / 박호현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더니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글이 큰 깨우침을 준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은 전부 공짜가 아닌가. 나도 공짜 목록을 적어보며 불평하는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어느 노래 가사에도 이런 게 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온 놈이 이만큼 가졌으면 부자가 아닌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에 결핍을 느낄 ..

시읽는기쁨 2023.08.21

사기[5-3]

"오기는 사람됨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다. 그가 젊을 때 집안에는 천금이나 쌓여 있었음에도 벼슬을 구하여 유세하다가 이루지도 못하고 파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비웃자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30여 명을 죽이고는 동쪽으로 위나라 성문을 빠져나왔다. 오기는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자기 팔을 깨물며 맹세하기를 '저는 공경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오기는 증자를 섬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 어머니가 죽었지만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증자는 오기를 야박하다고 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었다. 이에 오기는 노나라로 가서 병법을 배워 노나라 군주를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노나라 군주가 의심하자, 오기는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군이 되려 하였다. 대체로 노나라는..

삶의나침반 2023.08.20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

여름 하늘

염제(炎帝)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한낮 땡볕 가운데를 걸어도 긴 시간이 아니라면 즐길 만하다. 집 에어컨도 이제 한철 소명이 끝났다. 대신 선풍기 도움은 당분간 받아야겠지. 여름 하늘이 아름답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뭉게구름이 떠 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풍경만 바라봐도 지리할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면서 연신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그때마다 하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무쌍한 청(靑)과 백(白)의 그림판이다. 가을이면 운동회가 열렸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아이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함치며 뛰놀았다. 청과 백으로 나눈 것이 하늘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하늘은 누가 누굴 이기는 마당이 아니다. 청과 백이 어울리는 조화의 세계다. 지..

사진속일상 2023.08.18

공산토월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문구 작가의 대표 중단편을 모은 책이다. 연작소설인 '관촌수필'에서 네 편, '우리동네'에서 두 편, '유자소전' 등 기타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관촌수필(冠村隨筆)'은 두 번째 읽어보는데 마음 밑바닥을 흔드는 감동은 처음과 같았다. 작가의 자전소설인만큼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그 시절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했다. 이 책에는 네 편이 담겨있는데 '일락서산(日落西山)'에는 작가의 할아버지, '행운유수(行雲流水)'에는 옹점이, '녹수청산(綠水靑山)'에는 대복이, '공산토월(空山吐月)'에는 신석공이 나온다. 다시 읽어봐도 제일 끌리는 인물은 역시 '행운유수'의 옹점이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옹점이를 만났다. 작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열 살 위의 소녀 옹점이는 ..

읽고본느낌 2023.08.17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사기[5-2]

손빈은 길 옆에 있던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 흰 부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골라 쇠뇌 1만 개를 준비시켜 길 양쪽에 매복시키고 기약하여 말했다. "저물 무렵에 불이 들려지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방연은 정말 밤이 되어서 껍질을 벗겨 놓은 나무 밑에 이르러 흰 부분에 씌어 있는 글씨를 발견하고는 불을 밝혀 비추어 보았다. 방연이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은 한꺼번에 1만 개의 쇠뇌를 한꺼번에 쏘았다. 위나라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방연의 자신의 지혜가 다라고 싸움에서 진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며 말했다. "결국 어린애 같은 놈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구나!"..

삶의나침반 2023.08.15

꽃범의꼬리

이웃 텃밭이 환한 이유는 밭 둘레에 이 꽃이 피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 텃밭에는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으면 무엇이라도 심으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밭 둘레에 옥수수 하나라도 더 심으려고 최대한 넓혀 놓았다. 그런데 이 밭 임자는 경계에 꽃을 심었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어도 마음의 여유가 전해져 미소가 인다. 나도 가을에는 코스모스 씨라도 받아야겠다. 이 꽃은 꽃범의꼬리다. 피소스테기아(physostegia)라고도 한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흰색, 분홍색, 붉은색 등 다양하다. 꽃의 어딘가에 범의 꼬리와 닮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범의 꼬리를 닮은 것은 범꼬리라 불리는 다른 식물이 있다. 꽃범의꼬리는 외래종이지만 흔히 보는 여름꽃이 되어가고 있다.

꽃들의향기 2023.08.14

태풍 지난 뒤 경안천

태풍 카눈이 얌전하게 지나갔다. 한반도에 들어온 뒤에는 세력이 약해져서 우리 고장을 관통했건만 태풍이라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신나게 달리다가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린 자동차 같은 모양새였다. 대신 태풍이 남긴 구름이 이틀째까지 사라지지 않으면서 가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산을 들고 오랜만에 경안천에 나갔다. 그래도 천변의 낮은 길은 물에 잠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안천의 지류인 직리천에서는 궂은 날씨지만 아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부부가 보였다. 어머니 손에는 곤충 채집망이 들려 있다. 우리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여름방학이면 곤충/식물 채집 숙제가 있었다. 방학책 표지에는 으레껏 채집망을 어깨에 걸친 아이들 그림이 나왔다. 지금 돌아보면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진속일상 2023.08.13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프레임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진영이 여론을 이끌어 나간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외친들 도리어 코끼리를 생각나게 해 줄 뿐이다. 반대하는 순간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되어 있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가 쓴 이후 '프레임'이란 말은 유행어처럼 번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는 미국에서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고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면서 민주당이 참패한 때였다. 진보 진영이 왜 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은 '프레임'이라는 핵심 단어로 풀고 있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과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

읽고본느낌 2023.08.12

투 쿠션 태풍 '카눈'

2023년의 6호 태풍인 카눈(Khanun)이 한반도에 진입한 후 오늘 새벽 평양 부근에서 소멸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에는 강도가 약해져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카눈은 여느 태풍과 달리 두 번이나 급격하게 진로를 변경한 점이 특이했다. 요사이 당구에 관심이 있어선지 카눈의 경로를 보면서 당구의 투 쿠션이 연상되었다. 카눈은 7월 28일에 발생하여 북서진하다가 8월 4일에 대만 부근에서 티베트기단에 가로막혀 300도가 넘는 방향 전환을 했다. 동쪽으로 향하던 카눈은 8월 7일에 북태평양기단에 부딪쳐 90도로 꺾이면서 우리나라로 향하게 되었다. 심하게 회전을 하면서 충돌하는 당구공의 경로와 유사해서 흥미로웠다. 주고받는 힘 관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또한 카눈은 7월 28일부..

길위의단상 2023.08.11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

시읽는기쁨 2023.08.09

사기[5-1]

"신은 이미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때에는 군주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무는 결국 대장 두 사람을 베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들 다음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대장으로 삼고 다시 북을 쳤다. 부녀자들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뒤로, 꿇어앉기, 일어서기 등을 모두 자로 잰 듯 먹줄을 긋듯 정확하게 하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손무는 전령을 보내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군대는 이미 잘 갖추어졌으니, 왕께서는 시험 삼아 내려오셔서 보십시오. 왕께서 그들을 쓰고자 하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오나라 왕은 말했다. "장군은 그만 관사로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과인은 내려가 보고 싶지 않소." - 사기 5-1, 손자오..

삶의나침반 2023.08.08

제비콩

넝쿨식물인 제비콩은 길만 잘 만들어주면 엄청난 높이까지 성장한다. 이 제비콩은 3층을 지나 옥상까지 올라갈 기세다.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면서 관상용으로도 적당하다. 꽃은 보라색이고 콩꼬투리 역시 짙은 보라색이다. 옛날에 처갓집이 단독주택에 살 때 여름이면 마당에 심은 제비콩이 2층 옥상까지 올라가서 집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제비콩을 보니 내년에는 텃밭이나 베란다에서 제비콩을 길러볼 생각이다. 따가운 여름 햇볕을 가려주면서 꽃과 열매까지 선사하니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꽃들의향기 2023.08.07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

더위를 피해 오전 일찍 도서관에 다녀오다. 도서관은 청량한 매미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엄청 쾌적하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사람들도 드문드문이고 한적하다. 피서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 그러나 나는 책을 빌린 뒤 이내 나온다. 아무래도 집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매미 소리에 끌려 나무 사이를 살피니 매미 한 마리 한창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중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위협을 느꼈는지 노래를 멈춘다. 얼른 사진만 찍고 자리를 피해주다. 더워서 그런지 밖에 나선 사람들이 적다. 요사이 우리 고장의 낮 최고 기온은 33도 정도다. 저녁이 되면 28도 아래로 떨어진다. 아마 도시 한가운데라면 열기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교외 지역에 사는 장점 중 하나다. 오가는 길에 배롱나무꽃이 불붙..

사진속일상 2023.08.06

삼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근자에는 국어 선생을 했던 후배가 추천하기도 해서 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쳤지만 자기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두꺼우면서 낯선 용어가 자주 나와 읽기에 부담이 될 거라고 주의도 줬다. 마침 출판사 지만지에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를 펴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는 염상섭 작가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이다. 215회까지 이어졌다니 보통의 연재소설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분량이다. 현재의 책으로도 1천 페이지가 넘는다. 이 작품이 문학사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나로서는 특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1920년대의 경성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보는 재미는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1..

읽고본느낌 2023.08.05

텃밭 허수아비

이웃 텃밭에서 허수아비가 망을 보고 있다. 하늘을 보면서 싱긋 웃는 모습에서 노래하는 송창식이 떠오른다. '참새의 하루'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바람이 부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허수아비 뽐을 내며 깡통 소리 울려대겠지" 요사이 새들이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친구로 여기지 않을까. 하도 별스런 일들이 자주 생기는 세상이니 허수아비와 새가 동무가 된다 한들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소년 시절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곡식이 익어가는 철이 되면 아이들은 논으로 양철통을 들고 나갔다. 여무는 벼 낟알을 먹기 위해 몰려다니는 참새떼를 쫓기 위해서였다. 허수아비로는 참새를 막는데 역부족이었다. 양철통을 북처럼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면 논에 내려앉았다가도 부리나케 도망갔다. 동네..

사진속일상 2023.08.04

금주 1년

술을 끊은 지 꼭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 50년이 넘는 주사(酒史)를 칼로 무 베듯 단절한 결행이었다. 가끔 폭주(暴酒)하는 게 문제였다. 젊었다면 영웅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늙어서 부리는 주취(酒醉)는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녹음된 술 취한 내 목소리를 듣고 크게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 광마(狂馬)를 본 것이다. 금주한 뒤 나타난 육체적 변화는 속/위장이 편해진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수시로 속이 부글거리고 소화가 안 되는 증상에 시달려 왔다. 주원인이 스트레스와 알코올이었다. 두 가지가 제거되니 제일 반기는 부위가 위장인 것 같다.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증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게 침묵하는 위장은 나로서는 생..

길위의단상 2023.08.03

사기[4]

"어째서 약속 시간보다 늦었습니까?" 장가가 사과하며 말했다. "못난 저를 대부들과 친척들이 송별연을 열어 주어 지체되었소." 양저는 말했다. "장수란 명령을 받은 그날부터 그 집을 잊고, 군영에 이르러 군령이 확정되면 그 친척들을 잊으며, 북을 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할 때에는 그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적국이 깊숙이 쳐들어와 나라가 들끓고 병사들은 국경에서 뜨거운 햇살과 이슬을 맞고 있으며 군왕께서는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음식을 드셔도 단맛을 모릅니다. 백성의 목숨이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거늘 무슨 송별회란 말입니까?" 그러고 나서 군정(軍正, 군대 법무관)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는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 늦게 도착한 자에게는 어떻게 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대답했다. "마땅히 베어야..

삶의나침반 2023.08.02

당구 혀?

지인과 통화할 때면 늘 물어보는 말이 있다. "당구 혀?"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면 무척 반갑다. 선뜻 장소와 시간 약속을 잡는다. 어제도 5년 만에 한 친구와 만났다. 며칠 전 통화를 하다가 당구를 한다는 얘기에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다음에 보자, 라고 하면서 미루었을 게 분명하다. 당구가 아니었으면 언제 볼지 기약이 없었으리라. 요사이 당구 공부에 빠져 있다. 당구 책도 샀다. 좀 더 잘 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예전에 바둑 공부할 때는 바둑책 수십 권을 봤다. 그에 비하면 당구는 이제 시작한 셈이다. 너무 앞서나가려는 마음은 자제시켜야 마땅하리라. 목표가 있으면 의욕과 활력이 생기지만, 대신에 스트레스도 받게 된다. 알고 보..

사진속일상 2023.08.01

이런 삶의 대학 하나 세우는 꿈 / 김예슬

우리 대학은 입학시험이 없다. 우리는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다. 당연히 교수도 캠퍼스도 없다. 입학시험은 없지만 진정한 자신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 필요하다. 졸업장과 자격증은 없지만 일생을 함께할 자신감과 좋은 벗들이 주어진다. 교수는 없지만 숨은 현자와 장인과 토박이 지성들이 우리의 교수다. 캠퍼스는 없지만 온 국토와 지구마을과 삶의 현장이 우리의 캠퍼스다.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 발목이 시리도록 대지를 딛고 계절의 길을 거닐며 야생자연을 탐험한다.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건강법을 익힌다. 지감각을 되살리고 민감한 감성으로 절정체험의 순간을 느낀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사는 법을 익힌다. 우정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

시읽는기쁨 2023.07.31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13년 전인 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 교정에 대자보가 하나 붙었다. 제목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로 경영학과 3학년생이던 김예슬이 쓴 것이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 대학생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거부 선언이 찬반 논란을 불러왔고, 숨 죽이고 있던 목소리가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블로그에 대자보 전문을 옮겼고 공감을 표하며 응원을 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없었다. 호수에 생긴 파문은 이내 가라앉아 보였다.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는 강고한 시스템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김예슬 씨가 선언을 하게 된 배경과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소책자인데 선언을 한 그해에 ..

읽고본느낌 2023.07.30

일일초

이웃에 자그마한 집이 있다. 터가 좁아서 마당도 없이 길에서 바로 현관으로 연결된다. 돈이 많은 집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느 집과 다른 점은 집 주변이 항상 꽃으로 풍성하다. 땅이 없으니 화분에 심은 꽃들이다. 집주인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고운 분이실 것 같다. 화분 옆에는 꽃에 물을 주기 위한 페트병이 놓여 있는데, 반쯤 물이 담겨 있다. 꽃을 가꾸는 분은 약하신 몸의 할머니일지 모르겠다. 젊은이 같다면 남은 물을 저렇게 밖에다 남겨두지는 않을 테니까. 올여름에는 붉은색 일일초가 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일일초는 페어리스타와 비슷한 품종이다. 고향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라고 한다. 열대 식물이니 지금이 제 철을 만난 셈이다. 한자로 '日日草'라 쓴다면 매일매일 피는 꽃을 볼 수 있다..

꽃들의향기 2023.07.29

텃밭의 선물

이즈음 텃밭이 주는 선물은 고추, 가지, 호박, 상추, 토마토 등이다. 아내는 매일 이른 아침에 텃밭에 나가서 무언가를 들고 온다. 덕분에 아침 식탁이 초록으로 싱싱하다. 그중에서도 제일 감사하며 먹는 것이 토마토다. 밭에서 바로 따온 토마토의 맛은 시장에서 사는 것과는 비교될 바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게 한 가지 있다. 토마토에 발간 색깔이 돌기 시작하면 새가 먼저 와서 시식한다. 농숙하기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익기 전에 미리 따 와서 하루 정도 집에 두어야 한다. 맛있는 걸 누가 먼저 먹나, 새와 시합하는 것 같다. 선조들은 날짐승을 위해 까치밥을 남겨뒀다. 나도 토마토 한 포기 정도는 그들의 먹이로 제공할 생각이 있다. 그런데 새들은 무차별적으로 쪼아버린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협상을 할 수도 ..

사진속일상 2023.07.28

사기[3-2]

예전에 정나라 무공(武公)은 호나라를 칠 계획으로 자기 딸을 호나라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데 어느 나라를 치면 되겠소?" 관기사(關其思)가 대답했다. "호나라를 칠 만합니다." 이에 관기사를 죽이며 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호나라는 형제 같은 나라인데 그대는 호나라를 치려고 하니 어찌 된 일이오?" 호나라 군주는 이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친한 친구 나라로 여기고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군사들이 호나라를 습격하여 취하였다. 관기사가 한 말은 옳으나 목숨을 잃었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용은 잘 길들여 가지고 놀 수도 있고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삶의나침반 2023.07.27

나의 행복 /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돈은 아내가 벌고 나는 놀면서 지내니까!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딱 싫고 그저 KBS 제1FM방송. 이 방송은 거의가 고전음악인데 고전음악광인 나는 그래서 행복의 진짜 맛이다. 막걸리 한 되 한 병을 매일같이 마누라가 사준다. 한 병을 정오에 사면 6시까지 가니 어찌 탓하랴?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거리랑 없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어기겠습니까? 행복은 충족이다. 나 이상의 행복은 없고, 욕망이라고는 없으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행복 / 천상병 시인의 나이 쉰셋이면 1982년에 쓴 시로, 의정부 장암동에 있던 허름한 집에 살던 시절이다. 여느 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다. 천상병표 행복..

시읽는기쁨 2023.07.26